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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살아왔다고 홀로서기에 성공한 건 아니다

[도서관에서 보물 찾기] (3)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등록|2019.02.25 12:19 수정|2019.02.25 12:20
집에서 자전거로 5분만 가면 도서관이 있다. 귀한 보물이 가득한 집채만 한 금고가 곁에 있는 기분. 여유롭고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 사이를 걷다가 발길을 붙드는 제목을 봤을 때, 그 내용이 마치 찾고 있던 퍼즐 혹은 열쇠처럼 내 마음에 딱 들어맞을 때의 반가움, 해방감, 오묘함이란! 그 보물 이야기를 하려 한다. 보물과 같은 책 이야기. 형식은 자유. 허구에 허구를 더할 수도, 누군가에 전하는 편지가 될 수도. 내 보물을 보여주는 방법은 내 자유니까. - 기자 말
 

▲ 도서관에서 보물 찾기 ⓒ 이명주


귀향한 지 7년. '정말 이대로면 고독사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근래 몇 번 했었다. 귀향을 하고 이제껏 내가 걸어온 길을 '괜히 왔다' 후회한 적은 정말 단 한 번도 없다. 구체적으로 고향인 부산으로의 이주, 작은 게스트하우스 운영, 글과 그림, 여행 등을 통한 소통의 작업들. 하지만 거의 언제나 그리고 점점 더 혼자인 것이 버거운 지는 꽤 됐다.

그런 중에 이 책 마루야마 겐지의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를 발견했다. 억센 잡초 같은 느낌의 서체로 쓰인 제목과 표지에 펼쳐진 하늘과 밭 사진에 끌려 속을 열어보니 "고독은 시골에도 따라온다", "술을 마시는 건 인생을 도려내는 일", "외로움 피하려다 골병든다" 같은 소제목들이 막힌 혈을 찌르는 침처럼, 나약해진 정신을 꾸짖는 회초리처럼 와 닿았다.

책 속에서 작가의 매(회초리)는 수십 년 굴욕적인 도시 생활 속에서 악전고투하다 간신히 정년을 맞은 후 시골을 만만히 보고 구체적 목적도 없이 낭만적 귀향을 꿈꾸는 노년층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50년째 시골에 살고 있는 작가의 경험으로 너무 살벌하고(침실을 요새화하고 수제 창을 만들어 불가피하다면 살인도 망설이지 말라는 등) 진지한 조언들로 가득하다.

나의 경우 30대 초반에 시골이 아닌 도시인 고향으로 왔고 아직은 젊은 층에 속하니 다소 거리는 있지만 크게 보아 지금의 자리에 있기 전 서울에서 삶의 기억, 그리고 귀향과 함께 여러 일들을 결심하고 밀어붙일 때의 첫 마음들, 그 각각의 과정, 무엇보다 현재의 내 생활과 정신 상태를 냉정히 평가하고 각성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홀로서기 정신의 부족 (…) 부모에게 의존하고, 학력에 의존하고, 직장에 의존하고, 사회에 의존하고, 국가에 의존하고, 가정에 의존하고, 술에 의존하고, 경제적 번영의 시대에 의존하면서 (…) 사실 당신은 자신에게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고 또 도피해온 것은 아닐까요."

'당신의 발목을 붙잡는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술입니다. (…) 알코올 바다 저 멀리에 있을 계획이요, 목적이요, 삶의 보람이요, 창조요, 이념인 대륙을 본 정신으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 결국 어제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하루를 지루하게 보냅니다."

"술 이외에도 당신 심신을 갉아먹는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고독입니다. (…) 바깥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것 같은, 몸 둘 곳 없는 이 처지는 과연 무엇일까. 이런 의문이 순식간에 커져 저녁 무렵에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 무료함과 고독에 시달리다 죽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절망적인 결론에 이릅니다."

이 대목들을 읽으며 눈물이 핑 돌 만큼 공감이 되는 동시에 부끄러웠다. 그리고 마침내(이제야) '홀로 살아왔다고 해서 진정한 홀로서기에 성공한 것이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이 가슴을 쳤다. 어느 때부터 초심과 뚜렷한 목적 대신 가벼운 잔에 물과 같은 성질의 고독만을 채워 스스로 흔들리며 조심 없이 여기저기 쏟고 다니는가 하면 그 빈 잔에 술을 채워 마셔댄 나를 돌아보며.
 

