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깨어있는 시민들만이 언론의 자유 확보할 수 있어"

2018 시사IN 저널리즘 컨퍼런스: 탐사보도와 아시아 민주주의

등록|2018.12.07 13:51 수정|2018.12.07 14:19
우리나라 주변 나라들의 언론 상황은 어떨지 궁금했는데 마침 시사IN에서 지난 4일 컨퍼런스를 열었다. 우리나라 손석희, 박상규, 주진우 언론인들과 홍콩, 일본 기자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기에 예비 언론인들과 언론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종합 선물세트같은 자리였다.
 

오프닝 스피치를 했던 언론인 손석희 시간에 늦게 도착하여 연설 마무리만 들을 수 있었다 ⓒ 수피아


홍콩기자협회장이자 '시티즌뉴스' 편집장 크리스 영은 우산혁명 현장과 그 이후 변화된 중국과 홍콩 사회와 언론에 대한 연설을 했다. '우산혁명'은 2014년 9월 시위 기간 동안 홍콩 경찰의 최루탄 진압에 맞서 우산을 펼치는 것을 계기로 동맹 휴업을 한 24개 대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홍콩 중심가에서 두 달이 넘도록 이어나간 시위다. "우산혁명이 갑자기 이뤄진 것은 아니다. 이미 한해 전에 740만 명의 홍콩 인구 중 50만 명의 홍콩 주민들이 길거리에 쏟아져 나왔다"고 크리스 영은 전했다.

왜 홍콩 시민들은 길거리에 나온 것일까? 중국의 입맛대로 고를 수 있는 행정장관을 뽑는 선거 문제가 기폭제가 되었지만 그 외에도 언론과 표현의 자유 침해의 우려가 있는 법률 조항, 홍콩 고등학교 교과목에 중국 공산당에 대한 찬양 내용을 담고 있는 국민교육 과목이 채택되지 않게 시위를 주도한 당시 17세 소년 조슈아 웡 등 중국에 대해 오랫동안 쌓인 불만이 터져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위가 중국에서는 생소한 일이라 중국 정부는 놀라워했다. 우산혁명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중국인들은 소수였고, 대부분의 중국 시민들은 중립적이거나 관망하는 자세였다"며 "해외 언론들 덕분에 홍콩 시민들이 힘을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크리스 영은 "우산혁명이 선거권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으나 홍콩 시민들의 정신을 고양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전했다.

당시 주윤발·양조위·유덕화 등 많은 홍콩 스타들이 시위대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여 중국 활동 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이런 조치에 대해 주윤발은 영화 촬영장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돈을 조금만 벌면 된다"라고 웃어 넘겨 쿨가이로 회자되기도 하였다.

천안문 6.4항쟁을 지지 및 동참했던 홍콩 시민들

1989년, 베이징에서도 중국판 5.18 민주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시위, 천안문 6.4항쟁이 있었다. 당시 대학생들은 부정부패 없는 정부를 주장하며 민주주의를 외쳤다.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시민들도 결합하여 천안문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당시 홍콩은 어땠을까?

크리스 영은 "홍콩에서도 10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거리시위에 참여하며 북경대 학생들을 지지했다"고 전했다. "당시 시위는 중국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29년이 흘러 중국은 정치 경제적 힘은 커졌으나 역설적으로 지도자들의 국익에 대한 두려움이 갈수록 커져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중국 공산당 선전부장의 노골적인 요청

크리스 영은 지난달 홍콩 언론인들이 베이징 초대받았을 때 중국 공산당 선전부장으로부터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외부세력이 홍콩을 전초기지로 사용되지 않게 막아 달라. 중국 본토에 대한 긍정적인 보도를 더 많이 해서 홍콩 젊은이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전해 달라"는 노골적인 요청이었다. "시진핑 주석이 집권한 이후 감옥에 갇힌 중국 언론인들 수가 늘어나고 있다"며 홍콩에서 언론인이 감옥에 갇히는 일은 드물지만 중국의 입김이 갈수록 커지면서 자기검열이 늘어나는 등 언론에 대한 중국의 편집증적인 태도에 굉장한 우려를 표했다.
 

