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계엄군 성폭력 밝혀졌지만 험난한 진상규명, 왜냐면
[주장] '진상조사위원 3명' 추천 안 하는 한국당, 유불리에 따라 다른 일처리
▲ 6월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5.18 계엄군 등 성폭력 공동조사단 출범 합동브리핑에서 공동단장인 이숙진 여성가족부 차관이 향후 계획을 밝히고 있다. 왼쪽은 공동단장인 조영선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 오른쪽은 노수철 국방부 법무관리관. ⓒ 연합뉴스
5.18 계엄군에 의한 잔혹한 성폭력의 진상이 마침내 밝혀졌다.
지난 10월 31일 '5.18 계엄군 등 성폭력 공동조사단'이 조사해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당시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는 17건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성폭행 피해를 입을 당시 피해자의 나이는 10대~30대였으며 직업은 학생, 주부, 생업 종사자 등 다양했다.
5.18민주화운동은 38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시민들에 대한 최초 발포와 집단 발포 책임자, 인권유린 행위 가담자, 집단 학살지와 암매장지, 유해 및 행명불명자의 규모와 소재 등이 여전히 불명확한 상태다. 부당한 국가공권력에 의해 무고한 시민이 살상되고 무자비한 폭력과 성범죄까지 서스럼없이 저질러졌지만 아직까지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난 2월 28일 국회를 통과한 '5.18 민주화 운동 진상규명 특별법'(5.18 특별법)에 의해 구성될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진상조사위)에 주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5.18 특별법에 따라 진상조사위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자행된 국가공권력의 민간인 학살과 진실 은폐 의혹 등을 면밀하게 조사할 예정이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최초·집단 발포자 색출은 물론이고 계엄군에 의한 반인륜적 범죄행위 규명 등 5.18 민주화운동의 실체적 진상 규명이 이뤄질 수 있을지에 이목이 집중된다.
시작부터 난항 겪고 있는 진상조사위
그러나 진상조사위는 시작부터 삐그덕거리고 있다. 아직까지 인적 구성도 마무리하지 못한 채 발이 묶여 있는 상태다. 지난 9월 14일 5.18 특별법이 시행됐지만 정작 진상 규명에 앞장서야 할 진상조사위는 출범조차 하지 못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진상조사위의 출범이 지연되고 있는 것은 자유한국당이 자신들 몫으로 배정된 3명의 위원을 아직까지 인선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5.18 특별법에 따라 국회의장(1명)과 더불어민주당(4명), 바른미래당(1명) 등은 이미 인선 절차를 마무리했지만 유독 한국당만 감감무소식이다.
한국당의 인선이 지연되는 가운데 한때 극우인사인 지만원씨가 조사위원으로 물망에 오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씨는 '북한 개입설'을 주장하며 5.18 민주화 운동을 왜곡·폄훼해왔던 인사다. 논란이 거세지자 한국당은 관련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그러나 한국당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세간의 시선은 싸늘하다. 지씨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데다가, 진상조사위의 출범이 늦어지고 있는 것 역시 한국당의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계엄군에 의한 성폭행 범죄 사실이 공식 확인된 10월 31일 민주당을 비롯해 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 등은 한목소리로 한국당을 비판했다. 설훈 민주당 의원은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자유한국당이 이런 국가 폭력의 슬픈 사실 앞에 부끄러움과 함께해야 하고 5.18 진상조사위의 출범을 늦추고 있는 것을 통렬히 반성해야 한다"라며 "지만원 정도의 이름밖에 추천할 수 없다면 추천권을 포기하는 것이 진상조사위를 도와주는 방법"이라고 날을 세웠다.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와 박지원·천정배·장병완·황주홍·최경환·이용주·김경진 의원, 박주선·주승용·김동철 바른미래당 의원, 송갑석 민주당 의원 등도 이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5.18 특별법 시행 한달이 훨씬 지나도록 위원 추천을 미루던 제1야당 내부에서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해온 극우 논객을 위원으로 추천하는 제안까지 나온 것으로 알려져 사실상 마지막일 진상 규명 작업이 계속 표류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비판했다.
