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다면 피라도 기부하라" 그는 늘 당당했다
수많은 캄보디아 어린이 생명 구한 비트 리쉬너 박사를 추모하며
▲ 캄보디아 수백만 어린이들의 생명을 구한 스위스출신 의사비트 리쉬너 박사는 그의 위대한 업적과 별개로 괴팍하고 자기중심적인 병원장으로도 유명했다. 바르만7세 어린이병원 내 빈소의 모습 (씨엠립 소재) ⓒ 박정연
한 달 여 전인 지난달 9월 9일(스위스 현지시각) 캄보디아에서 어린이무료진료병원을 수 십 년간 운영해온 스위스 출신 의사 비트 리쉬너(Dr. Beat Richner) 박사가 향년 71세 나이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소식을 접한 캄보디아 국민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사실을 놀라워하며 슬퍼했다. 페이스북 등 SNS는 그를 추모하거나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댓글로 한동안 넘쳐났다.
정부는 추도기간을 당초 7일에서 100일로 늘려 전 국민이 그를 추모하도록 했다. 그가 원장으로 재직했던 프놈펜 소재 칸타 보파 어린이병원과 씨엠립 자야 바르만7세 어린이병원에 그의 빈소가 마련된 가운데, 지금까지도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소아과 의사이자 첼리스트였던 그는 비토첼로라는 예명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 박정연
그는 이 나라 수백만 어린이 환자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푸른 눈의 스위스 출신 의사다. '캄보디아의 슈바이처'로 칭송받을 만큼, 그는 가난하고 아픈 이 나라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소아과 전문의로서의 능력은 물론이고 병원운영에도 뛰어난 능력과 수완을 발휘했다.
그뿐 아니다. 그는 독지가들로부터 자선후원금을 받아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했던 인물로도 유명했다. 수 십년 간 유럽 전역을 돌며 수많은 후원단체와 개인 독지가들을 끌어들였다. 직접 발로 뛴 덕분에 매년 수백만 달러가 넘는 거액의 후원금들이 캄보디아 현지 어린이병원에 답지했다.
그러나 외부 후원금에만 의지해 해마다 늘어나는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하기엔 병원재정이 갈수록 열악해졌다. 정부 지원금란 것도 보잘것없어 병원운영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병원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지자, 리쉬너 박사는 1999년 중대결심을 내렸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씨엠립 어린이병원 강당에서 자선콘서트를 열기 시작했다.
도시 씨엠립은 앙코르와트를 보기 위해 연간 3~4백 만 명 이상이 찾는 세계적인 관광지다. 그 점에 착안해 그는 외국 관광객들을 병원 강당으로 불러놓고, 직접 첼로 연주를 선보였다. 직접 들어본 그의 연주 실력은 프로급에 가까웠다. 입소문을 타고 주말에는 거의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관광객들로 가득 찼다.
그는 의사로서 뿐만 아니라 음악인으로서의 재능과 자부심도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적어도 공연무대에 설 때만큼은 소아과 전문의가 아닌 전문음악인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심지어 그는 '비트 리쉬너'라는 본명 대신 자신의 앞 이름 '비트'와 첼로를 합쳐 비토첼로(Beatoceollo)라는 예명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는 늘 첼로 공연에 앞서 자신을 소개한 다큐멘터리 영상물 10여 편 중 하나를 골라 보여주고, 관람객들에게 공연 입장료 대신 기부금을 요구했다. 그는 후원금을 받는데 아무런 주저함이나 망설임 없이 늘 당당했다. 돈이 없는 가난한 젊은이들에게는 헌혈을 당당히 요구했고, 돈이 있는 자들에게는 기부금을 요구했다. 젊으면서도 돈이 있는 경우는 둘 다 요구했다. "돈이 없다면 피라도 기부하라"고 강당 입구에 쓰인 글이 지금도 기자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 수도 프놈펜 칸타보파 어린이병원 전경캄보디아 어린이 중 무려 85%가 비트 리쉬너 박사가 운영하는 어린이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 박정연
이런 그의 노력과 열정 덕분에 어린이병원은 지난 1992년 문을 연 이래 재정난 속에서도 그럭저럭 현상 유지를 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늘어나는 환자 수를 감당하기 위해 병원 수와 규모도 늘렸다. 지난해 문을 연 병원을 합쳐 수도 프놈펜에 3곳, 씨엠립에 2곳 등 모두 5곳의 병원을 세웠다.
