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런닝맨 안 찍으려면, 이건 무조건 숨겨라
[그 엄마 육아 그 아빠 일기 110] 수학여행은 역시 경주 ①
가자 경주로!
10월 3, 4, 5일. 아이들의 개교기념일과 재량 방학을 맞아 휴가를 내고 여행을 가기로 했다. 아주 잠깐 해외도 생각했지만 막내가 아직 6살인 터라 너무 이르다는 생각에 다시금 국내로 눈을 돌렸고 금세 목적지를 결정했다. 바로 경상북도 경주였다.
사실 경주는 아내가 언제부터인가 늘 여행 가자고 노래 부르던 곳이었다. 경주라 하면 보문호에 벚꽃이 피는 봄도 좋고, 대왕암의 시원한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여름도 좋고, 남산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도 좋고, 한옥의 우아함을 느낄 수 있는 겨울도 좋다는 아내. 그녀는 중학교 수학여행 때 갔던 경주에 대해 아련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내가 선뜻 경주를 선택한 것은 아이들에게 경주를 꼭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창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아이들에게 경주만큼 좋은 공간은 없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직접 눈으로 보고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경주.
근대 교육이 시작된 이후 많은 학생들이 수학여행지로 경주를 간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근대 국가의 국민은 역사를 공유하면서 만들어지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경주는 그곳을 경험한 많은 세대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장소다. 당장 44년생인 아버지도, 78년생인 나도 불국사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지 않았던가.
그런데 요즘은 경주 대신 해외로 수학여행을 간다고 하니 이렇게라도 아이들에게 경주를 보여주고 싶었다. 더욱이 세월호 참사 이후 수학여행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도 많아졌고, 지진 이후 경주여행에 대한 부담감도 커졌다고 하니 이제는 경주 여행을 개인이나 가족 단위로 떠날 수밖에.
그뿐만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1990년대 중반 고등학생 당시 수학여행으로 갔었던 경주가 항상 그리웠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나왔던 것처럼 옆에 수학여행 온 여학교와 소위 '반팅'을 하고, 대왕암에서 선생님 한 명을 붙들어 바다로 던져버렸던 기억들. 불혹이 넘은 나이에 20년도 넘은 기억을 소환할 정도로 경주는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새벽부터 열심히 향하게 된 경주.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스탬프 투어였다.
스탬프 도장 찍기
서울에서 출발한 지 4시간쯤 지나 경주 톨게이트를 통과한 뒤 휴게소에 들렀다. 관광 도시인 만큼 휴게소에 있는 관광정보안내소도 규모가 꽤 큰 편이었는데, 아이들은 그곳에서 사진도 찍고 지도 등을 얻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1박2일>에 나왔다는 스탬프 투어 안내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스탬프 투어 안내서를 손에 쥔 아이들은 눈빛이 달라졌다. 일주일 전만 해도 어디를 갈 건지 한 번 의논해서 정해보라던 아빠의 말에 시큰둥하더니만, 이제는 어디를 가야 한다면서 재촉하기 시작했다. 2박 3일 동안 15곳에서 도장 16개를 찍어야 한다고 하니 결코 만만한 일정은 아니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삼 스탬프의 위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스탬프를 이용한 안내서는 경주뿐만 아니라 여타 관광지를 가더라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인데, 그때마다 아이들은 그 도장을 찍기 위해 항상 열심히 무언가를 했다. 스탬프로 인한 동기부여. 성취욕은 아이들을 움직이는 강한 동력임이 분명했다.
덕분에 이후 우리의 경주 여행은 '런닝맨'이 되었다. 경주에서 느긋하게 커피 한 잔 하면서 여유를 즐기려던 아내의 기대와 달리, 우리는 스탬프에 나와 있는 곳을 찍고 금세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에 바빴다.
애초에 아이들에게 경주의 문화재들을 보여주는 것이 목표였던 나로서는 크게 불만이 없었지만, 이렇게 해서 아이들이 과연 얼마나 많은 것들을 기억할 수 있을지는 조금 의문이었다. 나중에 아이들은 이번 경주여행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신라문화제와 지역축제
휴게소를 나와 첨성대로 가는 길. 천마총으로 유명한 대릉원 일대는 북적대는 인파로 차가 밀리고 있었다. 오늘이 개천절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3일부터 9일까지 신라문화제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올해로 46회라는 신라문화제가 이리 유명한 축제였던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1962년에 시작된 신라문화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지역의 매우 큰 행사였다고 한다. 놀 거리가 변변치 않던 시절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겼기 때문인데, 축제는 1990년대 이후 쇠락을 거듭하다가 최근에 와서 다시 살아나는 중이라고 했다. 지방자치제도가 활성화되고 지역의 축제가 다시금 조명받으면서부터인 듯했다.
