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 뒤바꾼 0.179073329%P... 노회찬의 못 이룬 꿈
[강상구의 진보정치] 노회찬의 꿈, 연동형 비례대표제 ①
▲ 2004년 4월 14일,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후보가 명동 입구에서 지지를 호소하는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 권우성
촛불혁명 이후 가장 느리게 변하고 있는 것이 정치다. 정치 변화를 위해서 지금 필요한 것은 국회 구성 규칙을 바꾸는 일, 즉 연동형비례대표제 도입이다. 노회찬의 삶의 자취를 밟으며 선거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짚어본다. - 기자 말
"간신히 3%대를 유지하던 자민련의 정당득표율은 자정쯤 2.9%로 떨어지고 맙니다. 이후 2.9%와 3%사이를 오락가락하기 2시간. 김종필 후보와 노회찬 후보의 당락도 덩달아 엎치락뒷치락 한 2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새벽 2시가 지나자 2.9%는 3%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차이는 불과 0.1%. 결국 0.1% 때문에 보수정객 김종필은 퇴장하고 노동운동가 출신 노회찬은 한국 정치의 전면에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총선이 있기 3개월 전인 1월 10일 노회찬 대표는 서울 은평지구당 후보선출대회에서 축사를 했었다. 축사의 맨 마지막은 이랬다.
"김종필 총재의 10선 등극이 좌절되는 낭보를 준비 중이다!"
축사를 이렇게 하긴 했지만, 그 낭보를 이뤄낸 당사자가 본인이 될 거라는 걸 노회찬 대표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김종필의 10선 등극이 좌절된 것보다 대한민국 정치에 더 낭보는, 노회찬이라는 정치인의 화려한 등장이었다.
2004년 총선, 그날 밤
▲ 2004년 4.15 총선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 발표 당시 모습. 민주노동당의 원내 제3당이 유력해지자 노회찬 선대본부장(가운데) 등 지도부들이 기뻐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자, 우리 연습 한 번 해보겠습니다."
2004년 총선 당일, 민주노동당은 말할 수 없는 흥분 상태에 빠져 있었다. 투표일 며칠 전, 공표되지 않은 여론 조사에서 20%를 훌쩍 뛰어넘는 지지율을 기록했다는 소식까지 들렸었다.
개표 상황실에는 각 방송국의 개표 방송을 볼 수 있는 대형 TV 여러 대가 설치되고, 그 앞에 의자 100여 개쯤이 가지런히 놓였다. TV카메라가 수도 없이 와 있었다. 살면서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그 각종 장비들의 배열만으로도 난 들떴다.
"6시가 딱 되고, 총선 출구 조사 결과가 뜨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는 겁니다. 아셨죠?"
진보정당 최초의 원내 진출이 기정사실이었던 그날 밤, 여러 달 전까지 한나라당 당사였던 여의도 한 빌딩에서 우리는 개표를 기다리며, 연습을 했다. 야구 연습, 피리 연습 같은 건 해 봤어도, 원내 진출에 열광하는 연습이라니. 사람들은 난생 처음 하는 경험에 얼굴이 화사해졌다.
"우와~!!!!!!"
정각 6시. 연습이 필요 없었다. 박수와 환호가 그야말로 폭발했다. 뒷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벌떡 일어나 손을 번쩍 위로 치켜들었다. 박수를 쳤고, 세상 가장 큰 웃음을 지었다. 앞줄에 있던 단병호, 천영세, 심상정, 최순영 등 당선자들이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나눴다. 그 사이에 노회찬 대표가 있었다.
사무실 앞은 축제 분위기였다. 대형스크린이 설치됐고, 간단한 무대가 만들어졌다. 당사 앞에 몰려든 당원들과 시민들은 민주노동당을 상징하는 주황색 풍선을 흔들면서 행복감을 만끽했다. 어떤 사람들은 맥주를 마셨고, 누구는 춤을 췄다. 그 자리에 나온 노회찬 대표는 당선을 확신하는 표정으로 "아직까지 밥을 못 먹었습니다, 사발면 남은 거 없습니까?"로 시작하는 유쾌한 연설을 했다.
지옥과 천당을 왔다갔다한 노회찬
▲ 2004년 4월 15일 오후 6시 노회찬 민주노동당 선대본부장이 출구조사 발표 이후 당직자들과 인사하고 있는 모습. ⓒ 오마이뉴스
나는 거기서 발언할 처지도 아니었고 춤까지 출 성격도 못 돼서, 전국노래자랑 구경하는 얌전한 꼬마 자세로 그들을 바라봤다. 12시가 넘어 어두운 밤인데도, 그날은 세상 밝은 날이었다. 유난히 상쾌한 공기가 기억에 남아 있다.
