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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다 병이 난 엄마... 당신의 고민은 누가 들어주나요

시어머니 모시던 엄마의 지난날, 지금이라도 공유할 수 있다면

등록|2018.12.25 11:37 수정|2018.12.25 11:37
엄마는 시어머니, 그러니까 나의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아주 어린 꼬마 시절에는 다같이 살 공간이 없어서 따로 살다가 초등학생 즈음부터인가 함께 살았는데, 어린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산다는 것' 이상의 특별한 인식이 없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성장하면서 깨닫게 됐다. 아무리 남편의 어머니지만, 그리고 당신 자식들의 할머니지만, 엄마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답답하고 힘든 일인지를. 내가 그런 고됨을 알 무렵, 엄마는 위장병을 얻었다. 위에 탈이 나서 음식을 제대로 드시지 못했고, 말캉말캉한 떡 두어 조각으로 식사를 대신 하시곤 했다.
 

▲ 거기에 시집오자마자 새벽같이 일어나 시동생들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고, 그 생활이 끝날 때쯤 되니 당신 자식들의 도시락을 새벽부터 준비해야만 했다. ⓒ wiki commons


할머니는 그다지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다. 태생이 시골 분이신지라 여간 부지런하신 게 아니었음은 물론, 항상 규칙적으로 생활하셨고, 엄마는 그런 할머니의 생활 패턴과 습관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며느리들은 다들 그랬으니까. 아니, 그래야만 했으니까.

거기에 시집오자마자 새벽같이 일어나 시동생들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고, 그 생활이 끝날 때쯤 되니 당신 자식들의 도시락을 새벽부터 준비해야만 했다.

할머니와 함께 살던 시절, 우리 집은 단독주택이었다. 할머니 방은 연탄 아궁이로 방을 데우는 방식이었던 터라, 겨울만 되면 엄마는 새벽에 일어나 연탄을 갈고 다시 주무시는 피곤함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어디 그뿐이랴. 대한민국만의 독특한 고부관계 때문에 이런저런 잔소리를 혼자 감당하시느라 결국엔 그 스트레스로 위장병까지 생긴 것이었다.

엄마의 한숨은 누가 들어줬을까

얼마 전, 전 직장 후배들과 만났다. 어딜 갈까 고민하다 생고기 무한리필 집에 갔다. 무한 리필식당은 대부분이 그렇듯 우리가 간 곳도 셀프 서비스였다. 우리는 일단 자리를 잡고 고기를 가지러 간 사람, 반찬을 가지러 간 사람, 남아서 수저를 놓는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나뉘어 분주하게 먹을 준비를 했다. 잠시 후 주문한 술과 음료와 함께 숯불이 나왔다. 우리는 고기를 올려 구우며,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시작했다.

대화의 주제는 온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몸담고 있는 회사에 대한 불만과 그 불만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어찌 보면 어느 술자리에서나 있을 법한 지극히 평범한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평범한 얘기라고 치부할 수 없는, 무겁고 진지한 얘기들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본인의 고민이, 본인이 당면한 문제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니까. 주변에서 봤을 때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혹은 하찮아 보이는 것일지라도, 당사자에게는 그런 것들이 현재 가장 큰 고민이고 풀어야 할 숙제이며 헤쳐나가야 할 큰 난관이 아닐까.
 

▲ 그 시절의 엄마는 과연 당신의 고민을 들어줄 사람이 있기는 하셨던 걸까. (사진은 tnN 드라마 <디어마이프렌즈> 스틸컷 ⓒ tvN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따로 있다. 인생의 선배이자 사회생활의 선배로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하느냐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오지랖이 될 수 있고, 또 요즘 말로는 'TMI(Too Much Information)'가 될 수도 있으니 조언을 한다는 것이 여간 조심스러울 수 없다.

그렇다고 아무 말 없이 그저 들어주기만 한다면 위로도 안 해주는 나쁜(?) 선배가 될 수 있으니 때로는 당황스럽기도 하다. 그렇게 후배들의 고민을 듣다가 '정작 나의 고민은 누구에게 얘기해야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도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내 고민이니까.

그러다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그토록 지난했던 몇십 년간의 시집 살이를 하면서, 위장병까지 생길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엄마는 누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을까.

그 당시 남자들이 대부분 그랬지만, 아버지 역시 엄마의 한숨과 한탄을 받아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만나러 외출한다고 한들 집에 시어머니가 계시니, 때가 되면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볼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의 엄마는 과연 당신의 고민을 들어줄 사람이 있기는 하셨던 걸까.

엄마의 이야기를 듣다

할머니가 돌아가신지도 꽤나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엄마는 혼자 속앓이를 해야만 했던 그때의 스트레스와 고민을 해소하긴 한 걸까.

꼭 그래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언제부턴가 이따금이라도 본가에 가면 엄마와 대화를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엄마의 고민을, 치열했던 시집살이의 고민을 다 이해하긴 어렵지만, 지금이라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엄마의 시간을 함께 공유하려고 노력한다.

엄마가 위장병을 얻을 때까지, 지난한 시집살이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와 고민이 응축돼 병으로 나타날 때까지, 철없던 내가 해드린 건 하나도 없으니까.

어찌 보면 엄마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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