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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한 장의 틈도 없는 정교함... 어떻게 만들었을까

[남미여행기 6] 잉카의 찬란했던 문명

등록|2018.12.28 10:44 수정|2018.12.28 10:44

▲ 오얀따이땀보 뒷산에는 거대한 돌 6개를 종이 한장 들어가지 않을 만큼 정교하게 연결해놨다. 하나가 수십톤에 이를 것으로 짐작되는 바위들을 산 정상부까지 끌고와 쌓은 석축들을 보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 오문수


남미 여행 5일차는 본격적으로 잉카문명을 들여다볼 수 있는 쿠스코에서 시작됐다. 아침 일찍 리마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마치고 공항에서 간단한 조식을 마친 일행은 쿠스코행 비행기에 올랐다. 사뿐히 하늘로 날아오른 비행기가 안데스산맥 상공을 나르자 만년설이 쌓인 산들이 보였다.

저 아래 어딘가에 잉카인들의 고향 쿠스코가 있겠지 하며 상념에 잠겨있는 것도 잠시 "곧 쿠스코공항에 도착하니 안전벨트를 매라"는 멘트가 나왔다. 리마에서 쿠스코까지는 1시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다.
  

▲ 잉카제국시절 거대한 신전이 있었던 친체로에는 잉카 토속신앙과 카톨릭이 혼합되 성당이 있다 ⓒ 오문수


시차 때문에 깊은 잠을 못 자고 새벽 일찍 일어나서인지 컨디션이 좋지 않다. 공항에 도착해 터미널에 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숨까지 가팠다. 가이드가 발을 천천히 움직이란다. 해발 3395m의 고지에 자리한 쿠스코. 잉카사람들은 이곳을 우주의 중심이란 뜻의 쿠스코라 명명했다. 쿠스코는 잉카인들의 언어인 께추아어로 '배꼽'이란 뜻이다.

직원들이 공항터미널 입구에 둔 광주리에 코카 잎이 들어 있었다. 마음대로 가져가라는 뜻인 것 같아 몇 개를 가져와 원주민들이 하는 것처럼 씹었다. 조금 후 기력이 회복되는 느낌이 들었다. 코카 잎 효력을 맛 본 필자는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4000~5000미터의 고산지대를 열흘 동안 여행하면서 씹었다.

공항을 나서니 현지가이드와 관광버스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로 30분쯤 달려 도착한 곳은 친체로. 잉카제국 시절 거대한 신전이 있던 곳이었지만 잉카 토속신앙과 가톨릭이 혼합된 성당이 길가에 보였다.
     

▲ 라마털을 이용해 옷 만드는 과정과 염색 방법을 설명하는 원주민 여성들 ⓒ 오문수

   

▲ 원주민 여성이 베틀에서 옷감짜는 모습을 시연하고 있다 ⓒ 오문수

     
가이드가 원주민 옷가게로 안내한다. 라마털로 만든 모자, 장갑, 옷들이 울긋불긋한 색깔로 갈아입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값도 싸다. 영어를 잘하는 원주민 여성이 천연 염색재료를 이용해 옷감에 물들이는 시범을 보여준다. 염색재료는 대부분 식물에서 추출한 것이지만 벌레도 있었다.

잉카인들의 찬란했던 문화

우루밤바 마라스에는 잉카제국 시절의 경작지 '모라이(Moray)가 있다. 모라이는 께추아어로 '푹 파인 곳'이라는 뜻으로 잉카제국시절에 땅을 원형으로 깊숙이 파서 조성한 계단식 밭이다.
  

▲ 원형계단처럼 생긴 모라이 모습. 잉카인들이 높이에 따른 식물재배방법을 알아보기 위한 만든 농작물 재배 실험장이다 ⓒ 오문수


원형경기장처럼 생긴 모라이는 약 280m 깊이로 층층이 계단을 만든 계단식 원형경작지다.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경작지의 가장 높은 곳과 낮은 곳의 온도차는 약 5℃. 온도차에 따른 농작물재배실험을 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들어 놓은 제단이라는 설도 있지만 입구에 기록된 안내판에는 농산물의 유전형질을 보존하기 위한 실험센터라고 기록돼 있다. 만약 잉카인들이 농작물을 실험 재배하기 위해서 모라이를 건설했다면 그들의 문화수준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황금에 눈이 어두웠던 스페인 침략자들은 이들을 야만인 취급하고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강제로 개종시켰다.

