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의 아방궁'으로 불리던 집의 최후
친일파 윤덕영의 호화 별장 '벽수산장'과 박노수 가옥
국립중앙박물관 최초의 사진기사 이건중
일제강점 36년을 보내고 해방이 되자 한국 문화의 모든 분야가 혼란에 빠져 들었다. 그동안 일본의 지배 하에서 한국인 전문가를 양성할 수 없어 각 분야를 이어받을 전문가가 매우 부족하였다. 미술 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물관 분야도 일본에게서 인수받아 운영하여야 했는데, 이를 맡을 인물이 마땅치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일제강점기에 구축된 조선총독부박물관과 이왕가박물관을 이어받았다. 마침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공부한 여당(黎堂) 김재원(金載元,1909-1990)이 있어 박물관을 별 탈 없이 인수받아 운영할 수 있었다. 그 후 김재원은 1970년까지 25년간 박물관장을 맡아 현재 박물관의 초석을 닦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된 김재원은 박물관의 기록을 남길 사진을 담당할 사진가를 물색하는데 마땅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마침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정관(正觀) 이건중(李健中, 1916-1979)을 초빙하여 유물 담당 사진기사로 채용한다.
이건중은 일본에게서 인계받은 많은 유물을 찍어 자료로 남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유적 발굴 사진도 담당하였는데, 1946년에 있었던 '호우총(壺杅塚)' 발굴 사진이 대표적이다. 호우총의 발굴은 광복 직후 한국인에 의해 주도된 최초의 유적 발굴조사였다.
또한 1947년에 이홍직(李弘稙, 1909-1970), 김원룡(金元龍, 1922-1993)이 개성에서 고려시대 고분벽화 12지신상을 발굴하였을 때에도 참가하여 사진을 찍었다. 이건중은 해방 후 국립중앙박물관이 개관하고 처음으로 채용된 유물 담당 사진기사였다.
1948년에 박물관을 그만 둔 이건중은 본격적인 사진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작품은 주로 사물이나 풍경을 대상으로 찍은 즉물적인 것들이었다. 그 중에는 풍경을 찍은 것들이 많은데, 상당수는 도시 풍경이나 역사적 유적을 찍은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담은 사진을 많이 찍은 것은 박물관에서 활동한 경험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 중에 유독 눈길을 끄는 일련의 사진 중에 서울을 찍은 것들이 있는데, 주로 1950, 1960년대 풍경을 찍은 것들이다. 특히 몇 장은 사진 작품으로서 뿐만 아니라 역사적 기록으로서도 매우 의미 있는 것들이다. 그 중에 가장 인상적인 한 장은 인왕산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며 찍은 것인데, 특히 서촌 지역을 오롯이 담고 있어 당시 서촌 모습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보인다.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리던 윤덕영의 벽수산장
인왕산 중턱에서 경복궁과 남산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다. 남산에 케이블카나 남산 타워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광화문이 폐허가 된 채로 동쪽에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보아 사진을 찍은 시기를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사진의 앞부분에 유독 큰 서양식 건축물이 눈에 두드러지게 보인다. 이 집이 바로 일제강점기에 친일파 벽수(碧樹) 윤덕영(尹德英, 1873-1940)이 호화롭게 지어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렸던 '벽수산장(碧樹山莊)'이다.
벽수산장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47번지에 있었다. 이곳은 본래 조선시대 위항 시인들의 거두였던 천수경(千壽慶, 1758-1818)이 살던 '송석원(松石園)'이 있던 곳이다.
천수경은 옥류천 근처 소나무와 바위가 있는 곳에 작은 집을 짓고 이곳을 '송석원'이라 하였다. 그리고 위항시인들을 동인으로 모아 시를 읊고, 이 모임을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또는 '옥계시사(玉溪詩社)'·'서사(西社)'·'서원시사(西園詩社)'라고도 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장혼(張混), 조수삼(趙秀三), 차좌일(車左一), 김낙서(金洛瑞), 최북(崔北), 왕태(王太), 박윤묵(朴允默) 등은 위항문학(조선 후기 서울을 중심으로 중인 이하 계층이 주도한 한문학 활동)의 대표적인 시인들이었다.
