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콧물 줄줄... 일본인들이 우는 계절이 왔다
[도쿄 옥탑방 일기 16화] 꽃가루의 역습
▲ 일본 치바현 노코기리산에서 내려다본 전망. 바늘 꽂을 틈도 없겠다 싶을 정도로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있다. ⓒ 김경년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일본의 산들
도쿄 중심에서 동북쪽으로 60km 떨어져 있는 나리타공항에서 도쿄 시내로 들어오려면 특급열차나 리무진버스를 타야 한다. 마치 인천공항에서 서울까지 가려면 공항철도나 리무진버스를 타야 하는 것과 똑같다.
우리나라도 해방 이후 산림 녹화사업에 성공해 이제는 제법 푸르른 국토를 갖게 됐지만, 일본의 산은 정말 틈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다. 대충 봐도 나무의 밀도가 우리의 배 이상 되지 않나 싶다.
도쿄 인근이든 지방이든 어느 산이나 마찬가지다. 키가 큰 삼나무나 편백나무가 쭉쭉 위로 뻗은 숲으로 들어서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하다. 일본에 '원령공주' '이웃집 토토로' 같이 숲을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이나 영화가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나 보다. 전에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본의 다른 모습에 부러움마저 느껴졌다.
▲ 지하철 안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는 일본 시민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점점 늘어나고 있다. ⓒ 김경년
도쿄에 마스크맨들이 많은 비밀
그러나 그 부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도쿄의 거리를 걷거나 지하철을 타면 유독 흰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많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참 마스크를 많이 쓴다. 저렇게 얼굴을 꼭 싸매고 다니면 얼굴에 땀 차고 숨쉬기도 불편할 텐데 어떻게 다니나 궁금했다.
독감이 유행한다더니 그래서인가 했는데, 일본에는 독감보다 더 무서운 '화분증(花粉症.카훈쇼)'이라는 게 있었다.
'화분증'이란 일종의 꽃가루병으로, 매년 봄만 되면 눈물, 콧물이 줄줄 흐르는 것은 물론 재채기, 가려움증, 고열 현상 때문에 밤에 잠도 못 이룰 정도로 환자들은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일본인 둘 중 하나는 크고 작은 화분증을 겪고 있고, 한해 7500억엔의 소비감소를 낳는다는 조사까지 있을 정도로 사회경제적으로도 피해가 크다.
일본이 유독 다른 나라와 달리 화분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역사적 배경이 있다. 2차대전 때의 공습과 전후의 마구잡이 벌채로 인해 산림이 황폐해지자 일본 정부는 산림녹화 사업을 시작했고, 그때 주로 심은 나무가 일본말로 '스기(衫)'라고 하는 삼나무이다.
일본이 원산지인 삼나무는 예로부터 생장이 빠르고 가공이 쉬운 걸로 유명하다. 일본 곳곳에 있는 천혜의 원시림에 가보면 몇 사람이 팔 벌려 끌어안아도 닿을까 말까 한 엄청난 굵기와 크기의 아름드리 삼나무 군락이 형성돼있다. 교토 등 오래된 도시에 중국의 자금성 건물들보다도 더 큰 사찰 건물이 즐비한 것도 따뜻한 기후와 함께 마구 자라주는 삼나무 덕분이다.
아무튼 기대대로 무럭무럭 잘 자란 삼나무는 일본의 전후 재건에 큰 도움을 됐다. 하지만, 과유불급이었는지 삼나무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꽃가루들이 바람에 날리면서 일본 전역이 화분증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삼나무의 역습' 혹은 '삼나무의 복수'란 말까지 있을 정도다.
이 화분증이란 게 재밌는 것은 사람마다 자신의 몸에 비축할 수 있는 꽃가루의 양에 한계가 있어서 일정 기간까지는 괜찮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면 증상이 나타난다는 얘기다. 즉, 일본에 온 지 오래된 외국인도 멀쩡하다가 개인적 한계에 다다르면 그 이듬해에는 눈물콧물 흘리며 화분증을 호소할 수 있는 것이다. 방심은 금물이다. 물론 평생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고, 오자마자 고생할 수도 있다.
작년 봄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학부생들의 수업을 청강한 적 있었는데, 한 번은 뒤에 앉은 어떤 학생이 수업시간 내내 몇 분 간격으로 휴지에 대고 계속 코를 푸는 것이다. 가급적 신경 안 쓰고 수업에 집중하려 했으나 그게 쉽지 않아 자꾸 쳐다보게 됐다. 나도 나지만 교수님이 짜증 내지는 않을까 더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교수님은 한 번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무사히 수업을 끝냈다.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지하철에서 전화통화도 안 하는 사람들이 이걸 참아주는 게 참 대단하다. 화분증의 고통을 다 이해하기 때문일까. 그 후로는 식당에서도 유독 코 푸는 소리가 자주 들린다.
▲ 꽃가루가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삼나무. 일본의 TV가 지난 1월에 찍은 모습이다. ⓒ 일본FNN
올해는 예년보다 9배까지 더 심하다는데
일본 사람들의 마스크 쓰기는 단순히 화분증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한 번은 동네 슈퍼의 계산대 뒤 붙여놓은 근무수칙표에 '항상 마스크를 쓰고 일할 것'이라고 쓰여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 사람들을 많이 접촉해야 하는 점원들이 손님으로부터 병균을 옮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점원이 손님에게 병균을 옮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배려라고도 볼 수 있겠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일본인들의 특성도 마스크 열풍에 한 몫하는 듯 싶다. 남들 앞에서 표정을 감추는 데 마스크만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해가 바뀌고 날씨가 따뜻해지자 TV, 신문 등 일본의 미디어들은 일제히 화분증 경계에 나섰다. 한 민간 기상예보회사에서 올해 도쿄를 포함한 간토지방은 예년에 비해 7배, 돗토리·시마네현은 무려 7배~9배까지 기승을 부리는 등 6년 만에 꽃가루가 가장 많이 날릴 것으로 예상하는 자료를 냈기 때문이다.
이상고온 현상으로 더위가 맹위를 펼쳤던 작년에는 장마가 일찍 끝나고 그만큼 일조량이 늘었기 때문에 삼나무의 생장에 적합한 날씨였다는 것이다.
며칠 전 한 모임에 갔더니 마스크를 하고 눈이 벌건 사람들이 몇이 눈에 띄었다. 지난주 모임에서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드디어 화분증이 시작된 거다. 눈이 따갑고 정신이 몽롱한 감기증상을 호소한다. 일본에 온지 12년째 되는 한 사람은 5년째까지 괜찮다가 그 이듬해부터 화분증이 나타났다고 한다. 약을 먹으면 증상이 조금 완화되지만 그때뿐이고 약효는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화분증 치료제가 불티나게 팔리지만 사실 뾰족한 약은 없다. TV뉴스에서도 그저 '마스크쓰기', '양치질자주하기', '얼굴자주씻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할 뿐이다.
서울 사람들은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도쿄 사람들은 꽃가루 때문에 마스크를 쓴다. 이럴 때 세상이 공평하다고 하면 너무 나간 건가.
덧붙이는 글
필자는 한국언론진흥재단 후원으로 도쿄 게이오대학에서 1년간 방문연구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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