▲ 마루야마 겐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 이명주

 
"인류 전체가 약한 것은 아닙니다.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단련하지 않은 인간만 그렇습니다. (…) 어떤 것이든 스스로 해내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으면 굳이 불편한 곳에서 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지, 결코 다른 누군가가 아니다. 진심으로 자신을 구제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정도는 달라도 그 힘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들 속에서 내가 나아갈 방향을, 흐느적거리는 내 정신을 단단히 붙잡을 지지대가 필요함을 자각했다. 매일 아니 매순간 초심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목표를 세워 하나하나 단단히 현실에 못 박고 그렇게 계속 삶을 확장시켜야 함을. 그 방법은 쉽고도 가장 어려운 '한 발 한 발 계속'.

마루야마 겐지. 사실 십여 년 전쯤 그의 글을 처음 접하고(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 상당 반감을 품었었다. 작품 전체에서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묘사하는데 그 문체가 어찌나 확신에 차 있던지 아주 무례한 마초임에 틀림 없는 듯했다. 괘씸해서 여성과 남성 주어를 모조리 바꿔 책 전부를 정서한 뒤 작가에게 보낼 생각도 했었다.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에서도 그의 어투는 변함이 없었다. 몇 년 전 읽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에서도 역시. 그런데 올해로 76세인 작가는 50년도 전인 1968년에 "국가권력과 국가가 초래하는 권위, 또 문학상 제도"를 비판하고 자신이 태어난 시골마을로 돌아가 매일 이른 새벽 일어나 글쓰기에 매진해왔다. 그렇게 낸 책이 100여 권.

국내의 한 기자가 그를 직접 찾아가 한 인터뷰에 다음과 같은 작가의 말이 있었다.
 
"개인을 되찾기 위한 문학이 바로 저의 문학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을 다시금 묻도록요.  (잠시 침묵) 대개의 독자들은 스스로를 잊기 위해 소설을 읽습니다."

"진정한 인간다움은 동물로서의 삶을 멈추고 인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뇌를 한껏 쓰는 데 있습니다. 또 하나, 약자인 척하지 않는 것!"

그리고 또다른 인터뷰에서 지나친 남성 우월감과 여성 혐오를 품고 있는 것 같다는 일부 대중의 '의심'에 대해서 작가는 강력 부인하면서 다만 집 주변 300여 평 규모의 텃밭과 정원 일 즉 힘이 필요한 바깥일은 절대적으로 자신이, 대신 집안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고 했단다. 이 부분은 그의 부인 입장이 가장 중요할 듯한데 당장 확인할 수 없으니 일단 판단 보루. 

어쨌거나 이 정도로 언행일치의 삶을 사는 그라면, 이런 글을 쓸 자격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우리 사회엔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또 타자의 삶을 바로 세워 굳건하게 끌고 가려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는 생각. 한때는 미워했지만 모처럼 다시 만난 마루야마 겐지의 이번 책은 정신이 해이해지면 스스로 회초리를 꺼내듯 찾아 읽고파서 특별히 헌책방에서 구입해 소장했다. 나의 '세 번째 보물' 이야기였다.
덧붙이는 글 사실 이 책보다 더 강렬하게 끌린 것이 작가 소개말에서 언급된 또 다른 저서 <정오이다>였습니다. ‘귀향한 청년의 고독을 그린’ 작품이란 설명 때문이었는데 국내에선 출간되지 않은 듯 우리말로 된 정보가 거의 없고 지금껏 알아본 바로는 해당 책이 있는 도서관이나 서점도 없었습니다. 혹시 책의 내용을 아시거나 우리말 또는 영어로라도 번역된 적이 있는 지 여부를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인용 인터뷰 출처 : 기자협회보 2017년 9월 6일 기사 마루야마 겐지와 ‘마초 가부장’, 경향신문 2015년 8월 22일 기사 [문명, 인간이 만드는 길 ‘마음’ - 전문가들과의 대화](9) 마루야마 겐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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