그러나 이방인의 눈으로는 그 신라문화제가 얼마나 지역의 정체성을 살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첨성대 축조를 재현한다거나 신라인들이 즐겼던 주령구(신라인들이 던지며 놀던 주사위)를 체험하는 건 색달랐지지만, 축제장 한 편에 자리 잡은 먹거리 부스와 공연 등은 다른 축제에서도 항상 접하는 것들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신라의 심장 경주인데, 뭔가 다른 게 없었을까?
안타까웠다. 지자체들이 돈을 들이는 지역 축제들이 이렇게 소비된다는 것 자체가 비극이었다. 이는 참여 주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결국 축제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상호 동질감을 느끼기 위해 열어야 하는 것인데, 지금은 지자체가 타 지역의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축제를 열다보니 모든 축제가 비슷할 수밖에. 신라문화제도 그와 같은 한계에서 그다지 자유로워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많은 인파에 놀란 우리는 첨성대를 구경하는 대신 곧장 불국사와 석굴암으로 향했다. 대릉원 일대에서 도장을 못 찍느냐며 깜짝 놀라는 아이들에게는 다음날을 기약했고, 부디 내일은 사람이 없기를 기도했다.
분황사 모전석탑과 원성왕릉
다시 경주 역사지구를 나와 불국사로 가는 길. 그중 우리가 들른 곳은 분황사와 원성왕릉(괘릉)이었다. 분황사는 경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 있는 곳이다. 원성왕릉은 신라 왕릉의 기본형으로서 스탬프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했다. 두 곳 모두 우리의 여행 일정에는 없었지만 스탬프 덕분에 방문하는 곳이었다.
분황사는 경주 역사지구의 끝자락에 위치해 황룡사지와 맞닿아 있었다. 저 멀리 허허벌판 뒤로 남산이 있었는데, 하얀 화강암의 영험한 모습을 보며 왜 신라 사람들이 저 남산에다가 그토록 불상들을 새겨놓았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도 경주 사람들은 사방팔방에서 보이는 남산을 보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해 갔을 것이다. 지금의 서울 사람들이 남산 타워를 보며 스스로를 규정하듯이.
절인 듯 절 아닌 것 같은 정문을 지나자 분황사 모전석탑이 눈앞에 서 있었다. 모전석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인데, 화강암이 많은 이 땅에서 굳이 중국의 탑 원형을 따라 하기 위해 돌을 벽돌처럼 만들었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이 원조에 대한 강박관념이 얼마나 강했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결국 전탑이 석탑으로 변해간 건 그만큼 당시 사람들이 불교를 우리 것으로 소화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분황사를 나와 다음으로 간 곳은 원성왕릉이었다. 안내판에는 이 왕릉이 신라 왕릉의 기본형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는데 그것보다 눈에 띄는 것은 역시나 왕릉 앞에 서 있는 두 개의 서역인 석상이었다. 곱슬곱슬한 머리와 수염에 터번, 부리부리한 눈, 그리고 역동적인 표정까지.
그것은 당시 신라가 아랍의 상인들과 활발하게 교역했다는 확실한 증거였으며 그들의 세력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표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들의 석상이 왕릉 한 편을 차지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 일부 기독교인들은 우리 사회가 아랍과 교류하면 큰일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그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착각일 뿐이다. 이미 천 년 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이들은 낯선 모습의 석상이 신기한 듯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그것도 잠시, 왕릉의 잘 깎여진 잔디밭이 좋은지 마냥 뛰어다녔다. 다른 왕릉과는 달리 비교적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녀석들은 기꺼운 듯했다. 아마도 문화재에 대한 근대적인 개념이 서기 전 왕릉은 이렇게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였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어떤 이들은 역사를 체득했을 것이고, 내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겠지.
이제 그만.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말린 뒤 다시 불국사로 향했다. 왕릉 숲속에서 적지 않은 연인들이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있었다. 한적한 교외여서 그런지 좋은 데이트 장소인 듯했다. 한때 권력의 상징이었던 왕이 죽어서 일반 백성들에게 일상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아이러니.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아이들에게 어떤 경주를 보여줄 수 있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10월 3, 4, 5일. 아이들의 개교기념일과 재량 방학을 맞아 휴가를 내고 여행을 가기로 했다. 아주 잠깐 해외도 생각했지만 막내가 아직 6살인 터라 너무 이르다는 생각에 다시금 국내로 눈을 돌렸고 금세 목적지를 결정했다. 바로 경상북도 경주였다.
