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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야스지로 감독 영화엔 왜 '전쟁'이 없을까

등록|2018.11.02 14:59 수정|2018.11.02 14:59
 

▲ 영화 <피안화>의 한 장면 ⓒ 오즈 야스지로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일본이 전쟁하던 시기와 그 후를 살았고, 그가 다루는 영화 속 이야기도 그렇다. 그런데 오즈의 영화에는 전쟁에 관련된 기억이 없다시피 하다. 물론 국가와 개인의 관계가 막연하게 동일시될 수만은 없다는 걸 안다. 오즈가 일본의 전쟁 세대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꼭 작품 속에 전쟁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 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물론 오즈가 홈드라마를 찍었다는 사실은 동시기의 시간을 필름 속에 불러들였다는 의미이기에, 그런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수도 있다. 오즈가 해체되는 가족상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그들이 사는 시간 또한 재현되어야 했을 것인데, 영화 속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전쟁에 관한 언급이 없다. 일각에선 오즈가 의도적으로 그것을 배제한 게 아니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을 재고해 보아야만 한다. 만약 오즈가 그리는 것이 동시대가 아니라면, 그러니까 영화 속의 시공간이 동시대가 아니라면 위의 의문은 해소된다. 우리는 오즈의 영화를 '당대의 가족해체'라고만 보았을 뿐, '가족해체'만을 두고 논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우리는 오즈에게서 '당대'라는 시대적인 배경을 부여했고 그에 수반한 역사적 사실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역사는 폭력과 슬픔으로 점철된 것이기에, 어쩌면 오즈가 눈을 돌려버린 게 아닌가 하고 추측해보았던 것이다.

오즈가 말하는 감정의 끈 

오즈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한결같이 해맑고, 여유롭고, 그렇게 살아간다. 인물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상적이지 않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고하야가와가의 가을>과 <동경 이야기>에서 부모가 죽었을 때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꽁치의 맛>이나 <가을햇살>에서 자식을 떠나보내는 부모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들은 누군가와 이별할 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이별이란 게 몹시 자연스럽기에 긍정이나 부정이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오즈에게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바람 속의 암탉>에서 남편에게서 내쳐지는 아내는 눈물을 흘린다. <안녕하세요>에서 티브이를 사주지 않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화를 낸다. <부초>와 <동경의 황혼>에서도 자식은 자신을 떠난 부모에게 화를 낸다. 이때 우리는 이 네 영화의 공통점을 짚어낼 수 있다.

첫째, 오즈가 영화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건 단지 초기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즈의 영화가 후기로 갈수록 점점 정적이고 서정적으로 변해가는 건 사실이나, 그럼에도 감정표현은 여전하다. 단지 절제되었을 뿐이다. 둘째, 오즈는 관계가 이어져 있을 때 감정도 이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꽁치의 맛>이나 <가을햇살>처럼 자식을 떠나보내는 것은 그들이 한가족으로서 '독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신의 울타리를 세운 그들과의 관계가 끊어진다.

부모의 죽음이야 말할 것도 없고, 반대로 <부초>와 <동경의 황혼>를 살펴보자. 아들은 자신을 찾아온 아버지를 외면하고 아버지는 다시금 떠난다. 딸은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를 외면하고 어머니는 다시금 떠난다. 두 사람은 피를 나누었지만 서로 마주하기를 원치 않는다. 고로 관계의 단절이 명백하다. 그래서 서로를 잇던 관계의 끈이 끊어지고 그것이 부가적으로 꼬여있던 감정의 끈이 잘리면서, 감정은 분출된다.

