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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수의 부끄러운 고백

[우리들의 일그러진 대학 1] 화페와 시장 논리에 종속된 대학

등록|2019.01.04 20:01 수정|2019.01.04 20:01
 

▲ 자격증 하나라도 더 따야하는 오늘날의 대학생. 더 이상 우리 사회의 혁명을 이야기 하던 '대학생'은 만나기 어렵다 ⓒ shutterstock

   
비판과 저항의 근거지였던 대학은 사라졌다 

대개 젊은이들은 도전적이며 나이가 들면서 보수화된다. 가진 것, 지켜야 할 것이 많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보수화된 소위 '기성세대'의 시각에서 새로운 세대는 항상 골칫거리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이다.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세대 사이의 갈등은 사회를 앞으로 나가게 하는 기본 동력이었다. 삶의 굴레로부터 조금이라도 덜 구속된 청년들의 자유롭고 비판적인 생각과 실천은 사회가 '현재'에 붙들려 정체되지 않도록 하는 힘이었다. 기성세대가 새로운 세대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지만 뒤의 세대가 자신들에게 도전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봉쇄하지는 않았다.

봉쇄하지 않았기보다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뒤에 오는 세대의 비판과 저항은 더 거세지면서 '혁명적' 변화에의 열망이 생겨나곤 했다. 더 길게 보면 '혁명'은 언제나 '혁명 이후'의 질서를 동반하는 것이었고 질서는 언제나 그 안에 혁명의 계기들을 포함하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대학은 청년세대의 비판과 저항이 지탱할 수 있는 근거지 중의 하나였다. 이미 보수화되어 기성세대의 주축이 되어 버린 과거 민주화세대가 착각하는 것처럼 대학 자체가 순수한 학문의 정신에 투철한 상아탑이라서, 대학 교수들이 학자적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지식인이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대학은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의 편에 서 있다. 대학이 비판과 저항의 진지일 수 있었던 것은 권력이 봉쇄할 수 없었던 젊은이들의 비판정신과 저항행동 그 자체에 의해 가능했을 뿐이다.

우리 시대의 비극은 한때 한국 사회의 변혁을 꿈꾸었던 사람들, 스스로 민주화를 성취한 세대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청년세대가 가지는, 지금까지는 결코 막을 수 없었던 저항과 비판의 정신을 매우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키는 기술을 터득했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사회가 온통 '경쟁'과 '효율'의 구호로 가득 차게 하고 모든 사람들을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으로 내모는 것. 허접하고 두서없는 주장을 훈계조로 이야기하는 강의를 건너뛰고 루소, 마르크스, 레닌의 책을 읽고, 때때로 낮술을 마시며 한국 사회의 성격과 혁명을 이야기하던 '대학생'은 대학에서 사라졌다.

사회에서 알아준다고 하는 소위 명문대를 나와도 '먹고살기' 위한 일자리를 찾는 것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인턴자리, 계약직으로라도 일하기 위해서는 자격증 하나라도 더 따야 하기 때문이다. 결석하면 사유서와 병원 진단서를 첨부하면서까지 학점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와 기업에 굴종하는 대학 그리고 교수들     

기가 막힌 일은 정부에서 이런 세태를 부채질한다는 것에 있다. 감사를 한답시고 출석부 관리여부를 '꼼꼼히' 검토한다. 교수들에게 그런 것이 남아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강의의 자율권은 점점 더 줄어든다. 전자시스템으로 출결석이 체크되고, 강의는 '교수법'이라는 이름으로 획일화된다. '잘 가르치는 것'은 학문적인 토론과 비판적 사고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획일화된 모듈에 맞추어 '단편적인' 지식 (차라리 정보라고 하자)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거기다가 '돈줄을 쥐락펴락'하면서 취업률을 재정지원의 중요 기준으로 제시한다. 대학을 기업처럼 생각하는 정부에 독재 시절과 한 치도 달라지지 않는 굴종적인 태도로 그것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대학들은 이제 학생상담마저도 '건당' 얼마로 계산하여 수당을 지급하는 '만행'을 공모하고 있다.  

