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생전에 한번도 못해본 말, 이제야 합니다
[남을 울린 내 영화, 나를 울린 어머니 ③ - 마지막] 어머니의 에필로그, 마지막 5일의 기록
1987년 12월15일 (화)
오늘 새벽 시골에서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화가 왔다. 어젯밤에 어머니가 밖으로 나간 뒤 안 들어오시자 아버지께서 한참 뒤에 찾으러 다니다 못 찾고 다시 집에 들어와 뒤뜰로 가니, 뒤꼍 부엌문 앞에 쓰러져 계신 것을 발견하셨다 한다. 아마 뒤뜰 부엌에서 혼자 나오시다 문턱에 걸린 뒤에 넘어져서 머리를 크게 다치신 모양이다.
이젠 사람도 못 알아 볼 정도로 혼수 상태란다. 서울 큰형은 즉시 시골로 내려갔다. 나도 오후에 가려고 터미널에 갔는데,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 선거 투표 때문에 고향에 가는지 표가 매진 상태였다. 할 수 없이 내일 아침 일찍 투표를 하고 내려가기로 맘먹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1987년 12월 16일 (수)
아침 일찍 성내동 대순종단에서 대선 투표를 하고, 급히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러 갔다. 고향 집에 가니 어머니가 안방에 누워 계셨다. 직장에 다닌 큰 형은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울산에서 온 여동생만 남아 있었다.
"엄니, 저예요. 정국이 왔어요."
"어이, 자네 아들 왔네."
아버지가 옆에서 거들었지만, 어머닌 이미 한쪽 눈이 반쯤 감겨진 상태로 나머지 한쪽 눈동자만 초점을 잃은 상태로 아예 나를 쳐다보지도 않으셨다. 어머니 머리는 남자 머리처럼 짧게 깎여 있었다. 머리가 너무 산발이라 아버지가 직접 깎아주셨다고 한다.
"이젠 알아보지도 못할 것이다." 아버지는 덤덤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어머니 머리맡에 앉으시더니 가져온 그릇에 우유를 쏟아 붓고 숟가락으로 떠서 어머니 입에 넣어 먹이셨다. 어머니가 삼키질 못하시자 아버지는 손으로 입을 움직여서 넘어가게 했다.
저녁에 티브이에서 대통령 선거 개표 방송을 하는데, 노태우가 1위를 하고 김대중이 3위를 하자, 아버지와 많은 동네사람들이 크게 실망했다. 난 티브이를 끄고, 누워계신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1987년 12월 17일 (목)
마을 사람들이 종종 와서 어머니를 보고 가셨다. 모두 곧 돌아가실 것 같다고 애처로워 하셨다. 나는 작은 방에서 책을 보는 둥 자는 둥 하다가 아무도 없을 때 큰 방에 들어가 어머니를 말없이 내려다보곤 했다. 이젠 거친 호흡만 하실 뿐, 거의 생명이 없는 것과 같았다. 여동생 딸인 어린 조카 지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뛰어놀고 있었다.
1987년 12월 18일 (금)
답답했다. 마치 옆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길 기다리는 것만 같은 내 모습이 참을 수 없었다. 빨리 서울에 올라가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번에 쓴 시나리오를 여기저기 보여줬는데, 과연 영화화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일단 서울에 올라가 그것을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께 얼른 갔다 바로 돌아온다고 말씀 드리고 집을 나섰다.
서울 가는 길에 광주에 들렀는데, 시내에선 노태우 당선에 대해 분노한 시민과 학생들이 부정선거 반대데모를 하고 있었다. 광주 시내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사재기 때문에 라면이 동났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나는 고속터미널 근처에서 최루가스를 마시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착잡한 심정으로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서울에 도착했다. 강남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가 걱정되어 얼른 공중전화로 가서 서울 큰형에게 전화했다.
"형, 혹시 시골에서 무슨 연락 없었어?"
"응, 연락 왔어. 어머니가 돌아가셨대."
"뭐 정말?"
"아까 7시쯤 돌아가셨다고 전화 왔더라."
순간 나는 아! 하고 회한의 외마디를 지르고 말았다. 심한 자책감으로 멍하니 터미널 지하상가를 걸었다. 어머니 임종을 못 보다니... 밤늦게 큰형과 서울역에서 만나 열차로 시골로 내려갔다. 좌석표가 없어 입석표로 끊었다.