우리가 오즈에게서 무언가를 느낀다면 이러한 감정의 끈을 본 것이다. 그러나 결코 감정의 끈을 느끼지는 못한다. 오즈는 수줍은 사나이이기에 감정의 끈을 영화의 풍경을 통해 의도적으로 숨겨두었다. 오즈의 영화는 인물의 눈 마주침, 다다미 쇼트에서 시작되어 텅 빈 복도를 가로지르다가 어느 순간 대청마루를 통해 바깥으로 통한다. 또는 대청마루에서 나와 집에서 시내로 이어지는 얇은 복도를 거쳐서, 도심의 간판이나 바람에 일렁이는 풍경들을 보여준다. 나는 이때 이것이 인물의 시점 쇼트가 아니라 감정의 통로라고 가정한다. 필로우 쇼트가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말이 있어왔지만, 그에 덧붙여서 나는 필로우 쇼트야말로 이 영화가 '사람'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 영화 <피안화>의 한 장면 ⓒ 오즈 야스지로

   

▲ 영화 <피안화>의 한 장면 ⓒ 오즈 야스지로


시공간의 단절

하스미 시게히코도 그렇게 말했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오즈의 영화가 인물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물을 따라가면 안 된다. 만약 오즈의 영화를 인물을 따라서 볼 경우, 단지 홈드라마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인물을 도구로 가정하고 그들의 감정이야말로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해 볼 때, 카메라는 비로소 명료해진다. 말하자면 영화 속에 구현된 집과 인물들은 감정이 돌아다니는 세트장에 해당한다. 이때 오즈는 그것이 단지 세트장이기에, 구태여 현실에 충실하기보다는 현실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보여줄 수 있는 구도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오즈의 영화에서 가족의 해체라는 참상을 목격한다. 죽음이나 결혼이나 외면이든 간에 가족은 늘 찢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사는 공간만큼은 여전히 남는다. 그 공간을 바라보는 카메라를 통해 언급되던 감정의 통로는 가족이 해체되어도 남아있다. 이후 카메라는 자신이 비추던 공간, 같은 구도로 한 쇼트를 재현한다. 말하자면 카메라는, 영화는 그동안 자신이 걸어왔던 행적을 되짚어 본다. 이때 우리는 카메라를 통해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비슷한 쇼트의 나열, 그러나 미묘하게 변주된 차이가 이곳이 같은 시간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말하자면 오즈의 카메라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게 아니라, 이곳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떠올린다. 우리가 예전을 추억하며 시간을 거슬러 오르지만 현실은 변해 있는 것처럼, 오즈의 카메라는 공간에 잠긴 시간을 바라본다.

즉 오즈가 공간에 심은 것은 지나간 시간, 그 위에 덧붙여진 감정이다. 오즈는 이 공간을 몇 번이나 재활용함으로써 진한 자취를 남긴다. 오즈가 그리는 세계가 집을 중심으로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즈의 영화가 다루는 것은 거시적으로나 미시적으로나 '돌아온다'라는 테마이다. 오즈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도쿄'로 대변되는 일본의 '집(수도)'에 돌아온다. 또는 오즈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가족을 만나려고 '집'으로 돌아온다. 영화 내에서 인물의 동선 또한 한정되어 있다. 집과 학교를 오가는 학생이거나 혹은 집과 직장을 오가는 직장인이다. 연속된 일상을 그리니 몹시 좁은 공간이라 할 수 있고, 단조로운 일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정은 별반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들의 뒤를 쫓는 카메라가 연속된 일상을 자꾸만 기록할 수 있다는 도구적인 성격이 중요하다.
 

▲ 영화 <피안화>의 한 장면 ⓒ 오즈 야스지로

   

▲ 영화 <가을 햇살>의 한 장면 ⓒ 오즈 야스지로


영화 속에서 오즈가 그리는 시대는 불분명하다. 그곳은 분명 일본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듯하지만 영화라는 점에서 우리 현실과는 분리되어 있다. 말하자면 오즈의 영화는 우리 현실과 닮았을 뿐 현실이라고는 볼 수 없다. 역사적 담론이 빠졌다기보다는 현실을 온전히 옮겨오지 못한 불완전한 세계이다. 완벽하게 세계를 재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제한된 감정의 실험대가 더 나은 선택이다. 이때 오즈의 카메라가 인물을 정면으로 비춘다. 그들의 표정은 어색하고, 이는 이곳이 불완전한 세계임을 보여준다. 또한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인물의 표정에서, 대화하는 이에게 보내는 감정을 읽어낼 수는 있다.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장면이 범인에게 보내는 분노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처럼, 오즈의 인물도 상대방을 바라보지만 우리에게 감정을 전한다.