당직 생활 1년 차였던 나는 노회찬 대표가 밤늦게까지 천당과 지옥을 왔다갔다 한 줄은 까맣게 몰랐다. 애초에 출구조사 결과는 비례 9번까지 당선이었다. 당연히 노회찬 대표는 당선될 줄 알았었다.
"노회찬 총장님도 아슬아슬하게 당선 됐어요."
밤새 놀다 뭣 모르고 다음날 늦게 출근한 나는, 새벽까지 진보정당의 떠오르는 별 노회찬과 보수정당의 지는 별 김종필 간의 대접전이 있었다는 걸 그때서야 들었다. 새벽에 벌어진 월드컵 결승전을 놓친 느낌은 아니었다. 자민련이 정당득표 3%를 얻을 경우, 김종필이 되고 노회찬 대표가 떨어지는 상황이었지만, 다행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0.179073329%P 차이였다.
총선 몇 달 전부터 각종 TV토론에서 '노회찬 어록'을 선보이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노회찬이었다. 총선 투표일이 되기 전에 팬클럽이 생겼다면서 어색해 하던 그였고,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보여줬던 진보의 별 노회찬이었다.
그의 시작도 비례대표였다.
중이 제 머리를 깎다
노회찬 대표는 언젠가 자신이 진보정당 원천기술보유자라고 했다. 그는 진보정당 원천기술보유자일 뿐 아니라, 선거제도개혁의 원천기술보유자다.
노회찬 대표가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 건, 총선에서는 최초로 실시됐던 1인 2표 정당명부비례대표제 때문이었다. 사람에게 한 표, 당에게 한 표 찍는 선거제도는 그때 처음 실시됐다. 1인 2표제가 없었다면 그때 상황에서 노회찬 대표가 국회의원이 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노회찬 대표는 1인 2표제를 도입하게 한 장본인이다. 중이 제 머리를 깎은 셈이다.
"청구인들로서는 늦어도 1992.3.24.부터 180일 이내에 이 사건 헌법소원을 제기하였어야 하는데 같은 날짜로부터 180일이 훨씬 지난 후임이 날짜 계산상 분명한 1993.10.27.에 제기된 이 사건 헌법소원심판 청구는 그 기간이 도과된 후에 제기된 것이므로 부적합하다고 할 것이다."
1995년 10월, 헌법재판소는 한 헌법소원심판청구에 대해 이런 이유로 각하 결정을 했었다. 1992년 3월 24일은 총선이 있던 날이다. 잘못된 선거제도로 선거를 치른 것이 문제라면, 이때부터 180일 이내에 헌법소원을 제기해야 하는데, 지각 제출을 했으니 도리가 없다는 얘기다.
이때 헌법소원심판 청구의 신청인이 노회찬이었다. 노회찬 대표는 1993년 당시 진보정당추진위원회 대표로서 이 헌법소원을 제기했었다.
과거엔 지역에서 얻은 의석수를 기준으로 비례대표 의석수를 배분했을 뿐, 정당투표는 따로 하지 않았다. 유권자는 1인 1표를 행사했었다. 노회찬 대표는 정당투표는 정당투표 대로 별도로 해야 한다는 취지 등으로 헌법소원을 제기했던 것이다. 그때가 벌써 25년 전이다. 원조가 달리 원조가 아니다.
날짜가 지났다는 이유로 헌법소원심판 청구를 각하당한 노회찬 대표는 2000년 2월 16일, 또다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이때가 2000년 총선 직전이었다. 당시엔 민주당, 한나라당, 자민련 이렇게 3당 원내총무가 한 때 1인 2표제에 합의하기도 했었지만 곡절 끝에 국회 본회의 표결에서 1인 2표제가 무산됐다. 이 상황을 국회 밖에서 지켜본 노회찬 대표는 다시 한 번, 이번엔 제 시간에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선거제도가 왜 중요한가
▲ 정기국회 개회식 참석한 여야 의원지난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정기국회 개회식에서 문희상 국회의장과 국무위원을 비롯한 여야 의원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는 모습. ⓒ 남소연
노회찬 대표의 헌법소원심판 청구는 2001년 7월 한정위헌 결정으로 돌아왔다. 2004년 노회찬의 아슬아슬한 당선은 그 바뀐 선거 제도 아래서 가능했다. 노회찬 대표는 손수 제작한 자동차에 마지막으로 올라탔고, 그 덕에 우리는 노회찬이라는 정치인과 한참 동안 행복할 수 있었다.
흔히 선거제도를 놓고 다투는 정당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국회의원 밥그릇 싸움' 한다고 한다. 그러나 선거제도야 말로 국회의원 밥그릇 싸움이 아니라 국민 밥그릇 싸움이다. 이 싸움은 제대로 해야 한다.