정부 조사에 따르면 캄보디아 전국의 어린이 환자 중 85%가 이 병원에서 무료 진료를 받았다. 현재 이 병원에선 2,345명의 의료 인력이 일하고 있으며 병원 운영비만 연간 4천3백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450억 원이 소요된다. 매일 평균 치료를 받거나 건강 진단을 받는 어린이 수만도 2500~3000명에 이른다.
빈소가 마련된 이 지역 병원의 입구는 오늘도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부모들이 아픈 자식들을 품에 안고 줄을 선 채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빈소 옆에 설치된 대형 영정사진 속의 리쉬너 박사는 세상에서 가장 인자한 표정으로 이들을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후에 엇갈린 평가
▲ 스위스 유명 주간지 표지모델로 실린 비트 리쉬너 박사의 모습. ⓒ 박정연
대부분의 캄보디아 국민들은 그를 존경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한다. 평생 가난한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한 서양인 의사로 그를 기억한다. 하지만 이런 일반 국민의 정서나 느낌과는 달리 그의 성품과 업무스타일에 대해 그를 잘 알던 주변 인물들과 언론의 평판은 사뭇 다르다.
일부 현지 언론은 그가 일군 평생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가 저지른 잘못에 대체로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대부분 탁월한 능력과 별개로 세련되지 못한 거친 언행과 독선적인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고 평했다. 그와 잘 알고 지냈다는 현지 언론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가 위대한 업적을 이룬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관계에서 끊임없이 많은 적을 만들어낸 것 역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와 만난 적이 있다는 현지 교민들의 평가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 그를 매우 신경질적인데다 권위의식으로 가득 찬 인물로만 기억했다. 심지어 그는 현지 정부 관료들은 물론이고 세계보건기구와 유니세프 등 국제기구와도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고 한다.
응급환자를 문밖으로 내쫓은 이유
▲ 비트 리쉬너 박사의 빈소가 마련된 자야 바르만7세 어린이병원(씨엠립 소재) ⓒ 박정연
그는 과거 이 나라 국민과 언론의 원성을 산 적도 있다. 지난 1997년 3월 왕궁 옆 인근 공원에서 열린 야당 집회에서 괴한이 수류탄을 던진 사건이 발생했다. 집회에 참석한 15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수 십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중상자들이 리쉬너 박사가 운영하는 어린이병원으로 들것에 실려왔다. 환자들 중에는 어린이들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문전박대를 당하고 말았다. 병원총괄책임자였던 그가 이 환자들의 치료를 전면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 결정은 이후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진보 성향의 영자신문 현지 언론들은 일제히 그에게 집중 화살을 날렸다. 그러자 그는 직접 국왕에게 편지를 써 자신이 이 같은 결정을 한 이유를 해명했다.
"저희 칸타 보타 어린이병원은 부상당한 어른은 물론 어린이들을 치료할 아무런 수단이나 설비를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덧붙여 자신을 비난한 현지 외국계 언론을 거꾸로 싸잡아 비난하기도 했다.
"불행하게도 일부 사람들, 심지어 캄보디아인들이 아닌 외국인 언론인들은 이 병원을 비난한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고 감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효율성은 본 적도 없고, 부패만 가득한 캄보디아에서 건강 분야에서 만큼은 오직 하나뿐인 외국인 NGO 의료기관을 말이죠."
같은 내용의 편지는 총리실로도 2통이나 보내졌다고 현지 언론 〈크메르타임즈〉는 전했다.
당시만 해도 국왕의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하던 때다. 국왕이 그의 편지를 읽고 설득을 당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후로 현지 언론들은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 수도 프놈펜 칸타보타 병원 내 비트 리쉬너 박사 기념 사진전시실. 비트 리쉬너 박사가 어린이 환자를 수술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보인다. ⓒ 박정연
1999년 12월 세계보건기구(WHO)와 유네스코가 CT촬영기 등 값비싼 의료장비를 병원에 들여왔다며 효율성 문제를 거론하자 리쉬너가 발끈해 WHO와 유네스코가 세계아동보호헌장을 위반하고 반인륜 범죄를 저질렀다며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런 일들은 그의 독선적이면서도 돈키호테 같은 일면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일부 사람들 사이에 기억된다.
고지식하면서도 타협을 모르는 일방적인 업무 스타일 때문에 그는 병원 운영 관리를 감독하는 정부기관 고위 관료들과도 끊임없이 마찰과 갈등을 빚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시아누크 국왕에게 도움을 요청해 지지를 이끌어냈다.
