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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 의사의 혈족 이손녀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 63회] 개성고, 해방후 교내에 항일운동기념관 설치해

등록|2018.11.23 16:31 수정|2019.09.06 17:00
 

부산어린이대공원 내 '박재혁 의사 동상 모습'부산어린이대공원 내 '박재혁 의사 동상 모습'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해방 후 독립운동가 유족과 후손 대부분이 그렇듯이 박재혁 의사 유족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 이치수는 아들의 순국 후 충격으로 눈도 잘 안 보이는 가운데 일제의 감시와 사회의 냉대 속에서 힘겹게 살다가 부산시 서구 서대신동2가 253번지에서 해방 후인 1949년 10월 8일에 별세하였다.

박 의사의 여동생 명진(明振)은 1909년 1월 11일 오빠와 14세 터울로 부산에서 태어났으나 그해 12월 10일 아버지의 사망으로,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두 남매를 키웠다.

여동생 박명진은 오빠의 제사라도 지내주라며 1960년 먼 집안 친척을 사후 양자로 입양시켰다.

13세 때에 오빠의 의거와 순국을 겪은 동생 명진은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어머니의 각별한 보살핌으로 동래여고를 다니고, 고등학교 재학 때 선교사가 호주로 유학을 보내려고 주선하였으나 어머니를 혼자 두고 떠날 수 없어서 무산되었다.

명진은 20세이던 1929년 경남 양산의 만석꾼이며, 한말 경남지역 의병대장 서병희를 도왔던 김병희ㆍ김교상 부자의 장손인 김정훈과 결혼하였다. 오빠의 정신을 이어 의병 관계자와 혼인을 한 것이다. 남편 김정훈은 1946년 1월 27일 사망하였다.
  

박재혁 의사 비 박의사의 모교인 부산진초등학교 내에 위치해 있다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김정훈ㆍ박명진 부부의 손녀인 김경은 씨가 현재 박 의사의 혈족으로 부산에서 박재혁 의사의 기념사업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박 의사의 순국 소식을 전한 일제시대 <부산일보> 호외도 김경은 씨가 할머니로부터 전해받은 유품 속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박 의사의 모교인 부산공립상업학교 (현 개성고등학교)는 해방 후 교내에 항일운동기념관을 설치하고, 박 의사의 의거를 알리는 자료를 전시하였고, 1998년 4월 임시정부수립 기념일을 맞아 부산진구 초읍동 어린이대공원에 박재혁 의사 동상을 건립하고 제막식을 가졌다.

박 의사 동상 시설물은 호텔롯데부산에서 3억3천9백53만원을 들여 제작한 것을 부산시에 기증한 것이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박 의사의 동상은 높이 6.5m(좌대 높이 3.4m 포함)규모로 조각가 한인성(부산대 미술학과) 교수가 제작을 맡았다.

동상의 비 비문은 다음과 같다.

 박재혁 의사 동상 비문

우리는 유서깊은 이 백양산 기슭에 박재혁 의사의 동상을 세워 그 숭고한 애국 충절을 길이 우러러 보려 한다. 박 의사는 부산 범일동에서 태어나 어릴적부터 총명과 담력이 뛰어났다. 이후 부산상업학교 재학시절부터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하다가 졸업 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 망명 중인 독립투사들을 만나 3대 독자의 몸을 항일 구국의 제단에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3ㆍ1독립운동 직후 의열단에 가입하여 단장으로부터 폭탄을 받아 환국하여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고 서장에게 중상을 입힘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현장에서 피체, 원수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왜놈의 손에 죽임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단식으로 옥중에서 순국하니 향년 27세요 때는 1921년 5월 11일이었다. 하늘이 무심치 않아 마침내 조국이 광복되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고 국립묘지로 이장되니 선열에 대한 보답이라 하겠다.

박 의사의 시종여일한 애국 충정과 백절불굴의 굳은 지조는 겨레의 역사와 더불어 영원하리라.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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