비디오 판독을 실시할지 말지, 3점슛 제도를 도입할지 말지, 이런 문제들을 다룰 때 각 나라는 자기 나라 국가대표의 특기에 따라 유불리를 판단할 것이다. 터프하게 경기하는 팀은 비디오 판독제도 도입에 반대할 테고, 장거리 슛의 정확도가 높은 팀은 3점슛 제도에 찬성할 것이다. 여기까지라면 제도개선 과정은 전적으로 자기들끼리의 밥그릇 싸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건, 관객들이 경기를 충분히 즐길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경기의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비디오 판독 제도가 도입되는 것이고, 키 큰 사람들만 유리한 경기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농구에서 3점슛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메달권에 드는 팀도 늘어난다. 관객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경기가 흥미진진해진다.
하물며 정치는 스포츠보다 더 이 점을 고려해야 한다. 유권자가 단순히 관객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보다 객관적이고 보다 공정해져야 유권자들이 정치에 더 흥미를 갖게 된다. 만약 관객에 대한 고려 없이, 공정성도 객관성도 팽개치고 그저 늘 이기는 자들이 계속 자신에게 유리한 규칙만 고집한다면 관객은 그 경기를 외면할 것이다. 지금 정치가 딱 그 꼴이다.
그 다음 과제는 연동형비례대표제
▲ 국회의사당 전경. ⓒ 김지현
"선거제도만 바꿀 수 있다면 나는 평생 국회의원 안 해도 된다. 내가 여기서 물구나무라도 서겠다."
심상정 의원이 노회찬 대표의 추모문화제에서 노 대표가 생전에 하셨다면서 소개한 말이다. 물구나무서겠다고 한 장소가 어딘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노회찬 대표가 바랐던 건, 민심 그대로 국회가 구성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각 정당이 얻은 득표율만큼 의석이 분포되는 게 옳다는 얘기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이 쉬운 게 우리 국회에서는 안 된다.
방법은 연동형비례대표제다.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노 대표의 1라운드가 1인 1표제를 1인 2표제로 바꾸는 것이었다면, 2라운드는 연동형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연동형비례대표제라는 말도 너무 어렵지 않나?"
여러 사람이 내게 이 말을 했었다. 연동형비례대표제는 당이 얻은 지지율과 의석수를 정확히 일치시키기 위해 고안된 제도다. 예를 들어 정의당이 총선에서 20%를 얻었다면, 국회의원은 60명이 되는 게 맞다. 그런데 지역구 당선자가 10명뿐이라면? 나머지 50명은 비례의원이 당선되는 제도다. 복지국가에서는 대부분 이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다만, 말이 좀 어렵다.
"불로의석방지제 어때? 한나라당이 부산에서 60% 얻어도 의석은 100% 가져가잖아. 불로의석이지."
"표심왜곡방지법이 더 낫지 않을까?"
"좀 세게 가자. 표심약탈방지법 같은 걸로."
"득표연동의석제, 아니 득표맞춤의석제가 좋을 것 같은데."
어쨌든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연동형비례대표제라고 부른다. 핵심은 이렇다. 민심이 A당을 10% 지지하면 의석수도 10%, 민심이 B당을 20% 지지하면 의석수도 20%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국회가 국민의 의사 분포를 그대로 닮은 국회가 된다. 연동형비례대표제는 '민심 그대로 선거제도'다.
"불판을 바꿔야 한다."
"50년 동안 썩은 판을 이제 갈아야 합니다.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 먹으면 고기가 시커매집니다. 판을 갈 때가 이제 왔습니다."
2004년 총선 직전 노회찬 대표가 TV토론에서 했던 이 주장은 실현되지 않았다. 사람은 늘 바뀌었다. 총선 때마다 반수 이상의 국회의원이 물갈이 되는 게 보통이다. 그렇다고 정치가 바뀌었다고 보는 국민은 드물다. 노회찬 대표 말처럼 오래된 판에 새고기를 연달아 올리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이제는 판을 바꿀 때가 됐다.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그 핵심이다.
"총선이 언제죠?"
어제도 이 질문을 받았다. 내 머릿속엔 '2020년 총선'이 내가 태어난 연도만큼 선명하게 각인돼 있는데, 당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면 보통 이렇지는 않다.
2020년 총선 이전에, 그러니까 앞으로 1년 반 사이에 연동형비례대표제 도입이 결정된다.
노회찬재단(가칭) 설립 추진 |
노회찬재단(가칭) 설립 실행위원회는 지난 10월 8일부터 준비위원 구성 및 시민추진위원 모집을 시작했다. 시민추진위원 참여는 노회찬재단 준비위원회 홈페이지(https://www.hcroh.org)에서 할 수 있다. |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쓴 강상구씨는 정의당 교육연수원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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