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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주년 주무대, 예산산성 가치 재조명

백제 유구·유물 무더기 출토… '무한성' 이름도 찾아야

등록|2019.01.03 14:21 수정|2019.01.03 14:21
 

▲ 무한정보 ⓒ 김동근


예산지명의 시작.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이 919년(태조 2년) 오산현을 예산현으로 바꾼다. 그리고 1100주년 기념사업의 무대가 될 또 하나의 역사가 예산산성이다. 주소도 충남 예산군 예산읍 '산성리'다.

조선시대 여러 문헌은 무한성 또는 무한산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전략적 요충지였던 무한천에서 유래한 것으로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앞으로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하는 과정에서 원래 이름을 찾아야 하는 예산산성 속으로 들어가 보자.

왕건은 후삼국 통일을 1년여 앞둔 934년 5월 예산산성(예산진)에 행차해 새 시대를 맞을 백성들에게 새 희망을 전하는 대민교서를 반포한다. 대민교서를 짧게 보면 '내가 새 나라를 이룩하였으니 (중략) 죄 있는 자는 벌이 자손에게 미칠 것이며, 허물이 없으면 살아서는 영록을 누리고 (중략) 자손에 이르기까지 우대하여 상을 가할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 예산산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살펴보고 있는 주민들. ⓒ <무한정보>김동근


조선 초 태안지역에서 군사훈련을 참관한 태종이 하루를 머물기도 했다. 2명의 왕이 인연을 맺은 것이다.

예산산성은 근현대사에도 등장한다. 1894년 관군이 전투를 벌이다 동학농민군에 함락된 현장이며,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영오(90) 어르신은 "일제시대 보통학교 학생들이 운동회를 하던 장소"라고 기억했다. 해방 후에는 주민들이 배를 채우기 위해 고구마를 심어 먹던 너른 밭이었다. 충남도는 1982년 8월 3일 도지정기념물 제30호로 지정했다.

1100년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던 예산산성에선 유구한 시간을 간직한 유적과 유물이 쏟아졌다. 예산군에 따르면 지명탄생 110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지난해 3월부터 정상부 일원 1855㎡를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백제시대 대형 석벽·초석건물지와 목곽저수조, 저장구덩이(고려시대 포함) 등 유구 53기가 조사됐다.
 

▲ 발굴단이 목곽저수조를 조사하고 있다. ⓒ <무한정보> 김동근


남북길이 27미터, 잔존 동서너비 3미터, 정면 13칸, 측면 4칸으로 추정되는 석벽건물지는 백제산성에서 확인되지 않은 첫 사례며, 막사나 창고로 판단된다. 목곽저수조는 남북 10.5미터, 동서 11.2미터, 깊이 5.1미터로 굴착한 뒤 내부를 1.2미터 두께로 점토를 채워 목재를 짜 넣은 구조다. 6.2××6.1×3.5미터 크기로, 지금까지는 백제산성 목곽저수조 중 가장 규모가 큰 편이다.

유구 안에선 백제 웅진∼사비 시대를 대표하는 중(中)·앙(央)자 도장이 찍힌 인각와, 연화문 와당, 삼족기(세발접시), 승문(돗자리문)토기 등이 다량 출토됐다. 목곽저수조의 경우 백제시대 선문병형토기가 유일하게 파손되지 않은 형태로 수습됐고, 곡선·직선 등 독특한 무늬를 가진 기와가 처음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예산군 관계자는 "지방성에서 대형 석벽건물지와 인각와, 연화문 와당 등 수준 높은 건축물과 유물이 출토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예산산성은 백제시대 치소(治所) 역할을 담당했던 지방성으로, 규모로 미뤄 주둔군이 상당한 거점성이었을 것"이라며 "지명탄생 1100주년을 맞아 예산산성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해 군민에게 널리 알리겠다"고 밝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충남 예산군에서 발행되는 <무한정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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