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숙 가면' 쓴 김희선인 듯... '나인룸' 김해숙 연기에 소름
[TV 리뷰] 김해숙의 열연 돋보인 tvN 새 주말드라마 <나인룸>
▲ tvN <나인룸>의 두 주인공, 김희선과 김해숙 ⓒ tvN
하반기 최고 기대작 중 하나인 tvN 주말드라마 <나인룸>이 베일을 벗었다. 전작인 <미스터 션샤인>의 기세를 이어 받아 5~6%를 넘나드는 시청률로 산뜻하게 출발한 <나인룸>은 고조되어 가는 갈등 구조와 점차 밝혀지는 사건의 전말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계획이다. 그런데 1~2부를 보고 나니 확실해 진 것이 하나 있다. 이 드라마, '김희선의 드라마'가 아니다.
당초 <나인룸>은 '김희선 드라마'로 홍보됐다. 그도 그럴 것이 당대의 톱스타인 김희선이 주연배우로 나서는데 그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컬러> <프로포즈> <미스터Q> <토마토> <안녕, 내사랑> <해바라기> <세상 끝까지> 등으로 1990년대를 '올킬'했고, 최근작 <품위 있는 그녀>로 신드롬을 일으킨 김희선이라면 이러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놀라운 김해숙의 연기... 가장 압권이었던 장면은
▲ 드라마 <나인룸>의 한 장면 ⓒ tvN
특히 순간순간 변하는 극 중 인물의 감정을 눈빛과 표정으로 나타내는 그의 모습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첫 회, 자신의 감형을 위해 처연한 모습으로 김희선에게 고개를 숙이다가 모욕적인 말을 듣자마자 무섭게 돌변하여 지팡이를 휘두르고, 그것이 곧 감형을 방해하려는 김희선의 계략임을 알아채며 희망을 '툭' 놓아버리는 허무한 표정으로 교도관들에게 끌려가는 장면은 압권 중 압권이었다.
영혼이 뒤 바뀐 뒤 "나는 장화사가 아니야!"라며 울부짖는 장면, 교도관의 다리를 붙잡고 처절한 감정을 토해내는 장면, 자신의 몸을 뺏어간 김희선을 보고 "장화사!"라고 소리치며 달려가는 장면 등 김해숙은 <나인룸>의 중요 포인트마다 폭발적인 감정 연기로 작품 전반에 서늘한 긴장감을 부여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영혼이 바뀌기 전과 후의 말투, 행동, 표정 등이 완벽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는 사실이다. 영혼이 바뀌기 전 장화사가 초라한 사형수였다면, 영혼이 바뀐 뒤의 장화사는 복수와 분노가 가득한 을지해이 그 자체였다. 김희선의 연기톤을 완벽히 분석하여 캐릭터에 투영시킨 김해숙의 세심한 노력이 빛을 발한 셈이다.
이처럼 <나인룸>은 1~2회를 통해 이 작품이 '김희선만의 드라마'가 아니라는 것을 완벽히 설명했다. 또 한편으로는 중견배우 김해숙을 '왜 이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썼는가'에 대한 물음 역시 완벽히 설명했다. <나인룸>은 사실상 김희선이 앞에서 끌고, 김해숙이 뒤에서 힘 있게 미는 두 여배우의 합작품인 것이다.
'엄마'로 머물지 않아서 좋은 배우, 김해숙
▲ 드라마 <나인룸>의 한 장면 ⓒ tvN
<나인룸>이 증명했듯 배우 김해숙은 '엄마로 머물지 않아' 좋은 배우다. 비슷한 나이대의 배우들이 주말 드라마의 엄마 역할로 소비될 때, 김해숙은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스스로의 연기폭을 최대한 넓혀왔다. 한계가 없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해 내는 열정 덕분에 그는 TV 브라운관 뿐 아니라 충무로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여배우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김해숙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멋진 배우로 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30~40대에 어정쩡한 역할을 맡는 그저 그런 배우가 될 뻔 했던 그는 2000년 KBS 2TV <가을동화>에서 명연기를 보여주며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바야흐로 김해숙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 후로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 여자네 집> <부모님 전상서> <인생은 아름다워> <무자식 상팔자> 등에서 현명한 맏며느리이자 전통적인 엄마 역할에 충실했던 동시에 <낭랑 18세> <소문난 칠공주> <조강지처 클럽> 등에서는 현실적이면서도 귀여운 어머니상을 함께 구현해 내 '국민 엄마' 타이틀을 획득했다.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단 2회분의 출연만으로 전국을 울음바다로 빠뜨린 <장밋빛 인생>에서의 열연은 다시 한 번 배우 김해숙의 진가를 확인하기에 모자람이 없었고, 시청률 30%를 넘나들며 인기를 끌었던 <진주목걸이>에서의 섬뜩한 악역 연기는 시청자들을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단순히 '엄마'에 머무르지 않는 끝없는 변신이었다.
▲ 매번 새로운 연기로 감동을 주는 배우, 김해숙 ⓒ KBS
영화에서는 더욱 진가를 발휘했다. <우리형> <해바라기> 등에서 국민 엄마의 이미지를 십분 활용한 그는 2008년 <무방비도시>의 강만옥 역할을 통해 범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여인의 비극과 모성을 세밀하게 묘사해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 후 그는 <박쥐>의 라여사, <도둑들>의 씹던껌, <암살>의 아네모네, <사도>의 인원왕후, <아가씨>의 사사키 부인, <신과 함께-죄와 벌>의 초강대왕, <허스토리>의 배정길 역에 이르기까지 코믹과 호러, 희극과 비극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유려함을 자랑하며 충무로가 가장 선호하는 여배우로 굳건히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렇듯 나이가 들어가며 더욱 완숙한 배우로 성장하는 김해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배우들의 귀감이 될 만하다. 그는 여느 배우들처럼 좋고 예쁜 역할만 골라하지 않았고, 이름값을 쉽게 팔지도 않았다. 김해숙이 있는 곳은 언제나 카메라가 쉼 없이 돌고, 감독과 스태프들의 땀방울이 마르지 않는 촬영현장이었다. 뜨거운 '삶의 현장'에서 그 역시 뜨겁게 연기한 것이다.
엄마로 머물기를 단호히 거부하는, 늙어가는 배우의 내공이 얼마큼 넓고 깊은지를 매번 증명하는, 도전과 변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배우 김해숙이 <나인룸>을 통해서 또 어떤 가능성을 보여줄 것인지 그를 사랑하는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무척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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