첨밀밀영화는 1986년부터 1995년 사이 10년간의 홍콩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홍콩은 영국으로부터 1997년 반환되었다. ⓒ 수피아


크리스 영은 "저널리즘, 갈수록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저널리스트에게 미친 사람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진실을 계속해서 추구해나가고자 한다"며 조지오웰의 소설 '1984'의 한 부분을 들려주며 연설 마무리를 하였다. "세상에는 진실과 거짓이 존재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거짓을 믿는다 해도, 나만 진실을 고수한다면 나는 미친 게 아니다"

홍콩 언론의 독립이 결국은 중국 국민들에게도 필요한 일이라고 들었는데 정확히 와닿지 않아 연설이 끝난 후 그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부탁했다. 그는 나에게 쓰촨성 지진에 대해 아는 지 물었다. 많은 건물들과 인명 피해가 많았다는 것으로 기억한다고 하자 "맞다. 쓰촨성 지진이 일어났을 때 많은 건물들이 무너지고 피해가 엄청 컸다. 그러나 중국 당국에서는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숨기려했다. 하지만 눈치를 비교적 덜 봤던 홍콩 기자들은 그 상황을 제대로 보도할 수 있었다"고 답변해주었다.
 

기무라 히데아키의 책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 폭발이 일어나자 (전)아사히신문 기자 기무라 히데아키는 가장 먼저 도쿄전력 본사에 도착해 2주간 머물렀고, 이후 후쿠시마 현장을 누비며 언론이 다루지 않았던 진실을 담아내려 노력하였다. ⓒ 후마니타스


일본의 기무라 히데야키 기자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100시간의 기록을 담은 '관저의 100시간'이라는 책의 저자이다. 기무라 히데야키는 책을 원작으로 한 연극도 진행될 예정이니 많이 봐달라며 멋쩍은 듯 웃었다. 전직 아사히 신문 기자로 다른 동료들과 회사를 나와 '와세다 크로니클'이라는 일본 최초 비영리 탐사전문 독립 언론사를 만들었다. 그는 왜 안전한 직장을 버리고 나왔을까.

"2차세계대전부터 시작하여 최근까지 일본 정부차원에서 진행한 강제불임시술이 있었다. 장애인들을 비롯해 강제로 임신할 수 없는 몸으로 만들었는데 공식적으로 집계된 수만 1만 6천 명 이상이다. 우리가 캠페인 식으로 폭로하였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에 의한 강제불임.임신중절 수술은 '우생보호법'이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당사자의 동의를 얻지 않아도 간질·혈우병 등 유전성 질환 환자, 정신질환자 등을 대상으로 시행하였다. 1996년 폐지될 때까지 48년 동안 이어져왔지만 올해 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왜 이런 이슈가 진작에 일본 사회의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던 것일까.

기무라 히데야키는 "저희 같은 팀들이 강제불임수술에 대한 보도를 할 때 파헤칠수록 그 사건과 기성 언론사들과의 관련성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기성 언론들이 사건을 알고 있음에도 보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우리는 희생자 중심의 기사. 공평하거나 중립적인 입장 취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빼앗긴다든지, 그런 입장에 서서 권력의 부정을 폭로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다"라고 전했다. 또한 기자들이 최종적으로 원고를 지면상에 올릴 때 편집국에 승인을 받는 것이 마치 권리처럼 사용되고 있지만 "당연한 것은 아니다"고 꼬집었다.

"Power is everywhere"

그는 "권력은 언제 어느 시대라도 나타나 휘두를 수 있다"며 기성 언론들이 저널리즘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부분을 탐사보도자들이 할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여 달라는 당부 섞인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의 박상규 기자는 조금 심각했던 앞의 연설들과 달리 "오마이뉴스에 사직서를 내고 한동안 악몽을 꿨다. 매달 받는 월급을 그만 받는 다는 것은 굉장히 두려운 일이다(웃음)"라며 셜록을 세우기까지 고생했던 일화들로 청중을 웃겨주었다. 그는 어떤 심정으로 과감히 사직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은 매체가 많아서 어디에든 글을 쓸 수 있다. 제가 좋은 기사를 쓰면 시민들은 나를 굶기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후 재심에 매달렸다"며 그는 사직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기사에 매진할 수 있었다.

