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까칠한 배우와 감독도 천사가 된다" GV의 '마력'

[기획] 국내 GV의 원조 부산국제영화제... 올해도 열흘간 280회 진행

등록|2018.10.02 12:00 수정|2018.10.04 11:12

▲ 부산국제영화제 GV 모습 ⓒ 부산국제영화제


"전날까지 뭔가 못마땅하고 잔뜩 짜증만 내던 외국 감독이 다음날 분위기가 확 바뀌는 경우가 있다. GV를 하고 나온 경우다. 관객들의 수준 높은 질문에 (만족하고) 끝나고 와서는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GV의 마력이다."

최근까지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지낸 영화인이 전하는 GV 관련 에피소드다. 외국 게스트들을 담당했던 한 스태프도 "까칠한 감독이나 배우들도 GV 한 번 하고나면 잠시나마 천사가 된다"며 GV의 마력을 인정했다.

GV(Guest visit). 영화제를 찾는 관객들에게는 익숙한 단어다. 일반적으로 감독이나 배우가 나와 영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관객과 하는 대화를 말한다. 지금은 일반영화 상영에서도 보편화됐고 독립예술영화 개봉에는 더 자주 볼 수 있는데, 그 시작은 부산영화제였다. 1995년 일본 야마카타영화제에서 GV을 경험해본 한 프로그래머 덕분에 도입된 것이다.

초기 GV가 있는 영화표들은 순식간에 매진

1회 때 GV담당 자원봉사자로 활약했고, 지금은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 영화 관계자는 "GV라는 말 자체는 로테르담 영화제에서 온 걸로 알고 있다"면서 "처음에는 감독과의 대화로도 썼다가 배우나 프로듀서도 있다보니 관객과의 대화로 불리는데, 해외 영화제들은 'Guest Attendance'나 'Q&A'라고 섞어 쓰기도 한다"고 말했다.

국내서도 부산영화제 출범 이후 생겨난 영화제들이 질의응답을 뜻하는 'Q&A'나 게스트가 출연한다는 뜻의 'GA'(Guest appearance) 등으로 부르기도 했으나, 지금은 거의 'GV'로 통일된 상태다.

제1회 부산영화제가 열린 1996년, GV는 영화제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영화를 본 후 감독과 배우가 나와서 관객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전무했던 시절, 부산영화제를 통해 처음 GV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초창기 부산영화제에 관객들을 유인한 것도 GV에 대한 기대감과 매력이었다. 쉽사리 보기 힘든 감독과 배우를 만날 수 있다는 매력에 GV가 있는 영화표들은 순식간에 매진됐다.

초창기 GV는 영화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극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제작 관계자들이 간단하게 무대인사를 하는가 하면, 영화가 끝난 후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경우도 있었다. 감독과 깊은 이야기는 주로 한국영화들에서 많이 오고 갔다.

극장 밖에서 GV 이어가던 이용관
 

▲ 1997년 2회 부산영화제 회고전의 주인공인 김기영 감독 GV 모습. 가운데가 김기영 감독,오른쪽이 이용관 한국영화프로그래머(현 이사장) ⓒ 부산국제영화제


'모더레이터'라고 불리는 GV 진행자의 시초는 부산영화제 이용관 이사장이다. 부산영화제를 시작할 때 한국영화프로그래머를 맡았던 그는 한국영화 상영 후 거의 빠짐없이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했다. 지난 2년간 정치적 탄압을 받아 쫓겨났다가 올해 다시 복귀했는데, 한국영화에서 GV를 처음 시작했던 모더레이터란 점에서 영화사적인 의의가 있다.

이용관 이사장은 "부산영화제가 시작할 때는 한국영화프로그래머가 뭔지도 모르고 맡았다"면서 "당시 부집행위원장이었던 박광수 감독에게 나는 뭐 하면 되냐고 물었더니 한국영화프로그래머를 하라고 해 맡게 됐고,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라고 해서 하게 된 것"이라고 초창기 영화제를 회고했다.

술자리든 어디든 토론을 좋아하는 이용관 이사장에게 GV는 제격이었다. 관객들의 열띤 질문에 감독의 진지한 답변이 이어지면서 초기 부산영화제 극장은 학구열에 불타는 분위기였다.