▲ 경주 보문호 풍경아내가 꿈꾸던 경주 ⓒ 경주시
반면 내가 선뜻 경주를 선택한 것은 아이들에게 경주를 꼭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창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아이들에게 경주만큼 좋은 공간은 없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직접 눈으로 보고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경주.
근대 교육이 시작된 이후 많은 학생들이 수학여행지로 경주를 간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근대 국가의 국민은 역사를 공유하면서 만들어지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경주는 그곳을 경험한 많은 세대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장소다. 당장 44년생인 아버지도, 78년생인 나도 불국사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지 않았던가.
그런데 요즘은 경주 대신 해외로 수학여행을 간다고 하니 이렇게라도 아이들에게 경주를 보여주고 싶었다. 더욱이 세월호 참사 이후 수학여행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도 많아졌고, 지진 이후 경주여행에 대한 부담감도 커졌다고 하니 이제는 경주 여행을 개인이나 가족 단위로 떠날 수밖에.
▲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내가 생각하는 경주 ⓒ 이희동
그뿐만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1990년대 중반 고등학생 당시 수학여행으로 갔었던 경주가 항상 그리웠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나왔던 것처럼 옆에 수학여행 온 여학교와 소위 '반팅'을 하고, 대왕암에서 선생님 한 명을 붙들어 바다로 던져버렸던 기억들. 불혹이 넘은 나이에 20년도 넘은 기억을 소환할 정도로 경주는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새벽부터 열심히 향하게 된 경주.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스탬프 투어였다.
스탬프 도장 찍기
▲ 경주 스탬프 투어덕분에 런닝맨을 찍고 말았다는 ⓒ 경주시
서울에서 출발한 지 4시간쯤 지나 경주 톨게이트를 통과한 뒤 휴게소에 들렀다. 관광 도시인 만큼 휴게소에 있는 관광정보안내소도 규모가 꽤 큰 편이었는데, 아이들은 그곳에서 사진도 찍고 지도 등을 얻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1박2일>에 나왔다는 스탬프 투어 안내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스탬프 투어 안내서를 손에 쥔 아이들은 눈빛이 달라졌다. 일주일 전만 해도 어디를 갈 건지 한 번 의논해서 정해보라던 아빠의 말에 시큰둥하더니만, 이제는 어디를 가야 한다면서 재촉하기 시작했다. 2박 3일 동안 15곳에서 도장 16개를 찍어야 한다고 하니 결코 만만한 일정은 아니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삼 스탬프의 위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스탬프를 이용한 안내서는 경주뿐만 아니라 여타 관광지를 가더라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인데, 그때마다 아이들은 그 도장을 찍기 위해 항상 열심히 무언가를 했다. 스탬프로 인한 동기부여. 성취욕은 아이들을 움직이는 강한 동력임이 분명했다.
덕분에 이후 우리의 경주 여행은 '런닝맨'이 되었다. 경주에서 느긋하게 커피 한 잔 하면서 여유를 즐기려던 아내의 기대와 달리, 우리는 스탬프에 나와 있는 곳을 찍고 금세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에 바빴다.
애초에 아이들에게 경주의 문화재들을 보여주는 것이 목표였던 나로서는 크게 불만이 없었지만, 이렇게 해서 아이들이 과연 얼마나 많은 것들을 기억할 수 있을지는 조금 의문이었다. 나중에 아이들은 이번 경주여행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신라문화제와 지역축제
▲ 제46회 신라문화제 ⓒ 경주시
휴게소를 나와 첨성대로 가는 길. 천마총으로 유명한 대릉원 일대는 북적대는 인파로 차가 밀리고 있었다. 오늘이 개천절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3일부터 9일까지 신라문화제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올해로 46회라는 신라문화제가 이리 유명한 축제였던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1962년에 시작된 신라문화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지역의 매우 큰 행사였다고 한다. 놀 거리가 변변치 않던 시절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겼기 때문인데, 축제는 1990년대 이후 쇠락을 거듭하다가 최근에 와서 다시 살아나는 중이라고 했다. 지방자치제도가 활성화되고 지역의 축제가 다시금 조명받으면서부터인 듯했다.
