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도 가해자도 20대... 그들이 서로 낚이고 낚는 이유
[보이스피싱의 모든 것 ③] 피해자의 상황을 너무 잘 알고 이용하다
개그 소재로도 종종 쓰이는 보이스피싱, 하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만만치 않다. <오마이뉴스>는 총 일곱차례에 걸쳐 보이스피싱의 과거와 현재를 조망하고, 범죄조직의 실체를 분석하는 한편, 현장에서 보이스피싱과 대면하는 이들의 목소리에서 문제해결의 방법을 찾아봤다. 이 기사는 그 세번째다.[편집자말]
▲ 보이스피싱 예방 홍보영상 일부. ⓒ 금융감독원 보이스피싱 지킴이
막 취업해 직장을 다니던 김아무개(29)씨는 2년 전 보이스피싱 범죄로 3000만 원을 잃었다. 2016년 6월 검찰 수사관이라고 자신을 알려온 보이스피싱 사범 A씨는 김씨 명의 대포통장이 범죄에 사용됐다면서 "일단 금융감독원 공인 가상계좌에 돈을 보내면 수사 후 다시 돌려주겠다"고 말했다. 김씨는 A씨가 담당 검사 이름을 알려주고 문자로 공문을 보내오자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금융감독원 가상계좌, 검사 이름, 공문은 모두 가짜였다.
특히 A씨는 "회사 업무 중이니 일단 전화를 끊겠다"고 말하는 김씨를 여러 차례 회유·협박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검찰에서 회사로 공문을 보내겠다", "전화를 끊으면 공범으로 간주돼 기소될 수 있다" 등의 말로 김씨를 속였다.
김씨는 18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보이스피싱이 이슈인 건 알았지만 내게 검찰을 사칭한 전화가 올지 상상도 못했다"라며 "억울하기도 하고 외할머니께 미안하기도 해서 그땐 계속 눈물만 나왔다"라고 떠올렸다.
"검찰 수사관인데요..." 20대가 제일 많이 당해
이처럼 보이스피싱 범죄는 연령을 가리지 않고 발생한다. 흔히 휴대폰·인터넷 등 통신기술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층이 주된 범죄 대상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오히려 젊은층의 피해 비율이 높다. 김씨 사례처럼 조작된 공문을 보내는 등 범죄 수법이 날로 치밀해져 단순히 "어리숙한 사람이 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맞지 않는 통념이다.
▲ ⓒ 고정미
보이스피싱 피해 유형은 크게 기관사칭형과 대출사기형으로 나뉘는데, 특히 기관사칭형의 경우 20대 피해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김씨의 사례가 전형적인 기관사칭형 피해다. 2017년 기관사칭형 보이스피싱 피해자는 총 5685명인데 이 중 3524명(62.0%)이 20대였다. 30대 591명, 40대 261명, 50대 290명, 60대 387명, 70대 이상 321명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은 수치다.
젊은층의 피해는 보이스피싱 자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엔 채용공고 지원 후 통장 등 개인정보를 양도해 자신도 모르게 대포통장 명의인으로 등록되는 피해가 다수 발생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만들어진 대포통장 중 47.2%(1만2587건)가 20~30대 명의 통장이었다. 취업난에 놓인 젊은층의 상황을 교묘히 이용해 보이스피싱 범죄에 활용하는 것이다.
수법이 더 진화하면 자신도 모르게 범죄자가 돼 있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아래는 금융감독원에 신고된 일부 사례다.
"취업준비생 B씨는 온라인 취업카페를 통해 구직활동을 하던 중 '비트코인 거래소'로 위장한 보이스피싱 조직의 고액 알바 모직 광고를 발견했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B씨에게 "코인 거래자를 만나 서류에 서명을 받고 현금을 받아오면 된다"고 지시했고 B씨는 아무런 의심 없이 현금 전달업무를 수행했다. 알고보니 코인거래자는 보이스피싱 피해자였고 B씨는 보이스피싱 피해금을 전달한 심부름꾼으로 전락해 사기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구직자 C씨는 '중고차 구매대행업체'를 사칭한 보이스피싱 사기범으로부터 알바생을 모집한다는 문자메시지를 받고 취직했다. C씨는 본인 통장으로 입금된 중고차 구매대금을 "현금으로 인출해 회사에 전달만 하면 된다"는 설명을 듣고 시키는 대로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중고차 구매대금은 보이스피싱 피해자의 피해금이었고 C씨의 계좌는 대포통장으로 악용된 것이었다. 결국 C씨는 보이스피싱 인출·전달책 및 대포통장 사기범으로 전락했다."
보다 적극적으로 보이스피싱 조직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보이스피싱 말단 조직원(현금인출책, 콜센터 상담원)의 경우 20~30대가 상당수다. 검거되는 이들 역시 말단 조직원이 대부분이라 20~30대 보이스피싱 전과자도 갈수록 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SNS 등에서 '고수익 알바' 공고를 보고 범행에 가담한다. 처음부터 보이스피싱 범죄임을 인지한 채 범행을 저지르기도 하고, 나중에서야 범죄임을 인지하고도 고수익 등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해 범행을 이어가기도 한다.
실제로 2016년 수원지검 안산지청이 역대 최대 규모의 보이스피싱 조직을 적발했는데, 조직원 대부분이 20~30대였다. 당시 검찰은 "조직원 상당수는 20~30대 청년들로서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던 중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 보이스피싱 조직에 가담했다"라며 "월 1000만 원 안팎의 수익을 올리며 범행을 계속해온 것으로 밝혀졌다"라고 발표했다.
"전과는커녕 경찰서 가본 적도 없는 사람들 끌어들여 범죄자로 만들어"
▲ 청년 구직자를 대상으로 한 보이스피싱 범죄 연루 예방 홍보물. ⓒ 금융감독원 보이스피싱 지킴이
피해자가 됐든 가해자가 됐든, 보이스피싱 범죄가 젊은층을 겨냥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비교적 사회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기관사칭형 회유·협박에 취약하다는 점, 다른 하나는 취업난 등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어 피해·가해 가능성에 노출돼 있다는 점이다.
2016년 수원지검 안산지청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을 적발한 박경세 부산지검 강력부 검사는 <오마이뉴스>와 만나 "보이스피싱 범죄는 피해자의 상황을 너무도 잘 이용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라며 "범죄에 연루됐다며 강압적으로 겁을 주는 등 기관사칭형 보이스피싱 범죄 대부분이 20대를 상대로 벌어지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젊은층의 경우) 취업이 어렵고 안정적 소득이 없기 때문에 (구직 과정에서의 대포통장 명의 도용, 대출사기 등의) 피해에 노출돼 있으며, 나아가 직접 범죄에 가담하는 경우도 많다"라며 "피의자들을 조사해보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고민하다가 '고수익 알바' 광고를 보고 범죄를 저지르는 초범이 많다, 급전이 필요하거나 누군가를 부양해야 하는 상황이면 범행을 제안받을 확률도 높다"라고 강조했다.
박 검사는 "보이스피싱 조직은 전과는커녕 경찰서에 가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범죄자로 만들고 전 국민을 상대로 피해를 입히고 있다"라며 "중대 범죄이자 최악질 범죄"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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