이 모임에는 간혹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도 초대를 받았는데, 이들이 지은 시에 대해 품평해달라는 뜻에서였다. 당시 김정희는 통의동 지역에 살았는데, 천수경의 집과는 가까운 곳이었다.
1817년 음력 4월 김정희는 송석원이 있던 뒤편 바위에 '송석원(松石園)'이라는 세 글자를 새기고, 그 옆에 '정축청화월 소봉래서(丁丑淸和月 小蓬萊書)'라고 관지를 단다. 김정희와 송석원시사 인물들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흔적이다. '송석원' 각 글자는 한 글자의 가로 및 세로의 폭이 4치쯤 되는 정방형이었다고 한다.
1800년대 후반에 송석원은 여흥(驪興) 민(閔)씨가 득세하자 민씨 집안 소유였다가 1904년 순명비 민씨의 사망을 계기로 다른 이에게 매각되어, 1910년까지 몇 명의 사람에게 차례로 넘어간다. 그러다가 윤덕영이 1910년 말에 송석원 일대 전부를 매입한다. 일제의 한일 합방을 도운 대가로 내린 돈으로 매입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윤덕영은 이 넓은 땅에 14~15년에 걸려 대저택을 지었다. 완공되자 처음에는 예전 이름을 이어 '송석원'이라 부르다가, 일제 강점기 중반에 이르러 '벽수산장'으로 이름을 바꾼다. 인왕산 중턱 경성 일대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우뚝 솟아 있는데다, 서양의 자재를 수입하여 지은 프랑스식 호화로운 건물이었기 때문에 '한양의 아방궁'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집이 완성되었음에도 윤덕영은 호화로운 벽수산장에 살지 못하고 뒤쪽에 지은 한옥에 거주한다. 벽수산장이 너무 넓어 관리가 어려운 데다 외부의 비판적인 시선 때문이었다. 준공된 이후 바로 청나라 종교 단체인 홍만자회 조선지부에서 임대하여 사용하게 한다.
그것도 잠시, 얼마 후 1940년에 윤덕영이 죽자 1945년 미쓰이광산주식회사에 건물과 부지 일체가 매각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방이 되자 덕수병원에 불하되었다가 한국 전쟁 중에는 미8군 장교 숙소로 사용된다. 전쟁이 끝나고 1954년 6월부터는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언커크)에서 사용하였다. 그러나 1966년 4월 5일 화재로 전소되어, 1973년 6월 도로정비 공사로 완전히 철거된다.
박길룡이 지은 박노수 가옥
벽수산장 본채 뒤쪽으로는 한옥이 있어 윤덕영의 소실이 거주하였고, 본채 앞으로는 2층으로 지어진 양옥이 있는데, 여기서 윤덕영의 딸과 사위가 살았다. 이 집은 당시 건축가로 유명하였던 박길룡(朴吉龍, 1898-1943)의 설계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박길룡은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건축가라 한 만한 인물이다.
조선총독부 건축기수로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데 참여하였다. 1932년 조선총독부 소속의 건축기사가 되었다가 그만두고 그해 7월 종로구 관철동에 박길룡건축사무소를 냈다. 간송미술관(1936)과 화신백화점(1937) 건물도 그가 설계한 건축물이다. 이 윤덕영 딸이 살던 집은 후에 한국의 대표적인 동양화가 남정(藍丁) 박노수(朴魯壽, 1927-2013)가 40여 년간 살아 지금은 '박노수 가옥(朴魯壽家屋)'이라 불린다.