교육부에서 '내려오는' 온갖 대학 지원 사업들은 나름의 근거와 논리를 갖추고 있다. 내용은 텅 비어있고 구색만 갖추면 되는 우리의 교육 시스템을 '훌륭히' 통과한 고위 공무원들은 '말 안 들으면 돈 안 줄 거야', '질 같은 것은 필요 없으니 숫자나 불려'라는 천박한 발상을 온갖 화려한 말들로 은폐하는 발군의 실력만은 갖추고 있다.

아직 '최소한의'(정말 글자 그대로 최소한이다)의 자존심은 남아 있는 교수들은 불만을 토로한다. 어디서? 삼삼오오 모여 앉은 술자리에서, 그리고 커피를 마시며. 그러고 나서 연봉을 결정하는 논문 편수를 어떻게라도 '불리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그게 여의치 않으면 편수 불리는 데 '발군의 실력'을 가진 동료교수에게 시비를 건다.

대학이, 그리고 교수들이 터득한, 지금까지 가능하지 않았던 청년 세대의 비판과 저항을 원천봉쇄할 수 있는 기예는 이렇게 스스로를 화폐와 시장의 논리에 종속시키면서 얻어진 것이다. 지금의 교육이 어떻게 도래할 미래 역사를 왜곡할지는 걱정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시장과 화폐의 강력한 논리 앞에 어떻게 생존할지, 어떻게 하면 자기가 속한 학과의 이익을 보존할지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이해관계에 압도당한다.

조삼모사(朝三暮四)의 고사 속 원숭이가 되어가면서도 스스로를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착각하는 것 자체가 '종속'의 지표다. 이렇게 촘촘한 '자본주의적' 권력망에 포획된 '그들'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보수적'이지만 자신들의 손으로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여지를 박탈한 다음 세대를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충분히 비판적이지 않다고, 충분히 자율적이지 않다고.

지성인이라는 착각, 전문가라는 위선에 망가져가 
 

▲ 한국 사회의 성격과 혁명을 이야기하던 ‘대학생’은 대학에서 사라졌다. ⓒ 참여사회


차라리 뻔뻔한 것이라면 좋겠다. 하지만 대학교수들은 멍청하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보잘것없는 힘도 권력이라고 학생, 조교, 시간강사에 '갑질'하는 것을 보면 영악하고 뻔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하면서도 스스로를 지성인이라고 굳게 믿는 것을 보면 아둔하다.

금전적 보상을 위해 논문을 '가공하고' 연구비에 '민감한' 것을 보면 나름 머리가 돌아가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들이 존재 근거인 대학의 기초를 허문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각자의 연구실에서는 '권력'을 성토하고 자본주의적 논리에 의해 대학이 잠식당하는 것을 한탄한다. 그러나 누군가와 연대하는 방법을 모르는, 정치적으로 무능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멍청하고, 어리석고, 무능한 사람들의 영향력은 대학을 망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상을 망치고 있다. 정부의 중요한 결정과정에 이들이 가지고 있는 '전문가적 지위'가 동원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위는 평범한 시민들의 필요, 욕구, 열망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무시하기 위한 근거가 된다. 정작 그들 스스로는 전문가적 '정보'를 왜곡하면서까지 정부와 기업의 구미에 맞게 판단하고 결정하면서 그렇게 한다.

결국 전문가들이 만든 교육 체계는 초등학교부터 학생들을 경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다. 타자와의 공감과, 나를 넘어서 집단의 이익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은 키워지지 않는다.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오직 옆의 동료 인간을 밟고 경쟁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숙명'이다. 그런 현실은 아무리 불합리할지라도 적응해야 하는 조건이다. 비판과 저항은 효율성이 떨어지는 시간낭비일 뿐이다. 사회가 존재할 수 있는 공감과 유대, 연대의 토대는 허물어져 간다.

부끄럽다. 대학이 대학답지 않고 교수가 교수답지 않는 사회에서 대학 교수로 '살아내야'하는 자의 자기고백이기에 너무나 부끄럽다. 그래도 희망을 가져 본다. 아무리 권력의 망이 촘촘해도 청년세대의 비판과 저항의 정신을 완전히 억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약한 개인의 정신은 비관에 빠져 있지만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서영표님은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입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 1-2월 합본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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