그러나 이방인의 눈으로는 그 신라문화제가 얼마나 지역의 정체성을 살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첨성대 축조를 재현한다거나 신라인들이 즐겼던 주령구(신라인들이 던지며 놀던 주사위)를 체험하는 건 색달랐지지만, 축제장 한 편에 자리 잡은 먹거리 부스와 공연 등은 다른 축제에서도 항상 접하는 것들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신라의 심장 경주인데, 뭔가 다른 게 없었을까?
▲ 첨성대의 재현신라문화제의 모습 ⓒ 이희동
안타까웠다. 지자체들이 돈을 들이는 지역 축제들이 이렇게 소비된다는 것 자체가 비극이었다. 이는 참여 주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결국 축제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상호 동질감을 느끼기 위해 열어야 하는 것인데, 지금은 지자체가 타 지역의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축제를 열다보니 모든 축제가 비슷할 수밖에. 신라문화제도 그와 같은 한계에서 그다지 자유로워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많은 인파에 놀란 우리는 첨성대를 구경하는 대신 곧장 불국사와 석굴암으로 향했다. 대릉원 일대에서 도장을 못 찍느냐며 깜짝 놀라는 아이들에게는 다음날을 기약했고, 부디 내일은 사람이 없기를 기도했다.
분황사 모전석탑과 원성왕릉
▲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경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 ⓒ 이희동
다시 경주 역사지구를 나와 불국사로 가는 길. 그중 우리가 들른 곳은 분황사와 원성왕릉(괘릉)이었다. 분황사는 경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 있는 곳이다. 원성왕릉은 신라 왕릉의 기본형으로서 스탬프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했다. 두 곳 모두 우리의 여행 일정에는 없었지만 스탬프 덕분에 방문하는 곳이었다.
분황사는 경주 역사지구의 끝자락에 위치해 황룡사지와 맞닿아 있었다. 저 멀리 허허벌판 뒤로 남산이 있었는데, 하얀 화강암의 영험한 모습을 보며 왜 신라 사람들이 저 남산에다가 그토록 불상들을 새겨놓았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도 경주 사람들은 사방팔방에서 보이는 남산을 보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해 갔을 것이다. 지금의 서울 사람들이 남산 타워를 보며 스스로를 규정하듯이.
절인 듯 절 아닌 것 같은 정문을 지나자 분황사 모전석탑이 눈앞에 서 있었다. 모전석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인데, 화강암이 많은 이 땅에서 굳이 중국의 탑 원형을 따라 하기 위해 돌을 벽돌처럼 만들었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이 원조에 대한 강박관념이 얼마나 강했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결국 전탑이 석탑으로 변해간 건 그만큼 당시 사람들이 불교를 우리 것으로 소화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분황사를 나와 다음으로 간 곳은 원성왕릉이었다. 안내판에는 이 왕릉이 신라 왕릉의 기본형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는데 그것보다 눈에 띄는 것은 역시나 왕릉 앞에 서 있는 두 개의 서역인 석상이었다. 곱슬곱슬한 머리와 수염에 터번, 부리부리한 눈, 그리고 역동적인 표정까지.
▲ 괘릉의 서역인 석상경주가 국제도시라는 증거 ⓒ 이희동
그것은 당시 신라가 아랍의 상인들과 활발하게 교역했다는 확실한 증거였으며 그들의 세력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표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들의 석상이 왕릉 한 편을 차지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 일부 기독교인들은 우리 사회가 아랍과 교류하면 큰일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그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착각일 뿐이다. 이미 천 년 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이들은 낯선 모습의 석상이 신기한 듯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그것도 잠시, 왕릉의 잘 깎여진 잔디밭이 좋은지 마냥 뛰어다녔다. 다른 왕릉과는 달리 비교적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녀석들은 기꺼운 듯했다. 아마도 문화재에 대한 근대적인 개념이 서기 전 왕릉은 이렇게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였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어떤 이들은 역사를 체득했을 것이고, 내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겠지.
▲ 경주 괘릉에서잔디밭에서의 달리기 ⓒ 이희동
이제 그만.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말린 뒤 다시 불국사로 향했다. 왕릉 숲속에서 적지 않은 연인들이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있었다. 한적한 교외여서 그런지 좋은 데이트 장소인 듯했다. 한때 권력의 상징이었던 왕이 죽어서 일반 백성들에게 일상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아이러니.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아이들에게 어떤 경주를 보여줄 수 있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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