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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 박은식 선생 '외동딸' 박영애, 왜 역사에서 사라졌나

박은식 증손자·증손녀 "우리 할머니 알려달라... 정부조차 존재 모르는 듯"

등록|2019.02.26 15:50 수정|2019.02.26 15:50
"생활이 어려워 평생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존재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독립운동가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선생(1859~1925, 아래 백암)의 후손들이 백암 슬하에 외동딸이 있었지만, 기록에서조차 사라졌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최근 백암의 증손자와 증손녀가 <오마이뉴스>의 문을 두드렸다. 백암 '외동딸'의 존재를 알려달라는 게 요지였다. 그동안 백암의 후손은 사실상 양아들인 박시창(1903~1986.6)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백암은 1924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하고 대통령을 지낸 독립운동가다. 1925년 3월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탄핵 면직을 계기로 제2대 대통령에 선임, 독립운동을 지도했다. 하지만 그는 1925년 11월 1일, 광복일을 보지 못하고 중국 상해의 한 병원에서 작고했다. 그는 동포들에게 남긴 유언을 통해 '독립운동을 위해 전 민족의 통일'을 당부하기도 했다.

백암은 <한국통사(韓國通史)>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저술한 민족사가 이기도 하다. 또 <황성신문>, 상해 <독립신문>,<한족공보>의 주필, 사장 등을 역임한 민족 언론인이다. 정부는 평생을 조국광복에 헌신한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2급)을 추서했다.
 

▲ 백암 박은식 선생 ⓒ wiki commons


"백암 박은식의 외동딸, 존재 자체가 지워졌다"

국가보훈처의 백암의 공훈록에는 '67세의 생애 중 반생이 넘는 40세 때까지의 성장 과정에 대하여는 알려진 바가 적다'고 쓰고 있다.

잘 알려진 것은 그의 양아들이 박시창(1903~1986.6) 선생이라는 점이다. 박시창 선생은 1943년 8월 광복군 총사령부에 편입, 민족혁명당 후보위원으로 선출됐다. 1945년 8월에는 한국광복군 상해지대장에 임명됐고 1946년 7월 귀국, 국군에 입대, 연대장·사단장·군단장 등을 거쳐 1959년 6월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그는 또 제5대 광복회 회장(1976, 재임 기간 1년)을 역임하기도 했다. 박시창 선생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그의 공훈록에는 '부친 백암 박은식을 따라….'라고 표기돼 있다.

백암의 가족사와 관련해 알려진 또 다른 사람이 박유철 현 광복회장(1938~)이다. 박 광복회장은 박시창 선생의 아들이자 백암의 양손자다. 제4 독립기념관장(1995~2001), 국가보훈처장(2004~2007.3), 단국대학교 이사장, 제19대부터(2011년) 지금까지 광복회장을 맡고 있다. 과거 광복회장은 물론 국가보훈처장과 독립기념관장도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주로 맡아 온 점을 고려하면 백암의 양아들과 그의 자녀들은 충분한 유공자 예우를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백암의 증손자와 증손녀가 백암의 외동딸인 박영애(朴英愛1894~1986)의 이름을 복원해 달라고 나선 것이다.

자신을 백암의 증손녀라고 밝힌 윤복주(54)씨는 "증조부(백암)의 외동딸이 박영애"라며 "내 할머니인 박영애 님은 가난 속에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셨지만, 지금까지 외동딸이라는 사실마저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증조부께서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셨지만, 박영애 할머니를 비롯해 외가 쪽 후손들은 지금까지 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윤 씨는 "양아들인 박시창 선생의 어린 시절을 돌본 사람이 박영애 할머니"라며 "양아들과 그의 자녀들은 독립유공자 혜택을 누려온 반면 친딸과 그의 후손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존재 자체가 지워졌다"고 덧붙였다.

<오마이뉴스> 취재 결과 황해도가 고향인 백암은 차씨 부인과 결혼해 슬하에 5남매를 두었다. 하지만 모두 잃고 막내딸인 박영애 씨만 남았다. 부인마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백암이 독립운동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때라 박영애 씨는 평안남도 중화군에 있는 아버지의 친구 집에서 기거했다. 친구의 아들인 윤철선과 어린 시절 혼인 가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백암은 대를 잇기 위해 박시창을 양아들로 삼았고(1910년), 박영애 씨가 박시창 선생을 한동안 남편 집에서 돌보기도 했다. 이후 백암이 상해에서 운명하자 박영애 씨는 갖은 고생을 하며 스스로 삶을 개척해야 했다. 박영애 씨는 1908년 윤철선과 결혼, 슬하에 1남(사망)을 두었다.

남편인 파평윤씨 족보에도 박영애 씨와 관련 '부 박은식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으로 표기돼 있다. 박영애 씨는 1986년(당시 92세) 사망했다. 하지만 장례식에서조차 정부 관계자는 물론 백암의 아들 측 후손조차 빈소를 찾지 않았다.

