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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 전쟁터'에서 은행원들이 사는 법

[보이스피싱의 모든 것 ④] 뺏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쩐의 전쟁'

등록|2018.12.29 21:26 수정|2019.01.08 10:59
개그 소재로도 종종 쓰이는 보이스피싱, 하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만만치 않다. <오마이뉴스>는 총 일곱차례에 걸쳐 보이스피싱의 과거와 현재를 조망하고, 범죄조직의 실체를 분석하는 한편, 현장에서 보이스피싱과 대면하는 이들의 목소리에서 문제해결의 방법을 찾아봤다. 이 기사는 그 네번째다.[편집자말]

▲ 지난 6월, 보이스피싱 현금인출책이 검거된 광주은행 C지점. ⓒ 소중한

 

번호표를 손에 쥔 채 의자에 앉아 있는 고객, 이들을 마주하는 친절한 미소의 은행원. 우리가 흔히 마주하는 은행의 모습이다. 이처럼 겉으로 보기엔 평화롭지만, 사실 은행은 '보이스피싱 전쟁터'이기도 하다. 돈을 빼앗으려는 자와 돈을 지키려는 자의 싸움. 그 결과 은행원들이 2018년 상반기 중 지켜낸 금액은 총 558억 원에 달했다(금융감독원 집계).

지난 6월 25일 오후 광주은행 A지점. 근처에 살며 A지점에 자주 들렀던 김아무개(46·여)씨가 B계장이 담당하는 창구에서 2000만 원 인출을 요청했다.

2시간 전 김씨가 "남편 사업의 세금 납부를 위해" 옆 창구에서 1600만 원을 인출한 것을 본 B계장은 즉각 수상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자주 보던 고객이었지만 이번엔 "친척에게 빌려줄 돈"이라며 또 고액 인출을 원하자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은행 전산 시스템에도 연속된 고액 인출 시도를 경고하는 문구가 떴다.

B계장은 김씨에게 인출 목적 등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며 시간을 끈 뒤, 본점에 연락해 보이스피싱이 의심된다고 보고했다. 본점도 곧장 광주 북부경찰서에 사건을 신고했다.

은행원은 왜 컴퓨터를 꺼버렸을까

하지만 인출이 지연되자 김씨는 A지점을 떠나버렸다. 김씨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A지점에서 약 3km 떨어진 C지점. A지점을 떠난 후 약 1시간 만에 C지점의 D대리 창구 앞에 선 김씨는 "동생이 집을 사는 데 현금이 부족해 빌려줘야 한다"며 또다시 2000만 원 인출을 요구했다.

김씨의 통장 내역을 검색해 본 D대리는 앞서 A지점에서의 이력을 보고 곧장 보이스피싱을 의심했다. 일부러 컴퓨터를 끈 D대리는 김씨에게 "전산 시스템이 다운돼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하며 시간을 끌었다. 옆자리로 간 D대리는 본점에 상황을 보고했고, 본점은 앞서 A지점에서 벌어진 일을 D대리에게 설명하며 "경찰이 출동했으니 조금만 더 시간을 끌어달라"고 지시했다

D대리는 "전산 시스템이 정상화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다", "고액을 찾으려면 몇 가지 확인이 필요하다"라고 이야기하며 김씨를 객장에 붙들었다. 잠시 후 광주 북부경찰서 지능팀이 현장에 출동해 보이스피싱 조직의 현금인출책이었던 김씨를 검거했다.

D대리는 17일 기자와 만난자리에서 "자주 (보이스피싱 관련) 교육을 받아왔지만 막상 제 앞에서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니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라며 "경찰에 끌려가면서 저를 쳐다보는 (김씨의) 눈빛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후 며칠 동안 퇴근하면서 주변을 살피게 되더라"라고 떠올렸다.

이어 "다른 직원이었어도 모두 저 같이 행동했을 것이고, 또한 은행일은 협업이 중요하기 때문에 혼자서 할 수 있었던 일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A지점 직원, 본점 직원, 옆자리 직원, 경찰 등의 상호작용으로 보이스피싱 사범을 검거할 수 있었다"라고 덧붙였다.

두 달 만에 2억 4천만원 '쓱싹'
 

▲ 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참고한 CCTV 영상 일부. ⓒ 광주 북부경찰서


한편 김씨를 검거한 경찰은 앞서 인출한 1600만 원의 행방을 추궁했고, 그 돈이 현금수거책(중간책)에게 전달된 사실을 확인했다. 김씨는 인출을 시도했던 2000만 원도 똑같이 전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김씨도 중간책의 신상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보이스피싱 조직 특성상, 검거 확률이 높은 현금인출책에게 중간책의 정보를 알려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광주 북부경찰서는 지능팀 전원을 투입해 중간책을 추적했다. 김씨와 동행해 1600만원을 전달한 곳의 주변 CCTV를 돌려봤고, 중간책이 차량으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5일 동안 점포·버스·주정차단속 CCTV와 차량 블랙박스 수십대를 확인해 차량번호를 알아냈으며, 6월 29일 오후 6시께 귀가하는 중간책 노아무개(45· 남)씨를 긴급체포했다.

