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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엄정화-이정현이 보여준 21세기... '세기말 감성'

최근 다시 유행하는 '사이버펑크' 감성을 엿볼 수 있는 1990년대

등록|2019.01.15 18:46 수정|2019.01.15 18:46

▲ 그라임스(Grimes)의 'We appreciate power' 뮤직비디오 캡쳐 ⓒ Grimes


캐나다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그라임스(Grimes)는 지난해 11월 28일 인공지능(정확히 말하자면 '딥러닝')을 광고하는 노래 'We appreciate power'를 발표했다. 북한의 10인조 여성 밴드 모란봉악단에게서 절도 있는 움직임과 프로파간다적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그는 공산주의의 선전성 메시지를 인공지능의 입장에서 재해석했다. 서른 살의 괴짜는 일찍이 지드래곤과 투애니원을 좋아한다고 밝혀, 관심 영역이 한반도의 음악 전체로 넓어졌다고 한들 그리 놀랍지는 않다.

퍼포먼스 측면에서 생각해보자면 그라임스는 2000년대 후반 한국의 가요 시장을 강타했던 미래지향적인 일렉트로니카보다는 그 이전의 세기말적인 분위기에서 탄생한 1990년대 가수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듯 보인다. 물론 그의 디스토피아적인 콘셉트는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을 포착한 결과물이지만, AI가 인류를 지배함으로써 종의 멸망(지배력을 잃고 자연 세계에서 2등 시민으로 전락한 인간은 서구의 입장에서 충분히 '멸망'이다)을 꾀한다고 가정한다면 이는 약 20년 전 외계생명체 혹은 사이보그에 의한 문명의 파괴 내지는 아포칼립스를 기다리는 세기말의 두려움과 맥을 같이한다. 21세기를 향한 불안과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가요 뮤직비디오 5편을 소개하며 1990년대를 되돌아본다.
 

▲ 015B의 '21세기 모노리스' 뮤직비디오 캡쳐 ⓒ 015B


015B - 21세기 모노리스 (1996)

"지구는 (중략) 각종 사이보그(B2) 범죄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구와 환경이 비슷한 A-4 혹성에 인류의 미래를 건 Dream City를 건설하게 되었다. (중략) 그러나 이미 지구는 핵전쟁의 위기로 치닫고 있는데…"

프로듀서 팀 015B의 6집 < The Sixth Sense Main Theme >은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가 대표하는 인더스트리얼 록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실험적인 앨범이다. 윤종신이 신경필이라는 이름의 객원 보컬로서 참여한 '21세기 모노리스'의 뮤직비디오는 사이보그에 의해 침해된 인류의 안전과 핵폭발로 인한 지구멸망을 다룬다. 심전도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기계음과 불안정한 비트로 문명이 가져온 멸망 서사를 그리는 거대한 내용답게 뮤직비디오의 제작비만 당시 약 3억 원이 들었다고 한다.
 

▲ 유승준(스티브 유)의 '가위(Nightmare)' 뮤직비디오 캡쳐 ⓒ 유승준


유승준 – 가위(Nightmare) (1997)

이제는 스티브 유가 더 익숙한 유승준의 데뷔곡이다. 그는 잘생긴 얼굴과 몸매, 뛰어난 가창력, 현란한 춤사위까지 모든 걸 갖춘 신인이었다. 연인을 잃고 상실의 아픔을 잊고자 사이보그의 길을 선택했지만 지저분한 창고에 갇힌 채 입력된 코드를 울부짖는 것이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이 맞는 결말이다. 제목처럼 이 모든 것이 악몽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조악한 개조 생명체가 되어버린 유승준은 (말 그대로) 인간의 기계화라는 1990년대를 지배하던 두려움의 표상을 반영한 것이다.
 

▲ S.E.S.의 'Dreams come true' 뮤직비디오 캡쳐 ⓒ S.E.S.


