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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원으로 너를 처단한다'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 52회] 하시모토 부산경찰서장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다

등록|2018.11.12 17:10 수정|2018.11.12 17:10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폭살시킨 의열단 박재혁부산시 동구 초량동 이바구길 초입(초량교회와 초량초등학교 사이)에 의열단 박재혁 열사에 대한 사진과 기록이 전시돼 있다. 일경에 체포 직후 중상을 입었음에도 일제가 주는 음식과 물을 일절 거부한 채 곡기를 끊고 순국한다. 부산상업학교(부산상고 전신) 시절부터 항일운동을 하였다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박재혁은 9월 14일 오후 2시 30분경 부산경찰서에 도착하였다. 의열단원 이종암의 동생 이종범이 쓴 <의열단 부장(副將) 이종암전>에 따르면 이종암과 최천택 등이 집에서부터 동행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오택의 유고집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폭탄을 넣은 것이 책보따리인지, 궤짝인지도 차이점이다.

그날이 9월 13일.

그날 밤 이종암 등과 만나 한잔 술을 나눈 후 자택에서 잤다. 그리고 그 이튿날(즉 9월 14일) 아침에 박재혁은 고향에 올 때와 꼭같은 중국 상인의 차림으로 책보자기를 메고 부산경찰서로 가서 서장의 면회를 청했다.

이 때에 이종암과 다른 두 동지는 먼 데서 눈인사만 하고는 그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재혁은 아주 중요한 책이니 꼭 서장에게 보이겠다고, 서장이 보면 깜짝 놀랄 정도의 서적이라면서 꼭 서장 면회를 요구했다. 그래서 무난히 서장실에 들어가 책상위에 보자기를 내려놓고 풀게 되었다. 서장 옆에는 다른 두 졸도가 서 있었다. (주석 1)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의거 기사. 제목은 "부산경찰서폭탄소동"으로 폭탄은 매우 강렬하였고 폭파현장은 처참하였음을 싣고있다. <부산일보 호외>에는 경찰서장 하시모도가 심한 증산은 아니며 곧 치료를 받고 사무실에서 지휘명령을 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던 중 숨졌는데 일제는 이를 은폐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부산일보 호외>(1920년 9월 14일))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경찰서 2층의 서장실로 안내된 박재혁은 작은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태연한 모습으로 책 보따리(궤짝)를 풀었다. 하시모토가 호기심을 갖고 지켜보고, 그의 곁에 두 명의 경찰이 부동의 자세로 서장을 호위하고 있었다. 그는 한두 권의 책을 우선 꺼내 보였다. 다음은 해방 후 환국한 김원봉이 작가 박태원에게 밝힌 의거의 '실황'이다.

이 책 저 책 꺼내 들고 보여주는 사이에 마침내 그 밑에 감추었던 폭탄과 전단이 드러났다.

그는 곧 그 전단을 집어, 왜적 앞에 던지고 유창한 일어로 꾸짖었다.

"나는 상해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를 잡아 우리 계획을 깨트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이는 것이다."

말을 마치자 그는 곧 폭탄을 들어 둘이 서로 대하고 앉았는 탁자 한가운데다 메어다 부치니, 이때 두 사람의 상거는 겨우 2척에 불과하다.

광연한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은 다 같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소스라쳐 놀라 그 방으로 달려들었을 때, 조금 전에 서장을 찾아온 중국인 서상은, 몸에 중상을 입고 마룻바닥에 쓰러져 꼼짝을 못하고, 서장은 선혈이 임리(淋漓: 쫙 깔림)한 가운데,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마지막 숨을 모으고 있었다.

달려들어 안아 일으켜 보니, 한편 다리가 폭탄으로 하여 끊어졌고, 얼굴은 이미 산 사람의 것이 아니다. 온 경찰서 안이 그대로 벌컥 뒤집혔다.

그들은 곧 수상한 중국인을 유치장으로 데려가 가두어버렸다. 그리고 송장이 된 서장을 병원으로 떠메어 갔다. (주석 2)


주석
1> 이종범, <의열단 부장 이종암전>, 94쪽, 광복회, 1970.
2>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5~4쪽, 깊은 샘, 2000.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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