박노수 가옥은 서촌 경관의 중심이라 할 만한 수성동 계곡 바로 아래 자리 잡아 근래에 서촌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랜드마크 같은 곳이 되었다. 1937년경에 지은 이 집은 2층 벽돌집으로 구성되었다. 1층은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되어 있고, 2층은 마루방 구조로 되어 있다.
한옥과 양옥의 건축기법 외에 중국식 수법이 섞여 있고, 안쪽에 벽난로를 3개나 설치하는 등 호사스럽게 꾸며 놓았다. 당시 윤덕영의 위세를 읽을 만하다. 일부 목조 양식 등은 일본 건축 형식을 담은 면도 있다.
동양적 정신세계를 지닌 박노수의 회화
세상 떠날 때까지 이 집을 지킨 박노수는 한국 현대 동양화단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는 해방 후 한국 미술계가 근대적인 교육을 시작하자 성장한 첫 번째 화가 중의 한 명이다. 박노수는 충남 연기군 출신으로 부친으로부터 천자문과 서예를 배우나 고교를 졸업할 때쯤 그림에 뜻을 두기 시작한다.
고교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1897-1972)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상범과의 내제자 관계는 얼마 가지 못한다. 마침, 바로 다음 해인 1946년에 서울대학교에 예술대학 미술학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박노수는 제1회화과의 첫 입학생이 되어 김용준(金瑢俊, 1904-1967), 이상범, 노수현(盧壽鉉, 1899-1978), 장우성(張遇聖, 1912-2005) 등에게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운다. 그는 1949년에 처음 열린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이후, 1981년 제30회 마지막 국전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한다.
특히 제4회 국전에서 <선소운(仙簫韻)>이란 작품으로 동양화부 최초로 대통령상을 받으며 화단의 화려한 주목을 받는다. <선소운>은 앉아 있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그린 것인데, 간결하고 선적(禪的)인 분위기를 잘 살린 뛰어난 화풍의 작품이었다.
1960년대 이후부터는 대담한 구도와 독특한 준법의 감각적인 추상적 회화를 시도하여 실험적이며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특히 소년, 말, 사슴, 그리고 강, 수목 등을 소재로 한 박노수 특유의 그림은 한때 시대를 대표하는 그림으로 평가 받았다.
그의 그림은 다양한 실험을 하면서도 동양적인 선묘를 잃지 않은 신선한 색채감각과 격조 높은 정신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어떤 화가보다 구성력이나 필력, 색채 감각과 작품 속에 내재된 정신세계 등에서 특출한 성과를 보인 뛰어난 화가였다.
박노수 선생과 필자와의 작은 인연
필자는 30여 년 전 박노수 선생과 몇 번의 인연이 있었다. 선생과 필자는 서화골동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어 곳곳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특히 보문동 지역에 있는 서화가게에서 자주 뵐 기회가 있었다.
단정한 외모의 선생은 한국 미술뿐만 아니라 중국 미술에 관해서도 해박하였다. 좋은 미술품이 나오면 구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소장품 중에 좋은 조선시대 미술품과 다양한 중국 미술품이 많은 것은 그때 구한 것들이다.
한 번은 필자가 조선시대 전래품 <동기창(董基昌) 서첩>을 구한 후 의견을 묻느라 서로 몇 번의 연락을 한 적이 있다. 당시 필자는 어린 데다 중국 미술에 대한 지식이 일천할 때였는데, 선생은 성의 있게 자신의 의견을 나누어 주었다. 필자는 혹시 친필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선생은 넌지시 '좋은 것이니 잘 간직하라'고 말씀해 주었다.
이제와 그 작품을 보니 '임모본'인 것이 분명한데, 당시 선생은 임모본인지 알면서도 애써 좋게 말해 주었던 것 같다.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살짝 얼굴이 화끈 거린다. 서촌에 들렀다 간혹 박노수 가옥에 가면 그때 생각이 나곤 한다.
