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두 신문의 일장기 말살사건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21회] 세계를 놀라게 한 우승의 영광이 일본인이 아닌 한국 민족의 것으로 확인하기 위한 치열한 언론투쟁이었다
▲ 손기정선수의 일장기를 지워 보도한 1936년 8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 4면 기사(좌)와 동아일보의 지방판 조간 2면 기사 ⓒ wiki commons
베를린으로 출발하면서부터 기대를 모았던 손기정 선수가 세계 최초로 2시간 30분대의 벽을 깨고 우승하자 식민지 시대일망정 한국 국민들은 크게 환호하였고 신문들은 대서특필을 하고 호외를 발행하여 이 쾌거를 널리 알렸다.
당시 조선에는 민간지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 『조선일보』 그리고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가 발행되고 있었다. 동아는 김성수, 조선은 방응모가 사장이었다.
『조선중앙일보』는 1931년 11월 27일 『'중외일보』의 지령을 이어받아 창간한 신문으로 경영난으로 한동안 휴간했다가 사원들의 투표로 감옥살이를 마치고 출감한 여운형을 사장으로 영입하였다.
여운형은 1933년 3월 7일자로 제호를 『조선중앙일보』로 바꾸어 발행하면서 시종 민족주의적 논조를 유지하여 국민들의 호응을 받았다. 1936년에는 하루 32,782부씩 발행하여 최초로 『동아일보』의 31,666부보다 약간 앞서기도 했다. 명실공히 최고 발행부수의 신문이었다.
『조선중앙일보』는 민족적ㆍ사회적 범죄자나 총독부에 타협한 변절 인물, 특권층의 비리를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유명한 친일파 박희도와 최린의 축첩 행각 등 이들의 비열한 사생활에는 한 치의 용서가 없었다. 반면 학생ㆍ노동자ㆍ농민ㆍ빈민 등에 대한 지지ㆍ원조는 당대 신문 중 제일이었다.
한강유역의 홍수와 낙동강 수해 때는 여운형 사장이 직접 침수 가옥 안으로 들어가 인명을 구하고 구호품을 나눠 줄 정도였다. 신문사 사장이 체면이나 겉치레를 차리지 않고 직접 일선에 나서서 민중들과 접촉하고 그들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당시에나 지금이나 결코 쉽지 않는 일이었다.
여운형이 지휘하는 이 신문은 총독부 정책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친일 변절자들에 대해 가차 없이 비판했다. 국내 지도적 인물들의 총독부 당국과의 타협을 경고했고, 이미 그 회유정책에 넘어간 인사들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 이 신문이 국민에게 인기가 있었던 배경이었다.
당시 세간에서는 "『조선일보』 광산왕 방응모는 자가용으로 납시고, 『동아일보』 송진우는 인력거로 꺼덕꺼덕,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은 걸어서 뚜벅뚜벅." 이란 내용이 잡지에 실리고 세간에 나돌았다.
『조선중앙일보』는 총독부의 직ㆍ간접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소신을 지키면서 신문을 제작하였다. 1933년도 송년사에서 예리한 국제정세의 안목을 살필 수 있다.
지나간 1933년은 실로 세계사의 발전방향을 확연하게 결정하고 말았다. 국제 자본주의의 시금석인 세계경제회의는 무참하게도 실패하여 고립적 국가주의 경제로 박차를 더하게 하고 제국주의 국가들의 수호신 같이 받들은 국제연맹도 일ㆍ독 양국의 탈퇴로서 후광을 잃어 도리어 제국주의 국가 간의 모순을 폭로시키고 말았다.(중략) 블록의 방공이 격렬해짐에 따라 국가 권력의 정면충돌을 피치 못할 위기에 임해 있다.(중략)
우리는 극동 방면에 더욱 주목을 크게 한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중국을 싸고도는 열국의 관계는 극히 험악해 가는 터이니 일ㆍ미 간의 선박 경쟁은 대전 전의 영ㆍ독 간의 그것과 다름이 없고 일ㆍ러간의 육군 경쟁도 역시 당시의 독일 대 불ㆍ러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중략)
영국이 전비를 최대한으로 확장하여 가는 품은 1914년의 대전 직전과 다름이 없다. 벌써 노만 국경에는 군사상 경계가 느끼게 된다. 폭풍우의 전야 같은 1933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스스로 단속하지 아니할 수 없는 바이다.(하략)
▲ 손기정 선수의 시상대에 오른 모습남승룡 선수(전)와 손기정 선수(중앙)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남승룡 선수는 "우승자(손기정 선수)가 나무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어 동료가 부러웠다"고 한다. ⓒ 김용한
『동아일보』의 체육담당 이길용 기자는 사진담당 백운선 기자 및 제판담당 강대석 기자와 의논하여 사진 동판을 만들 때 초산을 넣어서 일장기를 지웠다. 여기에 삽화담당 이상범 화백이 사진이 부자연스럽지 않게 수정을 가하였다.
이렇게 일장기가 말살된 사진은 1936년 8월 25일자에 보도되었다.
두 신문사의 일장기 말소는 올림픽경기에서 당당히 월계관을 획득한 손 선수의 쾌거가, 세계를 놀라게 한 우승의 영광이 일본인이 아닌 한국 민족의 것으로 확인하기 위한 치열한 언론투쟁이었다. 언론인들의 민족의식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조선중앙일보』의 첫 의거는 모르는 채 넘겼던 총독부가 『동아일보』의 두번째 의거에는 강압으로 나왔다. 『조선중앙일보』는 유해봉 기자의 구속과 신문사를 폐간하고 『동아일보』는 무기정간 처분에 이어 이길용ㆍ백운선ㆍ강대석ㆍ이상범 기자를 비롯, 사회부장 현진건, 잡지부장 최승만, 사진부장 신낙균, 편집기자 임병철 등을 구속하였다.
구속된 기자들은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우연한 과실이라고 주장하다가 40여 일 만에 석방되었으나 부사장 장덕수ㆍ주필 김준연, 편집국장 설의식, 기자 이길용은 일제 패망 때까지 끝내 신문사에 복귀하지 못하였다.
『동아일보』는 279일 간의 무기정간이 해제되어 이듬해 1937년 6월 2일 복간되었다. 속간하면서 사고(社告)에서 "대일본 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조선통치의 익찬(翼贊)을 기하했다"고 다짐하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
총독부는 『조선중앙일보』측에 자기들이 추천한 친일파 3인 중에서 사장을 택하면 속간시켜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신문사는 끝내 폐간의 길을 택하였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살사건은 많이 알려졌지만 『조선중앙일보』의 경우는 비교적 덜 알려지고 있다.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신문사가 폐간되고, 사장 여운형이 이 사건으로 언론계를 떠났기 때문이다. 한 연구가의 분석이다.
▲ 고 손기정 선수의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80주년을 맞아 서울 중구 손기정체육공원내에 태극기를 달고 있는 고 손기정 선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최윤석
즉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여운형은 민족운동을 지속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신문사 사장이 되어 활동했고, 그런 가운데 이후 통일전선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인맥을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특히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신문이 우회적인 방법으로라도 비판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여운형이 신문을 '사업'으로 보다 '운동'의 수단으로 보고 운영해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강력한 탄압과 신문의 상업주의화라는 현실 때문에 '운동의 수단'으로 신문을 운영하려던 여운형의 활동에는 점차로 한계가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박용규, 「여운형의 언론활동에 관한 연구」)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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