대체로 은행 현장에서 벌어진 사건이 윗선 검거로까지 이어지긴 쉽지 않은데, 이 사건의 경우 경찰의 끈질긴 수사로 중간책까지 검거할 수 있었다.

노씨의 범행은 경찰이 파악한 것만 16건이었다. 피해액은 2억 4000만 원에 달했다. 노씨가 활동을 시작한 게 5월 초부터였으니 약 두 달 동안 벌인 범행만 이 정도인 것이다.

노씨는 경찰에 "일자리를 구하던 중 인터넷 사이트에서 '고액 알바'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비트코인 투자와 관련된 현금을 수거하면 된다는 권유로 일을 시작했다"고 진술했다.

이후 누군지 알 수 없는 총책으로부터 해외에 서버를 둔 모바일 메신저(텔레그램)로 지시를 받아 보이스피싱 피해 금액을 전달했다. 김씨와 같은 현금인출책에게 돈을 전달받아 총책이 알려준 계좌로 이체하는 방식이었다. 노씨는 범행 대가로 수거 금액의 1% 또는 이동 거리에 따른 수수료(장거리 38만 원, 중거리 25만 원, 근거리 20만 원)를 받았다.

백종훈 경사(광주 북부경찰서 지능팀)은 "은행의 신고로 인출책을 검거한 후 수거책까지 잡아 구속할 수 있었던 사건"이라며 "최근 보이스피싱 범죄가 조직화·지능화되는 추세이므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먼저 의심부터 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 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이 지난 6월 편취 금액을 송금한 뒤 은행을 나서고 있다. ⓒ 광주 북부경찰서


이처럼 은행은 보이스피싱 범죄를 일선 현장에서 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은행에서 현금인출책을 검거한 사례뿐만 아니라, 보이스피싱 사범에게 속아 돈을 이체·인출하려는 피해자를 막은 경우도 많다.

2017년 11월 고령의 고객이 부동산 매매자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현금 1억원 인출을 요청하자 KEB하나은행 은행원이 계좌이체 또는 수표 인출을 권유했다. 그럼에도 고객이 현금 인출을 고집하자 보이스피싱을 의심, 이를 인지하도록 고객을 설득했다. 이후 경찰에 신고해 사기범 2명을 고객의 집으로 유인한 뒤 현장에서 검거했다. - 금융감독원 접수 사례

본점 직원의 치밀한 모니터링으로 피해를 예방한 사례도 있다.

우리은행은 보이스피싱 피해 사례를 심층 분석해 의심거래 유형을 추출한 후 모니터링을 통해 의심계좌를 등록, 계좌 명의인이 영업점을 방문할 경우 검거할 수 있도록 대비했다. 2017년 12월 1일 해당 계좌 명의인이 영업점을 방문해 현금인출을 요청하자 영업점 직원이 112에 신고한 후 업무처리를 고의로 지연시켰다. 이후 경찰이 현장에 출동해 보이스피싱 사범을 검거했다. - 금융감독원 접수 사례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8년 상반기 은행의 보이스피싱 피해 예방 금액은 558억 원이고 검거 인원 또한 414명에 달했다. 2017년 하반기의 금액(242억 원), 검거 인원(289명)보다 대폭 늘어난 수치다.

금융거래 제재에 불평불만 속출하지만...
 

▲ 창구에서 500만원 이상을 인출할 경우 작성해야 하는 금융사기 예방 진단표. ⓒ 소중한


하지만 그만큼 은행 현장에서의 고충도 늘어나고 있다. 보이스피싱 때문에 생긴 여러 금융거래 제재에 고객 불만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통장 개설 요건 강화, 지연 인출 제도, 금융사기 예방 진단표 작성 등 은행의 조치에 "나는 보이스피싱에 당할 사람이 아니다", "왜 고객을 믿지 못하냐"라고 항의하는 고객이 많아졌다.

광주은행 B계장은 "예전엔 됐던 업무가 최근부터 갑자기 안 된다고 하니, 불만을 말씀하시는 고객 분들이 많다"라며 "힘든 점도 있지만 이해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D대리도 "보이스피싱이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임을 아시고 (여러 제재에) 수긍해주시는 분들도 있지만, 반면 화를 내시는 분들도 많다"라며 "은행원의 최우선 목표는 고객 보호이고, 그러한 조치도 고객 보호를 위한 것이니 많은 이해 부탁드린다"라고 말했다.

이명규 금융감독원 불법금융대응단 금융사기대응팀장은 "열의를 갖고 보이스피싱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은행원이 역으로 고객의 민원에 노출될 확률도 높다, 하지만 지금은 의무만 부여하고 보호는 못 해주는 구조다"라며 "은행 직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민원에 따른 책임을 면제하거나 감경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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