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태료 내고 그 여자 죽이겠다" 법은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했다
25년간의 지독한 가정폭력, 그리고 죽음... 국가가 제대로 나섰더라면
▲ 여성들의 호소 "내가 죽어야 가정폭력 인가요"지난 10월 22일 서울 강서구 등촌동 아파트 주차장에서 이혼한 전 남편이 휘두른 흉기에 여성이 사망하는 등 가정폭력 참사가 연이어 발생하는 가운데, 29일 오전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앞에서 한국여성의전화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했다. ⓒ 권우성
근세에 이르러서 법이 발달하긴 했지만, 이 법들은 남편의 아내 폭력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제한'을 하는 데 그쳤다. 매의 굵기가 남편의 엄지보다 굵지 않거나 위협적인 도구를 사용하지 않으면 괜찮다는 식이다. 아내에 대한 폭력이 본격적으로 범죄 행위나 사회적 문제로 다루어진 것은 서구 여성운동의 두 번째 물결이 일었던 1960년대부터였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폭력이 심지어 제도에 의해 노골적으로 승인되어 온 것은 이 세계가 여성을 어떤 존재로 치부했는지 낱낱이 드러낸다. 한 인간을 '소유물' 혹은 '열등한 존재'로 보지 않는 이상 이 같은 대규모의 폭력 행위가 오랜 시간 당연한 듯 이어지기는 어렵다. 즉 가정폭력의 밑바닥에는 역사의 태동과 함께 형성, 유지되어온 '불평등한 성별 체계'와 이에 기반해 탄생한 '가부장적 가족제도'가 깔려 있다.
▲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뼈아픈 진실>. 가정폭력·살인사건의 피해자가 국가에 책임을 묻는 과정을 담은 다큐다. 1999년 미국 콜로라도에서 가정폭력 혐의로 접근금지 명령을 받았던 한 남성이 세 딸을 살해한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 ⓒ 여성인권영화제
이 같은 사실은 가정폭력이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님을 보여준다. 앞서 짚은 것처럼 가정폭력은 무엇보다 사회가, 그리고 더 넓게는 이 세상이 바뀌어야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한 문제다(그리고 이는 가정폭력에 반대하는 실천이 무엇보다 정치적인 운동인 이유이기도 하다). 결코 단시간에 달성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다. 가정폭력 사건이 오랜 시간 누적되어 왔다는 것은 이 폭력에서 반복되는 양상을 파악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도 가정폭력 사건에서 피해자 그리고 특히 가해자의 행동 패턴을 분석한 연구는 매우 많다. 그렇다면 가해자의 행동을 예측하고 공권력이 개입해 추가적인 피해를 막는 것이 불가능할 리 없다.
그리고 이는 거꾸로 충분히 예상 가능한 가정폭력 사건에 대해 책임 기관이 안일하게 대응하고, 이로 인해 누군가 고통을 겪었다면 정부가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가정폭력을 '개인의 일탈적 범죄'로 파악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주장이 낯설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만 시야를 넓혀서 본다면 사례를 찾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이미 오래전부터 유럽인권재판소에서는 '가정폭력이 여성인권의 문제이며 이를 막는 것은 국가의 의무'라는 요지의 판결이 나오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동 재판소는 2009년 지속적인 가정폭력으로 생명을 위협을 느껴왔던 여성이 결국 남편에 의해 자신의 어머니를 잃은 사건을 놓고 '국가가 생명권 보장을 위한 적극적 의무를 주의를 기울여 이행하지 않았으며 이는 유럽인권협약을 위반한 것이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가가 가정폭력과 살인을 막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이는 주어진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라는 말이다.
