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만에 공개된 여순항쟁 "주동자를 네번이나 조작"
여순항쟁 기록전, 여수 신기동 노마드갤러리에서 27일까지 전시
▲ 여순전문가 주철희 박사는 여순을 역사로 보지 않고 계속적으로 이념적 대결이나 좌우익의 대립적 갈등으로 보는 견해들이 굉장히 많아 기록전을 통해 시민들이 여순항쟁을 바로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심명남
여순항쟁 70주년을 맞아 주철희 박사는 유족들에게 '화해와 상생'을 요구하는 여수시를 향해 이렇게 일갈했다. 그는 이제는 시장이 나서야 될 때고 대통령이 나서서 여순항쟁에 대해 사과할 것을 강하게 촉구했다.
▲ 여순항쟁 기록전이 열리고 있는 신기동 노마드갤러리 ⓒ 심명남
여순항쟁의 큰 특징 중 하나가 여순과 관련된 사진이 굉장히 많다는 점이다. 약 200여 점의 사진이 있다. 이번 기록전은 전시관이 아닌 갤러리다 보니 저작권 문제로 지역의 작가들이 일부 사진들은 그림으로 표현했다.
▲ 48년 14연대가 창설된후 6월 제1기 하사관 후보생들이 훈련을 마치고 수료식에서 찍은 기념 사진 ⓒ 심명남
이날 바람직한 특별법 제정을 묻는 청중의 질문에 주 박사는 "현재 순천을 비롯해 특별법 서명운동을 하고 있지만 특별법을 만들 때 우리 지역사회가 합의된 특별법 안이 있다"면서 "이용주 의원이 대표발의한 특별법은 정인화 의원의 특별법에 비해 100배 후퇴한 아주 악질적인 특별법이다"라고 작심 발언을 쏟아냈다.
그 이유에 대해 주 박사는 "특별법 내용을 자세히 보면 여순사건의 성격을 반란이라 써놨는데 그러면 법제처에서 절대 통과할 수 없다. 특히 정인화 의원이나 이용주 의원의 특별법에는 배보상문제가 있는데 그러면 통과하지 못한다"면서 "진실화해위원회법에는 배보상 문제가 없었지만 국가로부터 진실규명을 받으니까 소송제기해서 다 받은 전례가 있다. 배보상 문제는 굳이 포함시키지 않아도 된다"라고 지적했다. '반란'으로 규정한 이용주 의원이 발의한 특별법에 수정이 필요한 이유에 대한 전문가의 조언이다.
▲ 여순사건이 아닌 왜 여순항쟁인가를 설명중인 주철희 박사의 모습 ⓒ 심명남
▲ 여순항쟁 시대적 상황을 설명중인 주철희 박사의 모습 ⓒ 심명남
"우리 지역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연구한 것이 아닙니다. 여순항쟁의 핵심은 지금까지 반공주의, 국가주의, 군사주의가 여순으로 인해 탄생되고 권력자들이 이용해 먹었죠. 그 문화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뿌리 박혀서 군인들은 무조건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데 정당한 명령을 따라야합니다. 반공주의에 살다보니 무조건 명령에 따라야 하는 사고를 이승만과 박정희가 철저하게 악용한 겁니다. 부당하면 안병하처럼 거부해야합니다. 그래야 민주시대에서 통일시대로 접어드는 거죠."
주 박사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지 73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독일총리는 폴란드에 가면 아우슈비츠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한다"면서 "73년이 지났는데도 독일은 폴란드에 가서 73년 동안 사죄를 하고 있다. 70년 동안 반란으로 몰았던 여순항쟁에 대해 이제는 대통령이 나서 사죄하라"고 촉구했다.
부당한 탄압과 억압에 저항했던 여순항쟁
▲ 여순항쟁 전문가 주철희 박사가 여순항쟁은 왜 일어났는지를 설명중인 모습 ⓒ 심명남
그러면서 "올해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70년인 동시에 여순발발 70년의 해지만 특히 전라도라는 명칭을 갖게 된 천년이 되는 해인데 전라도 천년 역사는 저항이다"면서 "저항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여순항쟁도 군인들 얘기만 하는데 이 지역 민중들이 부당한 억압과 탄압에 저항했다"라고 정의했다.