오즈가 공간을 따라 카메라를 진행시킬 때마다 감정이 묻어나온다면, 그 감정이 분출되는 곳은 정면을 향한 얼굴이다. 중간중간에 자주 등장하는 이 정면 쇼트는 영화 내에서 감정을 환기하는 역할을 한다. 이때 우리는 그들이 관객석을 바라보는 게 아님을 알면서도, 그 감정만큼은 온전히 전달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을 영화 속에 다시 투입할지 아닐지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다. 만약 감정을 이입하지 않은 채로 작품을 본다면, 그 감정은 영화 속에서 줄곧 맴돌다가 라스트 씬에서 인물의 시점을 통해 빠져나갈 것이다. 말하자면, 오즈의 카메라는 반복되는 풍경 속에서 감정의 통로를 찾아내어 우리에게 선택권을 준다. 이것은 감정의 대화를 할 것인지에 대한 제안이다.

<동경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보자. 물 위에 떠가는 배를 바라보던 카메라는 류 치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물 위를 떠가는 배로 이어진다. <동경이야기>에서 감정의 통로가 류 치슈를 향한 것은 그의 아내가 죽었을 때 자식들이 눈을 마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가운 시신을 둘러싼 채 각기 다른 시선을 한 자식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동상이몽이고, 그런 상황에서 집안을 맴돌던 감정은 발원지인 류 치슈로 향한다. 그러나 류 치슈는 그 슬픔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그렇게 영화 속의 감정은 창밖으로 흘러간다. 즉 우리가 감정을 외면할 시에 그것은 영화 속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다.
 

▲ 영화 <피안화>의 한 장면 ⓒ 오즈 야스지로

   

▲ 영화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의 한 장면 ⓒ 오즈 야스지로


등을 돌린 후의 공허함

오즈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등을 돌린 장면이 자주 나오는 것은 아마 그런 연계를 위해서일 것이다. 오즈는 인물들이 등을 돌린 장면 다음에는 꼭 앞쪽을 보여준다. 굳이 대화 장면을 찍을 것이라면 이런 구성은 불필요하다. 말하자면 이것은 의도되었고, 일종의 수미상관에 해당한다. 오즈는 중앙을 두고 양쪽에 인물을 배치한 후 대화하는 장면을 찍을 때, 다음 장면에서는 위아래를 바꾸어서 입장을 역전시킨다. 이때 양극단 사이에는 텅 빈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불현듯 그 텅 빈 공간에 언어가 오고 간다고 여기게 된다. 양극단에 오고 가는 대화가 있다면, 그 중심부의 공허함을 채우는 것은 다름 아닌 감정이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는 그들이 사는 집, 공간 전체에도 해당한다. 오즈의 영화 도입부에서 인물들은 작품의 주요 무대로 온다. 그리고 결말 부에서는 다시금 공간 밖으로 나간다. 대체로 기차가 그들을 운송하는 역할을 하고 <부초>와 <동경 이야기>, <동경의 황혼> 정도가 그런 구성을 취한다. <부초>는 배를 타고 들어왔던 아버지가 배를 타고 떠난다. <동경 이야기>는 도쿄로 왔던 부모가 다시금 도쿄를 떠난다. <동경의 황혼>은 어머니가 찾아왔다가 어머니가 떠난다. 말하자면 작중의 본 무대가 되는 곳은 인물로 볼 때 중심부에 해당하고, 그곳은 타인의 진입을 허가하지 않기에 공허한 곳으로 남게 된다. 그래서 오즈의 영화에는 감정이 머무르지 않는다. 그 감정은 작품의 주요 무대로 흘러들어와 다시금 떠나야만 한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바로 그렇게 시작된다. 평화롭던 일상에 외부로부터 개입하는 무언가의 존재가 그들의 감정을 흩트려놓고 나면 다시금 스크린 위를 떠나거나 혹은 관객석을 향해간다.

