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치 이래 최초의 왜적격파 봉오동대첩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7회] 한민족은 일제의 야수적인 총칼 아래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 의병전쟁론 △ 의열투쟁론 △ 무장전쟁론 △ 외교론 △ 실력양성론 △ 계급투쟁론 등이 그것이다. 이들 방략은 나름대로 명분과 시대적인 배경이 있었고, 단독적으로 또는 복합적으로 추진되기도 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의열투쟁과 무장투쟁, 외교론을 모두 동원하였다.
▲ 청산리 어귀에 있는 청산리 항일대첩기념비,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이 전투에 중견 간부로 활약했다.청산리 어귀에 있는 청산리 항일대첩기념비,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이 전투에 중견 간부로 활약했다. ⓒ 박도
이들이 의열단을 조직하고 3대첩을 달성하고 독립군과 한국광복군 그리고 조선의용대의 핵심 멤버가 되었다. 신흥무관학교 뿐만 아니라 만주와 연해주의 의병출신 애국지사와 교민들은 각종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는 한편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 봉오동반일전적지 기념비(2004. 6. 1. 제3차 항일유적답사 때 촬영). ⓒ 박도
3대첩은 국치를 전후하여 국내외에서 전개된 의병전쟁의 결실이고, 이후 항일 무장투쟁과 의열투쟁의 발화점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정부와 인민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어 향후 대일전쟁의 정신적, 전략적 교훈으로 나타났다.
일부 학자 중에는 '대첩'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두고 과장된 표현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지만, 그토록 어려운 여건에서 일제 정규부대를 토살한 것은 세계전쟁사에서도 흔치 않는 사례이다.
1919년 3ㆍ1혁명이 일제의 야만적인 학살로 좌절되자 의기있는 청년들이 속속 만주로 건너가 무장투쟁에 나섰다.
▲ 부하들과 함께(가운데가 홍범도 장군). ‘신출귀몰하다’는 일본군들 입에서부터 나왔다고 합니다. ⓒ 홍범도홈페이지
이어서 홍범도 독립군은 1920년 안무가 지휘하는 국민회의독립군과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부독부의 독립군과 합동에 성공하여 '대한북로독군부'라는 연합사령부를 조직하고 군부도독부의 근거지인 봉오동에 본부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항일전을 준비하였다.
여기에 대한신민단 독립군 부대 60여 명도 합세하여 봉오동 일대의 우리 독립군 부대는 800여 명에 이르렀다. 국치 이래 최대 병력이 집결한 것이다.
군대편성을 정비한 연합군은 1920년 3월 15일부터 10일간 은성에서 작전을 전개했으며, 약 200명의 독립군은 은성군 우포면 퐁리동에 있는 일제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여 이를 파괴 섬멸하였다.
또 80명의 독립군은 미포면에 주둔하고 있던 미점헌병대를 습격 섬멸하였고, 18일에는 약 30명의 독립군이 유포면 향당동에서 일본경찰대와 교전하고, 독립군 200여 명은 은성읍을 공격하였다.
▲ 방치된 반일 전적지 비문봉오동전투 전적지는 1993년에 도문시 통전부 등에 의해서 최초로 세워졌다가 2013년 도문시 인민정부에 의해 2013년에 뒤에 보이는 위치에 다시 세워졌다. 현재 새로 세워진 기념비에 봉오동 전투에 관한 내용은 빨간천으로 가려져 있으며, 앞쪽에 방치된 예전 기념비를 통해서 그 내용을 유추해볼 수 있다. ⓒ 이정희
독립군은 일본군의 정보를 탐지하고 이에 대비하여 6월 6일 유리한 산악 지형을 이용하여 적을 골짜기로 유인하여 일격에 격퇴시켰다. 이 전투에서 일군 제19사단은 병력 60여 명이 사살되고 50여 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일본군은 다시 제19사단 소속의 야스가와 소좌 지휘하의 1개 대대병력으로 신미부대를 지원토록 명하였다.
하지만 이 부대 역시 고려령 서남방지역에서 우리 독립군의 기습을 받아 큰 타격을 입었고 삼둔자전투에서 승리한 독립군은 봉오동으로 귀환하였다.
▲ 두만강 건너 북한 함북 종성, 일본군 나남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는 이 두만강을 건너 봉오동으로 쳐들어왔다(2004. 6. 1. 제3차 항일유적답사 때 촬영). ⓒ 박도
대한북로독군부와 신민단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봉오동 일대에 진을 치고 있을 때에 일본군 제19사단의 야스가와 대대가 독립군을 추격하여 봉오동 골짜기 입구까지 제 발로 들어왔다.
봉오동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형태의 천연 요새이다. 이곳은 하ㆍ중ㆍ상동의 3개 마을이 25리의 골짜기에 걸쳐 30~60호의 한인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한인들이 개척한 마을이다.
이때 대한북로독군부 사령관 최진동과 연대장 홍범도는 일본군 1개 대대가 독립군 소부대를 추격하여 봉오동에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자 이를 섬멸하기로 결정하고, 봉오동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제1중대장 이천오는 중대원을 인솔하고 봉오동 상촌마을 서북단에, 제2중대대장 강상모는 동산에, 제3중대장 강시범은 북산에, 제4중대장 조원식은 서북단에 매복하여 일본군을 기다리게 하고, 연대장 홍범도 자신은 2개 중대를 이끌고 서남북단에 매복하였다. 이흥수의 대한신민단 독립군은 일본군이 진입해 들어오는 남단에 매복하였다.
▲ 봉오골 반일 전적지2018년 8월 3일 충남교육청 창의융합형 인문학기행 평화통일단 일행이 봉오동전투 전적지를 방문하여 헌화와 묵념을 하고 있다. ⓒ 이정희
이같은 사실을 알지 못한 일본군 야스가와 추격대대는 6월 7일 오전 6시 30분경 봉오동 골짜기 입구에 도착하여 척후수색대를 봉오동쪽으로 내보내었다. 독립군 이화일 분대는 이를 맞아 유인하기 위한 교전을 한다는 것이 너무 용감히 싸워서 일본군 척후수색대가 참패하고 퇴각해 버렸다.
▲ 봉오동 초모정자산, 이 산 아래 봉오동 상동, 중동 하동 마을이 있었다(2004. 6. 1. 제3차 항일유적지답사 때 촬영). ⓒ 박도
이때를 기다렸던 연대장 홍범도가 일제공격의 명령으로 신호 총성을 쏘았다. 매복해 있던 독립군이 동서남북의 4방에서 정확히 조준을 하고 있다가 맹렬한 집중사격을 가하니 일본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가히 추풍낙엽이었다. 일본군은 신곡중대와 중서중대를 전방에 내세워 3시간 동안 응전하다가 사상자가 속출하자 더 버티지 못하고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강상모가 지휘하는 독립군 제2중대는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또다시 막대한 타격을 가했다. 도망치던 일본군이 수없이 쓰러졌다. 이것이 독립군이 일본군을 섬멸한 봉오동대첩의 실황이다.
▲ ‘봉오동 반일 전적지’기념비가 있는 봉오저수지 입구. 일대가 모두 전적지이겠지만, ‘봉오동전투’가 일어났던 계곡과 마을은 물에 잠겼더군요. 서운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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