현행 독립유공자예우법 등에 따르면 독립유공자 본인은 물론 자녀와 손자녀까지 중·고·대 수업료 등을 면제하거나 감면받고 가점 취업(만점의 10% 또는 5%), 보훈 특별고용, 일반직공무원(과거 기능직공무원) 등 특별채용, 취업수강료, 직업교육 훈련 등 혜택을 주고 있다. 또 생활이 어려운 독립유공자 손자녀는 생활조정수당 또는 생활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백암 선생의 친딸과 손자녀들은 자금까지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했다. 박시창 선생이 받아온 수권 유족 자격을 박유철 회장이 승계했기 때문이다.
 

▲ 백암 박은식 선생의 양아들 박시창 선생이 중국에 거주하며 백암의 외동딸(박영애)보낸 편지. 박영애씨를 '누님'이라 칭하며 고마운 마음과 애틋함을 표현하고 있다. ⓒ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소장


"보훈처로부터 자손 인정 못 받아... 사촌인 광복회장과도 왕래 끊겨"

앞의 윤복주 씨(백암의 증손녀)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비롯해 후손들이 할머니가 증조부의 외동딸임을 알리려고 노력했지만 가로막혔고, 양아들인 박시창 선생과 그의 아드님인 사촌 박유철 님이 챙겨줄 것으로 생각했다"며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어찌 된 일인지 과거 원호처 때부터 여러 차례 얘기했는데도 국가보훈처의 모든 자료와 기록에서 할머니 존재와 이름은 아예 없다"고 지적했다.

양아들 박시창 선생은 백암의 외동딸(박영애)의 존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박시창 선생이 중국에서 거주하며 당시 박영애 씨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누님'이라 칭하며 고마운 마음과 애틋함을 표현하고 있다.

또 1976년 4월에는 원호처(지금의 국가보훈처)에 편지를 보내 "박은식 선생의 여식 박영애가 원호를 못 받고 있으니 도움을 주기 바란다"고 청원하기도 했다.

특히 박유철 광복회장은 '독립유공자 발굴과 보훈 가족에 대한 보상과 예우' 업무를 주로 하는 국가보훈처장을 역임했고, 지난 2011년부터 8년째 '독립 운동가와 그 후손, 유족들의 선양'을 위한 광복회를 이끌고 있다. 주로 독립유공자 자손을 챙기는 일을 해온 그가 자신의 고모와 그 자녀들을 찾지 않은 연유는 무엇일까?

박영애의 손자인 윤완수씨(80, 백암의 증손자)는 "박시창 선생이 계실 때만 해도 두 집안 간 왕래가 있었다"며 "하지만 박시창 선생이 사망하자 그쪽 집안에서 왕래를 끊었다"고 말했다. 이어 1993년 백암 선생의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 현충원 안장식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다"며 "하지만 당시 박유철(현 광복회장)씨 쪽 집안사람들이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박시창 선생만이 유일한 증조부의 혈육이고 다른 사람은 없다'고 하며 박영애 할머니와 그 후손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았고, 실제 이후 연락조차 해 온 적 없다"고 밝혔다.
  

▲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의 표석. 선생의 유해는 1993년 본국으로 봉환되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 장호철


윤씨는 "지금껏 이런 일로 논란이 될 경우 증조부에게 누가 될 것 같아 문제 삼지 않으려 했다"며 "하지만 박유철 광복회장 측이 할머니의 존재를 은폐하는 것처럼 느껴져 이를 지적하고 할머니가 백암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알려 이름이라도 복원시키는 게 증조부를 위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입을 여는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에 대해 박유철 광복회장은 "고모(박영애)와 고모부에 대해 알고 있고 뵌 적도 있다"며 "하지만 언제부턴가 (고모 후손들이) 연락을 해 오지 않아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돌아가신 부모님께서도 고모와 그 후손들에 대해 별다른 말씀은 없었다"고 덧붙였다. '박영애 후손들을 찾을 생각이 있냐'는 물음에는 "어디 계신지 알아봐야 할 것 같다"고 답했다.
 

박유철 광복회장 "고모님 후손들 한국에 계시나?"
 


박유철 광복회장은 백암의 외동딸인 박영애 씨와 그 후손들을 찾지 않은 이유에 대해 "고모님 후손들로부터 연락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아버님(박시창 선생)이 살아 계실 때도 교류가 없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아래는 박유철 광복회장과 나눈 전화 인터뷰 주요 요지다.

-백암의 외동딸이 박영애 님이다. 알고 계시는지?
"고모님이다. 고모부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많이는 모른다. 어려서 뵌 것이라…. 존함도 말씀해주니까 알겠다."

-부친인 박시창 선생님 때까지만 해도 고모(박영애)와 그 후손과 왕래가 잦았던 것으로 들었다
"저는 미국에 가서 공부하느라 자주 뵙지는 못했다. 그분 후손들이 한국에 계시나?"

-미국에서 언제 한국으로 왔나?
"1974년 왔다. 벌써 40여 년이 지났다"

-고모인 박영애 님은 1986년 작고하셨는데?
"아버님께서 살아 계실 때도 교류가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박영애 씨는 매우 어렵게 살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동안 왜 고모와 그 후손들을 왜 찾지 않았나?
"교류가 없어 잘 몰랐다. 부모님께서도 고모님과 그 후손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씀이 없었다."

-고모의 유족들을 찾아볼 생각인가?
"고모님 쪽 후손들이 내가 귀국한 지 40여 년이 됐지만 일절 연락이 없었다. 어디 계신지 알아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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