인권 보호를 위해 국가가 행해야 하는 의무
그렇다면 유럽인권재판소는 어떤 근거로 이러한 판결들을 내려왔을까. 재판소는 국가가 '인권 보호를 위한 적극적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이행함에 있어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가정폭력 사건이 그 의무에서 예외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먼저 '인권 보호를 위한 적극적 의무'란 국가가 단순히 침해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비(非)국가행위자, 말하자면 개인에 의한 인권 침해 행위를 방지해야 함을 뜻한다. 국가의 모든 구성원이 실질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면 국가는 단순히 국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은 물론,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것 역시도 제도적이고 정책적인 개입을 통해 막을 의무가 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인권 침해 상황을 예방하기 위해 법률과 규칙을 제정하고 시행하는 것이 이런 사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상당한 주의의무'란 말 그대로 국가가 적극적인 인권 보호 의무를 이행할 때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의미한다. 인권 침해 사건에 있어 국가가 보호와 예방, 조사 및 처벌과 보상을 제대로 해야한다는 것이 의무의 내용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은 앞서 언급한 판결을 살펴보면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누군가의 범죄 행위로 특정인의 생명에 실질적이고 급박한 위험이 존재했을 때 관계 기관이 알았거나 혹은 알았어야 했다면, 하지만 그럼에도 합리적으로 판단할 때 위험을 피할 수 있었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이는 '상당한 주의의무'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즉 해당 사건에서 피해자가 오랜 시간 가정폭력으로 위협을 받아 왔다면 추가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인데, 여기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고 결국 살인사건이 발생하게 된 데에는 국가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 강서구 등촌동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전처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김모 씨가 25일 오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받기 위해 서울남부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그렇다면 한국은 과연 가정폭력 사건에 있어 피해자의 인권을 보호할 때 '상당한 주의의무'를 제대로 이행하고 있을까. 답은 매우 회의적이다. 가령 얼마 전 '가해자인 아버지를 사형에 처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와 이슈가 된 한 '강서구 아파트 살인사건'을 살펴보자.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사건의 가해자(전 남편)는 무려 25년간 지독한 가정폭력을 저질러 왔으며 이혼 후에도 피해자를 쫓아다니며 협박과 폭력을 일삼았다. 결국 피해자는 4년간 가해자를 피해 수차례 이사를 다녀야만 했다. 하지만 결국 가해자의 살인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비통한 사건이지만, 피해자가 가정폭력을 피해 이혼하거나 주거를 옮기고 사법기관에 도움을 요청한 이후에도 협박과 폭력에 시달려온 일은 비일비재하다. 말하자면 이러한 사건은 전형적으로 반복돼 왔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의 원인에는 깊은 제도적 맹점이 있다. 올해 <경찰학연구>를 통해 발표된 '가정폭력·아동학대에 대한 경찰개입의 한계요인과 개선방안'에 따르면 가정폭력 가해자의 접근금지를 포함하는 '(긴급)임시조치'는 현장의 실무자들이 인정할 정도로 실효성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조치를 어겨도 가해자에게 내려지는 처분이 고작 과태료 정도라는 점이다.
해당 조사에 참여한 경찰들은 아무리 접근금지를 해도 '(가해자들이) 결국은 체포되지 않는 걸 알기에 겁을 먹지 않는다'거나 혹은 가해자들이 '돈 내겠다, 돈 내고 들어가서 나는 그 여자 죽여야겠다'는 식의 반응을 했던 사례를 언급했다. 심지어 (처분의 실효성이 너무 떨어져) '접근금지를 위반하면 과태료 처분을 받는다'라는 말을 가해자에게 하지 않는 편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현실은 피해자들이 가해자가 임시조치를 어겨도 신고는커녕 담당 형사에게 알리는 것조차 포기하게 만들기도 했다. 한 인터뷰 참가자는 임시조치를 어겨도 실질적인 제지가 불가능하고 이혼을 못 한 경우 부과된 과태료가 결국 피해자의 부담으로 돌아올 때가 많기에 당사자들이 제도를 신뢰하지 못한다고 전했다.
▲ '강서구 아파트 살인사건'의 유가족들이 올린 청와대 청원에 동의를 표한 사람들이 벌써 14만 7100명을 넘어섰다(29일 기준). 이 속도라면, 청원 마감일인 11월 22일까지 정부 답변 기준인 20만 건을 넘길 것으로 보인다. ⓒ 국민청원 갈무리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긴급) 임시조치 위반 시 과태료 대신 형사처벌을 신설하는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발의했다. 하지만 국회에서는 여전히 심의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이 시기에 꼭 필요한 법안이지만 현재 정쟁과 공회전을 거듭하는 국회를 떠올려보면 통과가 언제 될지 불투명하다.
하지만 정부마저 이 사안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다. 지난 25일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정부가 국회 입법만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또 '입법이 필요하지만 통과가 안 되는 경우가 있다'는 보고에는 "시행령이나 시행규칙 개정을 통한 해결 방안을 찾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물론 '청와대 측근들의 전언'을 따랐다는 기사의 내용을 생각하면 저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도 좋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이라면 나는 문 대통령의 발언을 긍정적으로 본다. 국회를 경유하지 못해 무기력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정부가 나서서 일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정부가 가정폭력에도 같은 수준의 의지를 보여주기를 원한다. '강서구 아파트 살인사건'의 유가족들이 올린 청와대 청원에 동의를 표한 사람들이 벌써 14만 7100명을 넘어섰다(29일 기준). 이 속도라면, 청원 마감일인 11월 22일까지 정부 답변 기준인 20만 건을 넘길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답변이 겉핥기 수준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대책을 담고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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