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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막노동하는 아버지를 둔 아나운서 딸입니다

잘 자란 노동자의 딸... 이제 부모의 삶을 말하고 씁니다

등록|2019.02.11 10:59 수정|2019.06.25 18:07

▲ 사람들은 아나운서라는 내 직업 하나만을 보고 당연히 번듯한 집안에서 잘 자란 사람, 부모의 지원도 잘 받아 성장한 아이로 여겼다. ⓒ flickr


나는 개천에서 난 용이다. 내가 '잘난 용'이라는 것이 아니라, 방점은 '개천에서 난'에 찍고 싶다. 변변치 못한 집안에서 훌륭한 인물이 나왔다는 뜻의 속담, 부모가 빈궁한 생활을 했다 해도 피나는 노력을 하면 원하는 꿈도 이루고 성공할 수 있다는 이 속담은 딱 나를 설명하는 한 줄이다.

1948년생 아빠는 집안 형편 때문에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도 채 다니지 못했다. 몸으로 하는 노동을 일찍이 어렸을 때부터 해왔다. 밭일, 동네 소일거리... 그러다 몸이 커지고 어른이 되자 노동으로 가장 많은 일당을 쳐주었던 건설현장에서의 막노동을 시작했다. 그 일은 5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1952년생 엄마는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했다. 8남매의 장녀였고 아래로 동생들이 줄줄이 태어났다. 자연스럽게 10대의 나이에 자식 대신 동생들을 돌보는 엄마 역할을 해야 했고, 집안일과 가족들 뒷바라지를 해왔다. 삼시 세끼 밥을 짓고 청소와 빨래를 하는 가사 노동. 그 일도 5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1984년생 딸인 나는 대학원 공부까지 했다. 10년 차 아나운서이고 방송도 하고 글도 쓰고 강의도 하고 아나운서 준비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20대에 직장 이직을 여러 번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대기업 세 군데를 다녔고, 사내 아나운서로 시작해 지역 MBC에서 아나운서로 근무했다. 지금은 프리랜서로 라디오 DJ를 하고 있고 내 능력치만큼의 일도 하고 돈도 벌며 잘 살고 있다.

사람들은 아나운서라는 내 직업 하나만을 보고 당연히 번듯한 집안에서 잘 자란 사람, 부모의 지원도 잘 받아 성장한 아이로 여겼다. 그 당연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시냐'고 물어오곤 했다. 내가 "건설 쪽 일을 하시는데요" 하고 운을 떼자마자 아버지는 건설사 대표나 중책을 맡은 사람이 됐고, 어느 대학을 나오셨냐 물어오면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대졸자가 됐다. 부모를 물어오는 질문 앞에서 나는 거짓과 참 그 어느 것도 아닌 대답을 할 때가 많았다.

기준을 정해놓고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물음표도 잘못됐지만, 그 기대치에 맞춰 정확한 대답을 하지 못한 나의 마침표도 잘못됐다. 겉모습을 보고 '이럴 것이다'라는 틀을 씌우는 생각들은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범하는 가장 큰 결례가 아닐까.

보통의 무례 속에 우리는 서로에게 잘못된 질문과 답을 하며 누군가에게 부끄러운 사람들이 되어간다. 나도 그 틀에 맞춰 아버지와 어머니를 숨기고 부끄러워하며 살아온 지난날들이 너무나 죄송스럽고 후회스러워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내 부모의 배경을 남들에게 다 말할 필요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말 못 할 이유도 없었는데, 그 말이 참 쉽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선명한 증거였다
 

아버지가 방송국 PD여서 자연스럽게 아나운서를 꿈꿨다는 친구, 의사인 아버지가 '너는 말을 잘하니 아나운서가 되어보면 어떻겠냐'며 일찍이 방향을 정해줬다는 친구, 부모님의 지원 아래 유명 브랜드의 정장과 고가의 숍에서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는 친구. 그들 옆에 선 나는 '형편에 맞지 않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내 불안해하며 20대 아나운서 준비생 시절을 보냈다.

꿈에는 형편이 없는데, 친구들의 아버지가 맞고 내 아버지가 틀린 것이 결코 아닌데, 그들 기준에 맞춰 비교하며 나는 빨간펜을 들고 나 스스로 잘못된 채점을 했다. 그것은 애초부터 정답이 없는 문제였고, 문제도 아니었다.

부모의 시절과 나의 시대는 아주 달라서 부모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난과 무지를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것들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원망도 창피함도 되어서는 안 된다.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대단한 일도 아니고, 막노동이 변변치 않은 직업도 절대 아님을 나도 너무나 늦게 깨달았다.
 

▲ 나는 막노동하는 아버지 아래서 잘 자란 아나운서 딸이다. ⓒ unsplash


나는 막노동하는 아버지 아래서 잘 자란 아나운서 딸이다. 한글조차 익숙하지 않은 부모 아래서 말을 업으로 삼는 아나운서가 됐다. 내가 개천에서 용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정직하게 노동하고 열심히 삶을 일궈낸 부모를 보고 배우며, 알게 모르게 체득된 삶에 대한 경이(驚異)가 있기 때문이다.

매일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공사장을 향하는 아버지와 가족들을 위해 묵묵히 돈을 아끼고 쌀을 씻었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매 순간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르바이트부터 아나운서 입사 시험까지, 부모를 떠올리며, 그리고 나 자신을 생각하며 골몰했다. 나의 부모가 틀리지 않았음을 내가 입증하고 싶었고, 그들의 선명한 증거가 되고자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것들에 몰두했다. 나는 반드시 번듯한 자식이 되어야 했다.

나를 움직인 가장 큰 원동력도 부모였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신들이 부족한 만큼 사랑을 채워 나를 돌봐주었고, 무엇이든 스스로 하는 나를 대견해했고, 묵묵히 지켜보며 응원해 주었다. 물질적 지원보다 심적 사랑과 응원이 한 아이의 인생에 가장 큰 뒷받침이 된다. 나는 그것을 잘 알았으므로, 내 앞에 놓인 삶을 허투루 할 수 없었다. 여유가 없던 부모의 인생에 나는 목숨을 걸고 생을 바쳐 키워낸 딸이었다.

길거리를 걷다 공사 현장에서 노동을 하는 분들을 보면 나는 속으로 생각이 든다.

'저분들에게도 번듯한 아들이, 잘 자란 딸들이 있겠지? 그 자식들은 자신의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처럼 말하지 못했을까? 내가 했던 것처럼 부모를 감추었을까?'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내가 증명하고 싶다. 평생 막노동과 가사노동을 하며 키운 딸이 아나운서가 되어 그들의 삶을 말과 글로 옮긴다. 나와 비슷한 누군가의 생도 인정받고 위로받길 바란다. 무엇보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 모두의 부모가 존중받길 바란다.

기적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나를 키워낸 부모의 생, 그 자체가 기적이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https://brunch.co.kr/@hjl05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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