1회 영화제 당시 경쟁부문에 올랐던 김응수 감독의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는 다음 작품의 상영시간이 다가오자 극장을 나와 남포동 야외무대 앞에서 GV를 이어가기도 했다. 당시 이용관 프로그래머가 할 이야기가 많은 관객들을 배려해 밖에 나가서 더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2회 영화제 때 외국에서 온 한 제작자는 주말 영화 상영 전 무대에 올라 상영관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모습에 감동하며 감독이 못 온 것에 대해 아쉬움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일요일 이른 아침부터 영화를 보러 와준 관객들의 모습을 감독에게 보여주고 싶다"면서 사진을 찍어 가기도 했다.

범상치 않은 질문에 놀란 빔 벤더스
 

▲ 2000년 5회 영화제 때 부산을 처음 독일의 거장 빔 벤더스 감독이 단상에 앉아 GV를 진행하는 모습 ⓒ 부산국제영화제


영화제가 해를 거듭하면서 GV는 확대됐고 폭도 넓어졌다. 부산영화제의 역대급 GV로 회자되고 있는 것은 2000년 5회 영화제 당시 <밀리언 달러 호텔>로 부산을 처음 찾은 '독일의 거장' 빔 벤더스 감독과의 대화 현장이다. 처음부터 범상치 않은 질문들이 이어지자 감독이 놀라며 "혹시 이 중에서 영화 전공자들은 손 들어보라"고 할 정도였다. 적지 않은 관객이 손을 들었고, 빔 벤더스 감독은 단상에 앉아 장시간 관객들의 질문에 성실히 답변했다.

이후 거장 감독들과의 깊이 있는 대화는 '마스터클래스'라는 이름으로 따로 마련됐다. 영화제 때마다 다양한 형태로 감독과 배우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 늘어나게 된 바탕이었다.

생전의 고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은 GV를 "부산영화제의 자랑"이라고 말했다. "전 세계 영화제 중 이렇게 GV가 많은 영화제는 찾기 힘들다"며 "'영화, 영화인, 관객과의 만남'은 부산영화제의 가장 중요한 지향점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해외 영화인들의 GV에 매료된 이유는 특화된 질문 덕분이다. 보통 다른 해외영화제에서는 "제작비가 얼마냐?", "배우 캐스팅은 어떻게 했나?" 등의 평범한 질문을 받는데, 부산영화제 관객들은 작품의 미장센부터 시작해 숨겨진 의미 등등 예리한 질문을 쏟아낸다. 질문의 질적 수준이 다른 것이다. 이 때문에 예정에 없던 GV를 추가로 하겠다고 자청하는 사례가 생겨나기도 한다.

2000년부터 국내 개봉작으로 확산
  

▲ 부산영화제 GV에서 감독에게 질문하기 위해 관객들이 손을 들고 있다 ⓒ 부산영화제


주로 영화제 때 가능했던 GV가 국내 개봉작으로 확대된 것은 2000년 8월 개봉한 여균동 감독의 <미인> 때부터였다. 영화가 개봉했던 서울시내의 한 극장에서 일반관객들에게 생소한 GV가 시작됐는데, 영화제를 다니며 GV를 경험한 관객들이 참여해 감독과 배우에게 다양한 질문을 쏟아냈다.

이후 GV가 하나씩 늘어났고 지금은 필수적인 요소로 정착했다. 상영관에 따라 '시네마톡'이나 '시네마구구'라는 이름으로 특화된 GV를 열기도 한다. GV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관객 수 차이가 커서 독립예술영화의 경우 장기간 GV를 이어가기도 한다.

GV가 보편화 되면서 '영화제 GV의 시간을 줄여도 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부산영화제의 한 관계자는 "관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주말의 경우 GV 시간을 조절하면 6~7회 상영도 가능한데, GV로 인해 하루 4회 상영만 가능하다"며, "칸영화제처럼 늦은 시간까지 상영을 늘릴 수 있도록 방법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올해 부산영화제에서는 4일부터 13일까지 열흘 동안 280회 정도의 GV가 진행될 예정이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