일제강점 36년을 보내고 해방이 되자 한국 문화의 모든 분야가 혼란에 빠져 들었다. 그동안 일본의 지배 하에서 한국인 전문가를 양성할 수 없어 각 분야를 이어받을 전문가가 매우 부족하였다. 미술 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물관 분야도 일본에게서 인수받아 운영하여야 했는데, 이를 맡을 인물이 마땅치 않았다.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된 김재원은 박물관의 기록을 남길 사진을 담당할 사진가를 물색하는데 마땅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마침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정관(正觀) 이건중(李健中, 1916-1979)을 초빙하여 유물 담당 사진기사로 채용한다.
이건중은 일본에게서 인계받은 많은 유물을 찍어 자료로 남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유적 발굴 사진도 담당하였는데, 1946년에 있었던 '호우총(壺杅塚)' 발굴 사진이 대표적이다. 호우총의 발굴은 광복 직후 한국인에 의해 주도된 최초의 유적 발굴조사였다.
또한 1947년에 이홍직(李弘稙, 1909-1970), 김원룡(金元龍, 1922-1993)이 개성에서 고려시대 고분벽화 12지신상을 발굴하였을 때에도 참가하여 사진을 찍었다. 이건중은 해방 후 국립중앙박물관이 개관하고 처음으로 채용된 유물 담당 사진기사였다.
1948년에 박물관을 그만 둔 이건중은 본격적인 사진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작품은 주로 사물이나 풍경을 대상으로 찍은 즉물적인 것들이었다. 그 중에는 풍경을 찍은 것들이 많은데, 상당수는 도시 풍경이나 역사적 유적을 찍은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담은 사진을 많이 찍은 것은 박물관에서 활동한 경험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 중에 유독 눈길을 끄는 일련의 사진 중에 서울을 찍은 것들이 있는데, 주로 1950, 1960년대 풍경을 찍은 것들이다. 특히 몇 장은 사진 작품으로서 뿐만 아니라 역사적 기록으로서도 매우 의미 있는 것들이다. 그 중에 가장 인상적인 한 장은 인왕산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며 찍은 것인데, 특히 서촌 지역을 오롯이 담고 있어 당시 서촌 모습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보인다.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리던 윤덕영의 벽수산장
▲ <인왕산에서 본 서울> 1950년대 후반 ⓒ 이건중
인왕산 중턱에서 경복궁과 남산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다. 남산에 케이블카나 남산 타워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광화문이 폐허가 된 채로 동쪽에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보아 사진을 찍은 시기를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사진의 앞부분에 유독 큰 서양식 건축물이 눈에 두드러지게 보인다. 이 집이 바로 일제강점기에 친일파 벽수(碧樹) 윤덕영(尹德英, 1873-1940)이 호화롭게 지어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렸던 '벽수산장(碧樹山莊)'이다.
▲ <인왕산에서 본 서울>에서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렸던 '벽수산장(碧樹山莊)' 확대본 ⓒ 이건중
벽수산장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47번지에 있었다. 이곳은 본래 조선시대 위항 시인들의 거두였던 천수경(千壽慶, 1758-1818)이 살던 '송석원(松石園)'이 있던 곳이다.
천수경은 옥류천 근처 소나무와 바위가 있는 곳에 작은 집을 짓고 이곳을 '송석원'이라 하였다. 그리고 위항시인들을 동인으로 모아 시를 읊고, 이 모임을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또는 '옥계시사(玉溪詩社)'·'서사(西社)'·'서원시사(西園詩社)'라고도 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장혼(張混), 조수삼(趙秀三), 차좌일(車左一), 김낙서(金洛瑞), 최북(崔北), 왕태(王太), 박윤묵(朴允默) 등은 위항문학(조선 후기 서울을 중심으로 중인 이하 계층이 주도한 한문학 활동)의 대표적인 시인들이었다.
이 모임에는 간혹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도 초대를 받았는데, 이들이 지은 시에 대해 품평해달라는 뜻에서였다. 당시 김정희는 통의동 지역에 살았는데, 천수경의 집과는 가까운 곳이었다.