마지막 격전지 오얀따이땀보

1530년 스페인 정복자들이 잉카제국에 도착했을 때는 잉카제국의 전성기였다. 잉카는 현재 콜롬비아 남부에서 칠레북부까지 4000㎞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이었다. 잉카제국은 해안과 산중에 남북로를 연결해 도로망을 구축했다. 이 길을 '잉카의 길'이라고 부른다. 이 길에는 20~30㎞마다 '땀보(tambo)'를 배치해 통치수단으로 사용했다. '땀보'는 몽골의 역참제도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 침략자 스페인군에 맞서 잉카군이 마지막 결전을 벌였던 오얀따이땀보 ⓒ 오문수


           

▲ 오얀따이땀보 높은 산위에 돌들을 정교하게 쌓아올린 모습. 눈 앞에 보이는 돌의 각도를 세어보니 10개다. 기계도 없는 그들이 이렇게 정교하게 돌을 깎아다듬은 솜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 오문수


마추픽추로 가는 길에는 잉카인들이 스페인 군대에 대항해 마지막까지 싸운 격전지 오얀따이땀보가 있다. 잉카의 파차쿠텍왕이 이 지역을 정복한 후 신전 및 제단을 만들었다고 하는 마을에는 잉카시대에 만들었던 관개수로와 하수도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안데스(Andes)라는 말은 산비탈에 만들어진 계단식 밭을 가리키는 스페인어 'andenes'에서 유래됐다는 설과 잉카제국의 4개 지역 중 동쪽지역을 가리키는 '안티수유'의 'Anti'나 께추아어에서 '산꼭대기'를 의미하는 'anti'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 오얀따이땀보의 옛 유적 모습 ⓒ 오문수

     

▲ 잉카시절 만들었던 집과 거리. 도로 중앙에 관개수로가 있다 ⓒ 오문수


오얀따이땀보 마을 뒷산에는 돌로 쌓아올린 계단식 밭이 있다. 45도 경사진 밭 두렁을 따라 산 정상에 오르면 잉카인들의 놀라운 석조건축물들을 만날 수 있다. 격전지였던 만큼 가파른 요새 형태로 만들어진 산 정상부에 수십톤에 달하는 6개의 거석을 정교하게 연결해 세웠다. 종이 한 장 들어갈 수 없을 만큼의 틈도 없이 거대한 돌을 연이어 세운 그들의 석조건축술이 놀랍다.

현재의 기술로도 쉽게 쌓아올리지 못할 것 같은 거석들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일행을 위해 현지가이드가 그림을 보여줬다. 책 속에는 수많은 잉카인들이 밧줄을 이용해 가파른 산정상으로 거석을 끌어올리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잉카인들은 가축을 이용해 물건을 실어 나른 수레가 없었기 때문에 돌을 나르는 일은 모두 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 현지가이드가 보여준 책속에는 잉카인들이 오얀따이땀보 정상에 거대한 석축물을 끌고 올라가는 그림이 있었다. ⓒ 오문수

     

▲ 현지가이드가 보여준 책속에 잉카인들의 돌 다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 오문수


다른 페이지에는 돌 가운데를 쪼개 물을 부었다가 얼음의 힘을 이용해 바위를 깨는 장면과 돌을 다듬었던 도구들인 모루, 망치, 롤러, 광택기 등의 도구들이 그려져 있었다.

마추픽추와 오얀따이땀보, 쿠스코시내의 12각 돌을 보면 잉카인들의 석조건축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잉카의 혼을 잠재우기 위해 쿠스코에 있는 꼬리칸차 신전을 허물고 그 위에 산토도밍고 성당을 세웠다. 하지만 1650년과 1960년 있었던 두 차례의 지진에 성당 대부분이 무너졌지만 잉카인들이 세웠던 석축은 견고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

로마나 유럽 조각에 사용된 대리석들은 세공하기 쉬운 재료들이지만 잉카인들이 건축에 사용한 돌들은 화강암으로 매우 단단했다. 그들의 석조건축술을 바라보다 생각에 잠겼다.

무생물인 돌을 갈고 닦아 정교하게 세공해 생명을 불어넣으면  건축이 되고 이 건축물들은 인간의 마음을 표시하는 기록이 되고 예술이 되어 문명을 이룬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여수넷통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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