법원이 준 '증거인멸' 기회? "자료 다 파기했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증거 인멸 행위... 엄정한 책임 묻겠다"
▲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이 조사를 받기 위해 9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며 취재진 질문을 듣고 있다. ⓒ 연합뉴스
법원이 대법원 재판기록 수만 건을 빼돌렸다는 의혹을 받는 유해용 변호사(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의 압수수색 영장을 잇달아 기각하는 동안, 유 변호사는 갖고 나간 자료를 모두 파기했다. 검찰이 범죄 가능성을 포착하고 수사를 벌인다는 것이 공개된 상황에서 대놓고 자료를 파기한 것이다. 법원이 수차례 영장을 기각하면서 결국 '증거인멸'의 기회를 준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이어진다.
지난 2월 법복을 벗은 유 변호사는 2014년부터 2016년까지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으로 근무했다. 검찰이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의혹 수사에 들어가면서 유 변호사가 대법원 재판기록, 연구관 보고서 등 수만 건의 자료를 빼돌린 정황을 포착했다. 함께 근무했던 연구관들은 검찰에서 "(유 변호사가) 작성한 보고서를 USB에 담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납득하기 힘든 세 차례 영장 기각
검찰은 지난 5일 특허소송 관련 부분만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서 갔고 사무실에서 기밀자료 다수를 발견했다. 수사팀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해 유 변호사에게 임의제출을 권유했으나 그는 "영장을 갖고 오라"며 거부했다.
검찰은 즉각 법원에 압수수색 영장을 다시 청구했다. 그런데 법원은 외부에서 기밀 서류가 발견됐음에도 반나절을 끌다가 "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죄 및 형사법절차전자화촉진법 위반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라며 기각했다. 자세한 사유는 밝히지 않았다.
검찰은 납득하기 힘들다는 반응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 수사 당시 이 전 대통령의 삼성 소송비 대납 혐의와 관련해 인정 여부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법원은 당일 신속하게 영포빌딩 압수수색 영장을 내준 바 있다. 검찰은 6일 우선 대법원에 기밀자료 불법반출 건 고발을 요청했다. 다음날 법원행정처는 "적절하지 않다"며 고발을 거부했다.
법원은 시간을 끌었다. 검찰이 7일 다시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하자, 법원은 주말(8~9일)이 지난 10일 이후 결정하겠다고 통보했다. 8일에는 영장전담 판사가 두 명이나 근무하고 있었다. 압수수색은 신속성이 담보돼야 의미가 있는 수사방식이지만 법원은 사흘이나 지나 영장발부 여부를 결정한 것이다.
사흘이나 시간을 끈 결과는 '또 기각'이었다. 박범석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10일 오후 "대법원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부적절한 행위이나 죄가 되지 않는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통합진보당 소송에 개입한 의혹이 있는 문건에만 한정해 일부 영장을 발부했지만 '기밀문서 유출' 수사 전반에는 제동이 걸렸다.
박 부장판사가 유 변호사 관련 압수수색 영장을 심사한 것도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 변호사가 대법원 선임재판연구관으로 근무할 당시 박 부장판사는 재판연구관으로 개인적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또 유 변호사가 들고 나간 자료에 박 부장판사가 작성한 자료도 포함됐을 수 있다. 박 부장판사는 유 변호사 영장의 이해관계자인 셈이다.
서약서까지 제출하고도 '파기'
이렇게 영장이 기각되는 사이 유 변호사는 수사 대상인 문서들을 모두 파기했다. 법원행정처는 세 번째 영장이 기각된 뒤 10일 저녁 8시 30분께 "유 전 연구관에게 자료 제출을 문의했는데 '영장이 기각된 후 출력물을 파쇄했고 컴퓨터 저장장치는 분해해 버렸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밝혔다.
유 변호사는 지난 5일, 검찰에 "해당 자료를 훼손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면서 뒤로는 현직 판사들에게 "나는 죄가 없다"는 취지의 이메일을 발송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 변호사 측은 "통진당 사건과 관련해 해당 문건을 대법관이나 담당 연구관에게 전달한 적이 없다고 진술하였고 이 내용은 대법원도 확인한 것으로 알고 있음"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이와 관련해 검찰은 엄정하게 수사하겠다는 입장이다. 행정처가 파기 사실을 알린 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은 즉각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증거 인멸 행위에 대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한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