오즈 영화에서 유독 술집과 기차역이 자주 나오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이다. 술집은 밤에는 여러 사연을 지닌 손님들이 모이지만 낮에는 뿔뿔이 흩어진다. 짐 자무시가 <패터슨>에서 말한 것처럼 술집은 여러 감정과 언어가 한데 모였다가 금세 사라져버리는, 물과 식용유 같은 공간이다. 또한 기차역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하나의 플랫폼에 모이지만, 그들의 출발지점과 도착지점은 각기 다르기에 서로 대화를 나누는 일이 없다. 아마 오즈는 사람의 관계와 감정, 더 나아가서는 현실 세계가 바로 그러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기차역이라는 공간은 수십 년이 지나도 그대로이지만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기억은 각기 다르다. 다른 시간, 다른 추억이 기차역이라는 공간의 기단부를 이룬다. 그것이 바로 류 치슈가 <동경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창밖의 배를 바라볼 때, 그 배를 이루는 기단부가 어떤 것일지 우리는 알 수 없는 이유이다.
 

▲ 영화 <꽁치의 맛>의 한 장면 ⓒ 오즈 야스지로

   

▲ 영화 <꽁치의 맛>의 한 장면 ⓒ 오즈 야스지로


오즈가 말하는 현실

만약 우리가 영화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혹은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영화 속으로 남겨져 그곳이 현실 세계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를테면 <꽁치의 맛>에서 늙은 류 치슈와 친구들이 일본 해군의 '군함행진곡'을 열창한다고 해서 그곳이 현실 세계의 반영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물론 영화 속에서도 그들이 사실만을 인정할 뿐 추억은 하지 않을뿐더러, 1962년이라는 시대 맥락으로 보면 전쟁 당시 지겹도록 들었던 음악이 생각나지 않을 리가 없다. 말하자면 영화 속에서 군함행진곡은 시대를 특정하는 기표이지만, 오즈는 그곳에 의도적으로 감정을 흘려 넣지 않았다. 감정의 통로를 중시하는 오즈에게 이와 같은 의도적인 회피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가 전쟁에 대해 평소 품은 생각을 여실히 드러낸다.

시대의 광기가 배출되는 곳이 전쟁이라는 기표였다면, 그것이 출발하고 도착하는 곳이 중요할 뿐 거쳐 가는 역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즈가 관심을 둔 것은 전쟁의 광기가 오가는 전쟁터 한복판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향하는지의 문제였다. 전쟁터 한복판은 마치 지하철 플랫폼 혹은 속이 빈 공허한 곳이었고, 그렇다면 양측에 있는 대화의 주체를 찾아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야 한다고 오즈는 말한다. 말하자면 전쟁에 동원된 개인이나 공간은 단지 계류지에 불과할 뿐, 전쟁의 책임은 군부에 있고 피해의 자리는 신민들에게 있다. 정확하게는 그런 대화가 오가는 감정이 중요한 것으로, 오즈에게는 전쟁의 책임도 배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허탈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가 다루는 것이 시작과 끝, 대화의 주체와 객체 사이의 공허함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오즈가 말하는 당대의 현실이란 주체(가해자)도 없고 객체(피해자)도 없는, 어중간한 상태의 일본일 뿐이다.

오즈의 영화에서 각각의 쇼트는 반드시 짝패를 가진다. 인물이 공간에 진입하고 떠나는 것, 술집 골목의 밤과 낮, 혹은 유사한 필로우 쇼트의 반복. 중앙에 공간을 둔 리버스 쇼트의 사용. 이러한 쇼트의 사용은 의도되었고, 그 사이에는 언어가 오고 가는 플랫폼이 있다. 언어라는 이름의 기차를 얻어탄 것은 바로 감정, 그는 영화 내부에서 올라탔을 수도 있고 혹은 영화 외부에서 올라탔을 수도 있다. 말하자면 오즈가 축조한 감정의 통로에 올라타는 것이 내러티브인지 혹은 우리인지에 따라서 영화는 흘러간다. 그것은 가족의 해체이거나 시대의 외면이다. 그러나 시대를 외면한다는 것이 도피는 아니다. 왜냐하면, 현실 또한 시대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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