1987년 12월 19일(토)
새벽에야 시골집에 들어섰다. 이미 안방엔 병풍이 쳐져 있고 어머니는 그 뒤에 안치돼 있었다. 우리는 모두 절을 올렸다. 어머니 영정 앞엔 향불이 피어오르고... 실감이 안 나고 이상하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형수님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큰 소리 내어 우셨다. 난 그저 멍하니 어머니 영정을 바라보기만 했다. 옆에서 아버지가 어머니 영정을 보시며 중얼거리 듯, 한 말씀 하신다.
'느그 엄니, 시집 올 때, 진짜 이뻤다잉'
어머니는 최근 6개월간 주위 사람들과 대화 한번 제대로 못하고 57세를 일기로 운명하셨다. 환갑도 못 지내시고, 내 결혼도 못 보시고... 장례식 치르는 동안 나는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아 눈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시종 무감각한 내 자신이 스스로 이상할 정도였다.
비록 어머니께서 이승에서 고생하시며 병에 시달리는 것보다 편안히 저승에 가시는 게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막상 부패되어가는 어머니의 시신을 보았을 때, 난 무감각한 느낌이었다.
내가 불효막심한 걸까? 평소에 난 정말 어머니께 최선을 다해 잘 드리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그러지 못했다. 항상 맘속으로 '어머니, 조그만 더 기다리세요.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성공해서...' 이러는 동안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죄책감으로 가슴이 아팠지만, 꽃상여가 뒷산 장지로 가는 도중에도 나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소재로 한 시나리오 아이디어를 영화로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찰 정도였다. 인간이란 이렇다. 형식과 겉치레도 때론 필요할지 모른다. 어쩌면 누가 죽고 나면 비록 가족일지라도 그 슬픔은 일시적이고, 이내 현실의 자기 문제로 돌아 가버리고 마는 모양이다.
왜 어머니는 날 울리는가?
어머니에 관한 내 일기는 여기서 끝났다. 그로부터 4년 후, 내가 <부활의 노래>(1991)로 감독 데뷔한 것도, 네 번째 영화 <편지>(1997)의 개봉 직후 결혼한 것도 결국 보지 못하신 것이다.
그때 시골에서 어머니를 돌보던 그 착한 막내 동생은 나중에 경찰이 됐고, 강력계 형사팀장으로 일하다 몇 해 전 범죄 검거율 전국 1위라는 실적을 올려 특진까지 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1994년, 내가 고향을 배경으로 영화 <두 여자 이야기>(김서라, 윤유선 주연)를 연출할 때, 어머니는 그 영화속에 치매 걸린 시어머니와 주인공인 두 여자의 주요 모델이 되기도 했다.
내가 어머니 때문에 눈물을 흘리곤 한 건 너무 애처로운 어머니 삶 때문이지만, 아프셨을 때 자식 된 도리를 제대로 못했다는 죄책감도 한 몫 한 것 같다. 돌이켜 보니, 내가 어머니 때문에 처음으로 크게 울었던 건,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훨씬 전이다. 내가 처음 지원한 대학에 떨어진 후, 아버지와 다투고 화가 나서 집을 뛰쳐나와 기차를 타려고 마을 언덕을 내려가는데, 어머니는 쫓아나와 나를 달래려고 애쓰셨다.
하지만 난 대학 가기 전엔 절대 고향에 안 온다고 소리치며 뒤도 안 보고 철길을 향해 마냥 걸었다. 한참을 걷다 문득 멈춰 돌아보는데, 어머니는 여전히 고향 마을 언덕 위 그 자리에 서 계신 채 날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멀리 보이는 어머니의 그 모습을 보고 엉엉 울며 기차역을 향해 걸어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머니! 불효자식이 살아생전 한 번도 못해본 말이지만, 사랑합니다! 이번 설날 찾아뵐게요."