변호사와 형사와 결합하여 재심을 이끌어 내는 동안 많은 사건을 수사하면서 느낀 점을 들려주었다. "형사는 자백을 받고 서로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을 목표로 둔다. 합의가 잘 안되면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합의는 보통 엄마가 나서야 잘된다. 영화 '마더'에서도 김혜자가 감옥에 들어간 사람에게 '너 엄마 없니?'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아마 감독의 많은 취재 끝에 나온 대사일 것이다. 많은 수감자들 대부분 엄마가 없다. 많은 법조인들도 공공연히 공감하는 얘기다"라고 전했다.
 

너무나 기막힌 사진살해를 당한 할머니의 아들, 억울하게 16년 만에 누명을 벗은 강인구, 진범 이모씨가 강인구씨의 결혼식에 나란히 참석하였다. ‘삼례 3인조 강도치사사건’은 영화 ‘재심’으로 만들어졌다. ⓒ 수피아

그는 "많은 기자들이 탐사보도를 하고 싶어 하지만 어려워한다. 제가 강인구씨를 인터뷰하기까지 9개월이 걸렸다. 그렇게 기다려주는 회사가 있을까? 그는 1999년에 살인범 누명을 쓰고 16년이 걸려 누명을 벗었다. 그 시간 동안 그의 무죄를 위해 노력한 시민단체는 거의 없었다. 우리는 그런 국가에 살고 있었던 거다. 수많은 매체가 보도했다. 하지만 이들의 인생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며 "기성 언론은 기자들에게 그런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기사는 통한다는 게 확인됐다"고 말했다. 그는 탐사보도의 역할에 대한 청중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누군가의 억울함을 풀고 자존감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다."
 

박상규, 크리스 영, 기무라 히데야키, 주진우연설이 다 끝난 후 질의응답을 받고 있다. ⓒ 수피아

시사IN의 주진우 기자는 삼성 비자금, 이명박 BBK 등 굵직한 이슈들과 팟캐스트 '나꼼수'를 통해 유명해졌다. 그는 연설 초반에 "정해진 지면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무엇을 전할 것인가. 그것이 고민점이었다. 여러 분야보다 선택과 집중을 해야 했다"며 기자로서의 신념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현재의 국내 언론에 대해 "이명박, 박근혜 그런 괴물을 만든 것은 언론이라고 생각한다. 한번이라도 만나본 언론인들은 그들이 다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명박의 비리를 파헤치기까지 책도 내고, 라디오도 진행하고, 노래까지 만들었으나 다른 기성 언론에서 보도를 해주지 않았다. 결국 그가 실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자 기사들을 내보내주기 시작했다"며 현 기성 언론에 대한 질타를 이어갔다.

신변에 위협을 느끼지 않느냐는 청중의 질문에 "중요한 취재를 갈 때는 비행기 표를 3개를 살 때도 있다. 각각 다른 나라 표를 끊어놓고 막상 가는 날에 2개는 버리는 표가 되는 것. 국정원 사람들이 따라 붙을까봐. 2011년에는 죽음에 대한 위협까지 느껴 유서까지 쓴 적은 있었다. 그러나 역사의 한 부분이었고 거기에 일조했다는데 의미가 있어서 위협에 대한 두려움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결국 언론의 독립은 그 나라의 국민들뿐만 아니라 사건.사고를 겪은 이웃나라 국민들, 그리고 그 소식을 정확히 알아야 할 다른 나라 국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일이었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진실을 찾기는 더욱 힘들다. 주진우 기자의 마지막 멘트가 의미심장하다. "깨어있는 시민들만이 언론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다. 아니면 예전으로 회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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