S.E.S. – Dreams come true (1998)

뉴 잭 스윙이라고 하면 흔히들 귀를 강타하는 브레이크 비트와 바비 브라운의 오버 사이즈 정장, 흥겨운 멜로디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웬걸, 'I'm your girl'로 깜직한 뉴 질 스윙을 선보였던 국민 요정 S.E.S가 돌연 몽환적이고 어두운 트랙으로 컴백했다. 핀란드 출신 걸그룹 나일론 비트(Nylon Beat)의 'Like a fool'을 리메이크한 'Dreams come true'는 멤버 유진과 슈의 보컬을 변조해 외계인 캐릭터의 목소리를 형상화했고 덕분에 원곡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탄생했다. 1990년대 뮤직비디오 대부분이 영화 <블레이드 러너> 식 휴머니티의 상실을 주제로 한 반면 S.E.S는 걸그룹 특유의 희망적인 분위기를 잃지 않고 '구원'이라는 퓨쳐리즘으로 나아갔다.
 

▲ 엄정화의 '몰라' 뮤직비디오 캡쳐 ⓒ 엄정화


엄정화 – 몰라 (1999)

1993년 '눈동자'로 가요계에 모습을 드러낸 엄정화는 "한국의 마돈나"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관능적인 춤을 선보였다. '배반의 장미', 'Poison'이 연이어 히트하자 엄정화는 단번에 섹시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이런 그도 1999년에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몰라'의 뮤직비디오에서 엄정화는 초록색 물이 찰랑거리는 헤드셋을 끼고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몸짓을 보여준다. 사이버 펑크 세계관을 구현한 듯한 CG 배경화면과 아바타인지 로봇인지 모를 그의 기괴한 움직임은 엄정화가 'Poison'에서 보여줬던 패셔너블한 모습과 더불어 그를 트랜드 세터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 이정현의 '와' 뮤직비디오 캡쳐 ⓒ 이정현


이정현 – 와 (1999)

아역 배우로 활동하던 이정현은 테크노에 도전했다. 90년대 한국 가요계에서는 사이보그, 외계인 등 비(非) 인류의 등장이 흔한 소재였다. 이정현 역시 이런 미래지향적인 흐름의 수혜자였지만, 그는 단순히 시류에 편승한 것만은 아니었다. 최신 인더스트리얼 사운드였던 테크노에 어울리는 최첨단 기계와 외계인은 물론, 소속사의 만류에도 고집했던 눈 모양의 부채와 고대 동아시아의 정복 스타일을 차용한 의상은 구와 신을 연결하며 그만의 반(反)문화를 완성했다. 독보적인 콘셉트로 해외에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이탈리아에서는 프로젝트 팀 밴디도(Bandido)가 '와'를 표절한 'Vamos Amigos'를 발표하기도 했다.
 

21세기 전후의 우리나라 광고들(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 포스터, 레쓰비 커피 광고, 애니콜 휴대폰 광고 ⓒ CJ, 롯데칠성, 삼성


1990년대는 혼돈의 시기였다. 전 세계 사람들은 21세기를 향한 공포와 환희,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맘껏 표출했고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외계 복장을 한 박지윤과 장혁의 휴대폰 광고, "이 세상 커피가 아니다"라는 카피를 유행시킨 한혜진의 커피 광고 콘셉트 등 우리에게 익숙한 90년대의 (조금은) 유치한 상상력이 그라임스를 비롯해 신스 웨이브 같은 영미 인디 신의 자양분이라면 믿겠는가.

<블레이드 러너>(1982)와 <공각기동대>(1995)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 곧 2020년을 바라보는 현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이러한 과거의 비관적 미래 구상으로부터 그라임스의 'We appreciate power' 같은 좋은 곡이 탄생했다. 흔히들 20세기 말의 감성을 촌스럽다고 여기지만 의외로 1990년대는 재발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 세기가 바뀌는 역사적인 순간, 그 시절만의 독특한 문화는 한 번쯤 추억해볼 만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대중음악웹진 이즘(www.izm.co.kr)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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