1817년 음력 4월 김정희는 송석원이 있던 뒤편 바위에 '송석원(松石園)'이라는 세 글자를 새기고, 그 옆에 '정축청화월 소봉래서(丁丑淸和月 小蓬萊書)'라고 관지를 단다. 김정희와 송석원시사 인물들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흔적이다. '송석원' 각 글자는 한 글자의 가로 및 세로의 폭이 4치쯤 되는 정방형이었다고 한다.
▲ 송석원(희미하게 보이는 왼쪽 위 검은색 가로글씨), 벽수산장(세로글씨) 아래 앉아 있는 윤덕영. ⓒ 김상엽
1800년대 후반에 송석원은 여흥(驪興) 민(閔)씨가 득세하자 민씨 집안 소유였다가 1904년 순명비 민씨의 사망을 계기로 다른 이에게 매각되어, 1910년까지 몇 명의 사람에게 차례로 넘어간다. 그러다가 윤덕영이 1910년 말에 송석원 일대 전부를 매입한다. 일제의 한일 합방을 도운 대가로 내린 돈으로 매입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윤덕영은 이 넓은 땅에 14~15년에 걸려 대저택을 지었다. 완공되자 처음에는 예전 이름을 이어 '송석원'이라 부르다가, 일제 강점기 중반에 이르러 '벽수산장'으로 이름을 바꾼다. 인왕산 중턱 경성 일대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우뚝 솟아 있는데다, 서양의 자재를 수입하여 지은 프랑스식 호화로운 건물이었기 때문에 '한양의 아방궁'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 일제강점기 벽수산장과 박노수 가옥 ⓒ 김상엽
집이 완성되었음에도 윤덕영은 호화로운 벽수산장에 살지 못하고 뒤쪽에 지은 한옥에 거주한다. 벽수산장이 너무 넓어 관리가 어려운 데다 외부의 비판적인 시선 때문이었다. 준공된 이후 바로 청나라 종교 단체인 홍만자회 조선지부에서 임대하여 사용하게 한다.
그것도 잠시, 얼마 후 1940년에 윤덕영이 죽자 1945년 미쓰이광산주식회사에 건물과 부지 일체가 매각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방이 되자 덕수병원에 불하되었다가 한국 전쟁 중에는 미8군 장교 숙소로 사용된다. 전쟁이 끝나고 1954년 6월부터는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언커크)에서 사용하였다. 그러나 1966년 4월 5일 화재로 전소되어, 1973년 6월 도로정비 공사로 완전히 철거된다.
박길룡이 지은 박노수 가옥
▲ 현재의 박노수 가옥 ⓒ 왕규태
벽수산장 본채 뒤쪽으로는 한옥이 있어 윤덕영의 소실이 거주하였고, 본채 앞으로는 2층으로 지어진 양옥이 있는데, 여기서 윤덕영의 딸과 사위가 살았다. 이 집은 당시 건축가로 유명하였던 박길룡(朴吉龍, 1898-1943)의 설계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박길룡은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건축가라 한 만한 인물이다.
조선총독부 건축기수로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데 참여하였다. 1932년 조선총독부 소속의 건축기사가 되었다가 그만두고 그해 7월 종로구 관철동에 박길룡건축사무소를 냈다. 간송미술관(1936)과 화신백화점(1937) 건물도 그가 설계한 건축물이다. 이 윤덕영 딸이 살던 집은 후에 한국의 대표적인 동양화가 남정(藍丁) 박노수(朴魯壽, 1927-2013)가 40여 년간 살아 지금은 '박노수 가옥(朴魯壽家屋)'이라 불린다.
박노수 가옥은 서촌 경관의 중심이라 할 만한 수성동 계곡 바로 아래 자리 잡아 근래에 서촌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랜드마크 같은 곳이 되었다. 1937년경에 지은 이 집은 2층 벽돌집으로 구성되었다. 1층은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되어 있고, 2층은 마루방 구조로 되어 있다.