[남을 울린 내 영화, 나를 울린 어머니 ①] 내 영화에도 눈물 안 났는데... 당신만이 저를 울렸습니다
[남을 울린 내 영화, 나를 울린 어머니 ②] 자꾸 밖에 나가자시는 어머니... 애처로웠다
오늘 새벽 시골에서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화가 왔다. 어젯밤에 어머니가 밖으로 나간 뒤 안 들어오시자 아버지께서 한참 뒤에 찾으러 다니다 못 찾고 다시 집에 들어와 뒤뜰로 가니, 뒤꼍 부엌문 앞에 쓰러져 계신 것을 발견하셨다 한다. 아마 뒤뜰 부엌에서 혼자 나오시다 문턱에 걸린 뒤에 넘어져서 머리를 크게 다치신 모양이다.
▲ 40살 무렵 어머니나중에 어머니의 영정 사진이 되었다. ⓒ 이정국
1987년 12월 16일 (수)
아침 일찍 성내동 대순종단에서 대선 투표를 하고, 급히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러 갔다. 고향 집에 가니 어머니가 안방에 누워 계셨다. 직장에 다닌 큰 형은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울산에서 온 여동생만 남아 있었다.
"엄니, 저예요. 정국이 왔어요."
"어이, 자네 아들 왔네."
아버지가 옆에서 거들었지만, 어머닌 이미 한쪽 눈이 반쯤 감겨진 상태로 나머지 한쪽 눈동자만 초점을 잃은 상태로 아예 나를 쳐다보지도 않으셨다. 어머니 머리는 남자 머리처럼 짧게 깎여 있었다. 머리가 너무 산발이라 아버지가 직접 깎아주셨다고 한다.
"이젠 알아보지도 못할 것이다." 아버지는 덤덤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어머니 머리맡에 앉으시더니 가져온 그릇에 우유를 쏟아 붓고 숟가락으로 떠서 어머니 입에 넣어 먹이셨다. 어머니가 삼키질 못하시자 아버지는 손으로 입을 움직여서 넘어가게 했다.
저녁에 티브이에서 대통령 선거 개표 방송을 하는데, 노태우가 1위를 하고 김대중이 3위를 하자, 아버지와 많은 동네사람들이 크게 실망했다. 난 티브이를 끄고, 누워계신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1987년 12월 17일 (목)
마을 사람들이 종종 와서 어머니를 보고 가셨다. 모두 곧 돌아가실 것 같다고 애처로워 하셨다. 나는 작은 방에서 책을 보는 둥 자는 둥 하다가 아무도 없을 때 큰 방에 들어가 어머니를 말없이 내려다보곤 했다. 이젠 거친 호흡만 하실 뿐, 거의 생명이 없는 것과 같았다. 여동생 딸인 어린 조카 지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뛰어놀고 있었다.
1987년 12월 18일 (금)
답답했다. 마치 옆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길 기다리는 것만 같은 내 모습이 참을 수 없었다. 빨리 서울에 올라가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번에 쓴 시나리오를 여기저기 보여줬는데, 과연 영화화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일단 서울에 올라가 그것을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께 얼른 갔다 바로 돌아온다고 말씀 드리고 집을 나섰다.
서울 가는 길에 광주에 들렀는데, 시내에선 노태우 당선에 대해 분노한 시민과 학생들이 부정선거 반대데모를 하고 있었다. 광주 시내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사재기 때문에 라면이 동났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나는 고속터미널 근처에서 최루가스를 마시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착잡한 심정으로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서울에 도착했다. 강남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가 걱정되어 얼른 공중전화로 가서 서울 큰형에게 전화했다.
"형, 혹시 시골에서 무슨 연락 없었어?"
"응, 연락 왔어. 어머니가 돌아가셨대."
"뭐 정말?"
"아까 7시쯤 돌아가셨다고 전화 왔더라."
순간 나는 아! 하고 회한의 외마디를 지르고 말았다. 심한 자책감으로 멍하니 터미널 지하상가를 걸었다. 어머니 임종을 못 보다니... 밤늦게 큰형과 서울역에서 만나 열차로 시골로 내려갔다. 좌석표가 없어 입석표로 끊었다.