▲ 여순토벌군의 작전 계획 지도 ⓒ 심명남
여순발발의 직접적인 계기는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면서 제주도를 토벌하겠다는 초토화 작전에서 시작된다. 당시 제주 4.3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10월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면서 여수에 주둔한 14연대 군인들이 왜 제주도 출병을 거부했는지 객관적인 자료들이 눈에 띈다. 제주도 출동거부 병사위원회가 발표한 '애국인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는 당시 14연대 군인들이 붓으로 써서 거리에 부착한 총궐기 원문에 '인민'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이에 대해 주 박사는 "현재 우리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쓰면 뭔가 거북스럽다"면서 "인민을 쓰면 북한하고 결합하려고 하는데 이승만이 발표한 포고문에도 인민이라는 단어가 나올 정도로 그 당시엔 자연스런 단어였다"라고 말했다.
9일간의 기록에는 비상회의 소집부터 미군들이 여순토벌을 주도한 여순발발 10월 19일부터 마지막 진압되었던 27일까지 기록이 상세히 나열되었다.
▲ 참석자들이 여순발발 10월 19일부터 마지막 진압되었던 27일까지 9일간의 기록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심명남
동족상잔의 살육을 거부했던 14연대는 어떤 부대였을까? 이 부대는 48년 5월 4일 창설되어 후보생을 뽑았다. 첫 번째 교육을 마치고 6월 14일에 찍은 '14연대 제1기 하사관 후보생 기념'이라고 쓰인 최초 공개된 사진에는 주동인물 김지회의 모습도 보인다. 주 박사는 이 사진을 훈련에 참가했던 하사관 후보생 가족에게 직접 받았다고 말했다.
주동자를 네번이나 조작한 14연대 봉기 왜?
▲ 동자가 네번이나 바뀐 여순항쟁 14연대 봉기의 주동인물 ⓒ 심명남
사실 14연대 봉기의 주모는 김지회 중위였다. 국군은 그를 잡으려고 현상금을 내걸었다. 그런데 또다시 여순발발 19년 만에 반란의 주모자가 김지회에서 지창수로 바뀐다. 왜였을까? 남로당의 지령을 받았다고 엮기 위한 인물이 바로 지창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주 박사는 "국가는 지금껏 여순항쟁이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반란이고 빨갱이라고 조작했는데 국가주의의 프레임 속에 우리는 이를 그대로 믿고 사실로 인식해 왔다"라고 주장했다.
여순항쟁 당시 기독교인들을 많이 죽였다는 왜곡된 자료들도 꼼꼼히 제시됐다. 손양원 목사의 사랑의 원자탄은 당시 희곡을 바탕으로 썼다고 기록됐다. 중학생이 순천역의 위치를 그린 약도도 전시했다. 1992년 여순항쟁 44년을 맞이해 영화 <성벽을 뚫고>는 칸 영화제 출품작으로 선정된 여순을 그린 영화가 꽤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여순과 관련된 형제라는 소설은 김동리가 썼는데 당시의 문화예술인들이 권력에 집착해 권력자의 입맛대로 썼다고 비판했다. 여순항쟁과 관련된 광풍 속에서 악랄하게 표현한 <절망 뒤에 오는 것>은 한국 최초의 장편소설로 1960년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일보에 게재 됐다. 주 박사는 "모든 것이 관이 개입되었는데 여수야화는 유일하게 이 지역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노래했다. 나머지는 관이 개입되다보니 여순을 빨갱이 반란으로 몰아가고 반공주의와 국가주의에 맞게끔 써줬다"라며 곡학아세한 문학인들을 비판했다.
▲ 청와대 앞 1인시위를 두달째 이어가고 있는 여순항쟁 피해자인 장경자(74세)씨가 대통령의 사과를 촉구하는 모습 ⓒ 심명남
장씨는 "제주4.3처럼 70년이 지나도록 여순사건은 대통령이 왜 사죄하지 못하나"라고 반문했다. 이어 "70주년을 맞아 19일 열리는 여수위령제는 유가족으로서 인정하지 못한다"라며 "우리가 원하는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빨갱이 딱지를 떼어 명예를 회복하는 거다"라고 눈물을 글썽였다.
행사에 참가한 여수시의회 민덕희 의원은 "여순항쟁 조례제정에 여수시의회가 6대와 다르게 7대는 모두가 다 동의해 통과되었다"면서 "시의회가 여순특위를 준비 중인데 의원들이 전문가라고 할 수 없기에 주철희 박사님처럼 이 분야 전문가 의견을 반영해서 제대로 된 특위를 구성해서 활동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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