한옥과 양옥의 건축기법 외에 중국식 수법이 섞여 있고, 안쪽에 벽난로를 3개나 설치하는 등 호사스럽게 꾸며 놓았다. 당시 윤덕영의 위세를 읽을 만하다. 일부 목조 양식 등은 일본 건축 형식을 담은 면도 있다.
동양적 정신세계를 지닌 박노수의 회화
▲ 박노수 <선소운> 1955 ⓒ 국립현대미술관
세상 떠날 때까지 이 집을 지킨 박노수는 한국 현대 동양화단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는 해방 후 한국 미술계가 근대적인 교육을 시작하자 성장한 첫 번째 화가 중의 한 명이다. 박노수는 충남 연기군 출신으로 부친으로부터 천자문과 서예를 배우나 고교를 졸업할 때쯤 그림에 뜻을 두기 시작한다.
고교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1897-1972)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상범과의 내제자 관계는 얼마 가지 못한다. 마침, 바로 다음 해인 1946년에 서울대학교에 예술대학 미술학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박노수는 제1회화과의 첫 입학생이 되어 김용준(金瑢俊, 1904-1967), 이상범, 노수현(盧壽鉉, 1899-1978), 장우성(張遇聖, 1912-2005) 등에게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운다. 그는 1949년에 처음 열린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이후, 1981년 제30회 마지막 국전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한다.
특히 제4회 국전에서 <선소운(仙簫韻)>이란 작품으로 동양화부 최초로 대통령상을 받으며 화단의 화려한 주목을 받는다. <선소운>은 앉아 있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그린 것인데, 간결하고 선적(禪的)인 분위기를 잘 살린 뛰어난 화풍의 작품이었다.
▲ 박노수 <소년과 비둘기> 1983 ⓒ 국립현대미술관
1960년대 이후부터는 대담한 구도와 독특한 준법의 감각적인 추상적 회화를 시도하여 실험적이며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특히 소년, 말, 사슴, 그리고 강, 수목 등을 소재로 한 박노수 특유의 그림은 한때 시대를 대표하는 그림으로 평가 받았다.
그의 그림은 다양한 실험을 하면서도 동양적인 선묘를 잃지 않은 신선한 색채감각과 격조 높은 정신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어떤 화가보다 구성력이나 필력, 색채 감각과 작품 속에 내재된 정신세계 등에서 특출한 성과를 보인 뛰어난 화가였다.
박노수 선생과 필자와의 작은 인연
필자는 30여 년 전 박노수 선생과 몇 번의 인연이 있었다. 선생과 필자는 서화골동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어 곳곳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특히 보문동 지역에 있는 서화가게에서 자주 뵐 기회가 있었다.
단정한 외모의 선생은 한국 미술뿐만 아니라 중국 미술에 관해서도 해박하였다. 좋은 미술품이 나오면 구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소장품 중에 좋은 조선시대 미술품과 다양한 중국 미술품이 많은 것은 그때 구한 것들이다.
한 번은 필자가 조선시대 전래품 <동기창(董基昌) 서첩>을 구한 후 의견을 묻느라 서로 몇 번의 연락을 한 적이 있다. 당시 필자는 어린 데다 중국 미술에 대한 지식이 일천할 때였는데, 선생은 성의 있게 자신의 의견을 나누어 주었다. 필자는 혹시 친필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선생은 넌지시 '좋은 것이니 잘 간직하라'고 말씀해 주었다.
이제와 그 작품을 보니 '임모본'인 것이 분명한데, 당시 선생은 임모본인지 알면서도 애써 좋게 말해 주었던 것 같다.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살짝 얼굴이 화끈 거린다. 서촌에 들렀다 간혹 박노수 가옥에 가면 그때 생각이 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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