▲ 10대 후반의 어머니18세에 결혼한 어머니의 처녀적 사진(추정) ⓒ 이정국
1987년 12월 19일(토)
새벽에야 시골집에 들어섰다. 이미 안방엔 병풍이 쳐져 있고 어머니는 그 뒤에 안치돼 있었다. 우리는 모두 절을 올렸다. 어머니 영정 앞엔 향불이 피어오르고... 실감이 안 나고 이상하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형수님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큰 소리 내어 우셨다. 난 그저 멍하니 어머니 영정을 바라보기만 했다. 옆에서 아버지가 어머니 영정을 보시며 중얼거리 듯, 한 말씀 하신다.
'느그 엄니, 시집 올 때, 진짜 이뻤다잉'
어머니는 최근 6개월간 주위 사람들과 대화 한번 제대로 못하고 57세를 일기로 운명하셨다. 환갑도 못 지내시고, 내 결혼도 못 보시고... 장례식 치르는 동안 나는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아 눈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시종 무감각한 내 자신이 스스로 이상할 정도였다.
비록 어머니께서 이승에서 고생하시며 병에 시달리는 것보다 편안히 저승에 가시는 게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막상 부패되어가는 어머니의 시신을 보았을 때, 난 무감각한 느낌이었다.
내가 불효막심한 걸까? 평소에 난 정말 어머니께 최선을 다해 잘 드리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그러지 못했다. 항상 맘속으로 '어머니, 조그만 더 기다리세요.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성공해서...' 이러는 동안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죄책감으로 가슴이 아팠지만, 꽃상여가 뒷산 장지로 가는 도중에도 나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소재로 한 시나리오 아이디어를 영화로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찰 정도였다. 인간이란 이렇다. 형식과 겉치레도 때론 필요할지 모른다. 어쩌면 누가 죽고 나면 비록 가족일지라도 그 슬픔은 일시적이고, 이내 현실의 자기 문제로 돌아 가버리고 마는 모양이다.
왜 어머니는 날 울리는가?
어머니에 관한 내 일기는 여기서 끝났다. 그로부터 4년 후, 내가 <부활의 노래>(1991)로 감독 데뷔한 것도, 네 번째 영화 <편지>(1997)의 개봉 직후 결혼한 것도 결국 보지 못하신 것이다.
그때 시골에서 어머니를 돌보던 그 착한 막내 동생은 나중에 경찰이 됐고, 강력계 형사팀장으로 일하다 몇 해 전 범죄 검거율 전국 1위라는 실적을 올려 특진까지 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1994년, 내가 고향을 배경으로 영화 <두 여자 이야기>(김서라, 윤유선 주연)를 연출할 때, 어머니는 그 영화속에 치매 걸린 시어머니와 주인공인 두 여자의 주요 모델이 되기도 했다.
▲ 나의 두번째 영화 <두여자 이야기>(1994)의 한 장면당시 이 작품은 '대종상 작품상, 신인감독상, 신인 여우상' 등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니, 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주신 선물처럼 느껴진다. ⓒ 이정국
내가 어머니 때문에 눈물을 흘리곤 한 건 너무 애처로운 어머니 삶 때문이지만, 아프셨을 때 자식 된 도리를 제대로 못했다는 죄책감도 한 몫 한 것 같다. 돌이켜 보니, 내가 어머니 때문에 처음으로 크게 울었던 건,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훨씬 전이다. 내가 처음 지원한 대학에 떨어진 후, 아버지와 다투고 화가 나서 집을 뛰쳐나와 기차를 타려고 마을 언덕을 내려가는데, 어머니는 쫓아나와 나를 달래려고 애쓰셨다.
하지만 난 대학 가기 전엔 절대 고향에 안 온다고 소리치며 뒤도 안 보고 철길을 향해 마냥 걸었다. 한참을 걷다 문득 멈춰 돌아보는데, 어머니는 여전히 고향 마을 언덕 위 그 자리에 서 계신 채 날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멀리 보이는 어머니의 그 모습을 보고 엉엉 울며 기차역을 향해 걸어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머니! 불효자식이 살아생전 한 번도 못해본 말이지만, 사랑합니다! 이번 설날 찾아뵐게요."
[남을 울린 내 영화, 나를 울린 어머니 ①] 내 영화에도 눈물 안 났는데... 당신만이 저를 울렸습니다
[남을 울린 내 영화, 나를 울린 어머니 ②] 자꾸 밖에 나가자시는 어머니... 애처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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