정의당 역시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윤소하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5.18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들과 면담을 갖고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고 정확한 피해를 파악해 책임자를 처벌하는 일은 지나간 역사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길이다"라며 "그러나 한국당은 역사를 또다시 비틀려 하고 있다"라고 꼬집었다. 진상조사위 출범 지연의 책임이 전적으로 한국당에 있다는 게 여야 4당의 공통된 인식인 것이다.
반면 한국당은 인선이 미뤄지고 있는 이유가 인물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라는 입장이다. 윤재옥 한국당 원내수석부대표는 10월 30일 원내대책회의에서 "야당 추천이란 정치적 부담으로 인해 자격을 갖춘 많은 분들이 기피 내지는 회피하고 있다"라며 "가급적 빠른 시일내에 추천을 마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밝혔다.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것처럼 진상규명을 방해하기 위해 고의로 인선을 지연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사안에 따라 일처리 속도가 다른 한국당
▲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가 10월 24일 국회 원내대표실에서 곽상도, 최교일, 임이자 의원과 함께 긴급 기자회견을 하며 '국무회의에서 비준한 평양공동선언과 남북군사합의서의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서'를 들어보이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그러나 인물난을 내세우는 한국당의 해명과는 달리 여야 4당 및 범시민사회는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고 있다. 한국당의 정치적 뿌리가 전두환 신군부와 맥이 닿아있는 만큼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이 달가울 리 없다는 판단에서다. 당리당략적 유불리에 따라 전략적 대응을 해왔던 한국당의 과거 행태 또한 의구심을 증폭시키고 있는 배경 중 하나다.
실제 한국당은 국정원 사건과 세월호 참사 등 정치적으로 불리한 사안에 대해서는 진상조사를 사사건건 방해하고 지연시키며 사건의 실체적 규명을 가로막은 바 있다.
지난 10월 24일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관계 개선과 군사적 긴장완화를 위해 평양공동선언과 4.27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의 비준에 서명하자 5일 만인 10월 29일, 그에 대한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한국당이 정략적 판단에 따라 냉탕과 온탕을 오간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공수처 신설과 상가임대차보호법 등 각종 민생·개혁 법안 처리, 일자리 추경안, 개헌, 드루킹 사건, 예산안 처리, 최저임금 및 소득주도성장 논란, 국회 특수활동비 논란, 특별재판부 도입 등 사안마다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움직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당의 발목잡기 논란이 정치공방으로 이어진 경우도 부지기수다.
정부여당을 견제해야 하는 야당으로서의 책무를 아무리 감안한다 해도 한국당이 제1야당에 걸맞은 행보를 보여왔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사정이 이러하니, 마땅한 인물을 구하기 어렵다는 한국당의 해명에도 진상조사위 출범을 고의로 지연시키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는 것일 터다.
한국당의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자업자득'에 가깝다. 5.18 특별법만 해도 그렇다. 5.18 민주화운동은 국가공권력에 의해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당한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다. 아직까지 실체적 진실이 밝혀지지 않아 피해자들의 상처와 고통이 치유되지 않고 있다.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부당한 국가공권력의 개입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된 사건에 정파적 논리가 개입될 여지는 단언코 없다. 자신들을 향한 세간의 부정적 인식을 상쇄시키기 위해서라도 조사위원 인선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마땅하다. 과거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한국당은 변함이 없다. 여전히 관성대로 생각하고 그대로 움직인다.
한국당은 전후 독일이 어떻게 다시 세계사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됐는지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잘못에 대해 사죄하지 않는 정당이, 뼈를 깎는 자기 반성과 성찰이 없는 정당이, 인류 보편적 정의와 정서를 거스르는 정당이 시민의 지지를 받기는 어렵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블로그 '바람 부는 언덕에서 세상을 만나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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