외부의 공격을 받아 난처한 위기에 빠지거나 어려움에 처할 때도 국왕은 늘 그를 보호해주고 감쌌다. 국왕이 왜 그리도 그를 편애했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친분만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그가 단 한 푼도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캄보디아의 온갖 부정부패 권력과 싸우며, 오로지 가난하고 불쌍한 환자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평생 헌신했다는 사실 만큼은 국왕이 높이 샀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여하튼 국왕의 적극적 비호 덕분에 아무도 국왕 생전에는 그를 노골적으로 공격하지 못했다. 전폭적인 후원자를 자임하던 시아누크 국왕이 지난 2012년 서거한 후에도 리쉬너 박사의 입지나 영향력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선왕의 대를 이은 시하모니 국왕과 모친인 모니니엇 대왕비가 그를 지지해준 덕분이다.
왕실의 전폭적인 지지와 더불어 수 십 년간 인연을 쌓아온 유럽 후원단체들의 지속적인 자금 지원 속에 병원 운영에 있어서만큼은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병원을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국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25년 만에 다시 돌아온 푸른 눈의 의사
▲ 노로돔 시하모니 현 캄보디아국왕(왼쪽)과 함께 차에 타 인사하는 리쉬너 박사. 그는 고인이 된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을 비롯해 평생 캄보디아왕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 박정연
비트 리쉬너 박사는 1947년 3월 스위스에서 태어났다. 취리히 어린이병원의 젊은 소아과 의사로 일을 시작해 1973년 스위스 적십자사 파견으로 캄보디아와 첫 인연을 맺었다.
더벅머리에 당시에도 뿔테 안경을 썼던 그가 첫 근무지로 결정돼 간 곳은 수도 프놈펜에 있는 칸타 보파 어린이병원이었다. 병원 이름은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 가장 사랑했지만 5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공주의 이름을 땄다. 국왕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병원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그는 국왕과는 아무런 인연을 갖고 있지 못했다. 국왕과 단 한번도 대면한 적이 없었다. 당시는 론놀 장군이 이끄는 친미정권에 의해 국왕이 해외로 쫓겨나 중국과 북한을 떠돌며 망명생활을 하던 시절이었다.
근무한 지 2년 쯤 지난 1975년 4월 17일 폴 포트가 이끄는 공산 크메르루즈군들의 손에 수도 프놈펜이 함락되자 결국 그도 어쩔 수 없이 짐을 싸 이 나라를 떠나야만 했다. 병원도 곧바로 문을 닫았다. 그가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온 건 1991년이다. 무려 25년 만의 귀환이었다. 그는 시아누크 국왕의 특별한 요청에 따라 이듬해 1992년 11월 마침내 병원 문을 다시 열 수 있었다.
그의 첼로 연주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 고인이 된 비트 리쉬너 박사를 추모하기 위해 매주 목요일 저녁 그의 일대기를 담은 다큐멘터리가 상영되고 있다. ⓒ 박정연
지난 4일 그의 빈소가 마련된 씨엠립 소재 어린이병원을 찾았다. 대형 흑백사진 속 리쉬너 박사가 특유의 환한 미소로 현지인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세상을 이미 떠났건만, 사진 속 검정 뿔테안경을 쓴 고집 센 노인네다운 모습은 여전했다.
하지만 아집과 독선, 세상과 타협할 줄 모르는, 괴팍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소소한 개인사적 평가는 아마도 시간이 조금 흘러가다 보면 사람들의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대신, 그가 캄보디아의 수많은 생명을 살린 평생의 헌신과 희생 정신만큼은 캄보디아 국민들의 가슴속에 영원토록 전설처럼 살아남게 될 것이다. 마치 우리가 아는 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우리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길 바라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기대와 달리 그들의 가려진 개인적 심성이나 실제 삶은 우리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할 것까지는 없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부정부패로 얼룩진 이 나라에서 내부의 온갖 적들과 싸우며, 병원을 끝까지 지켜내고, 수백만 어린 생명을 구해낼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평생 세상과 타협할 줄 몰랐던 그만의 독선과 아집, 그리고 괴팍하면서도 자기중심적이었던 그의 유별난 성격 때문일지도 모른다.
국화꽃 향기 가득한 그의 빈소에서 발길을 돌리려니 문득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한번이라도 더 그의 첼로 연주를 들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진한 아쉬움이 순간 묻어난다.
위대한 의사이자 첼리스트였던 비트 리쉬너 박사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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