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상처'로 가까워진 여왕과 하녀, '더 페이버릿' 상징의 의미

[리뷰] 개성파 감독이 대중에 다가서는 법,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등록|2019.03.05 13:53 수정|2019.03.05 13:53
 

▲ <더 페이버릿> 포스터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커리어를 생각할 때 예상외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2009년 <송곳니>로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시선' 대상 수상 후 할리우드의 주목을 받게 된 그는 영어권 시장의 진출과 할리우드 배우들의 기용에도 불구 여전히 어둡고 난해한 본인의 스타일을 고수하였다. 그런 그가 18세기 영국 왕실을 배경으로 여왕을 둘러싼 두 여성의 권력 암투를 그린다고 했을 때 과연 이 소재가 그의 스타일에 어떻게 접목될지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18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14세기부터 이어진 스튜어트 왕가 최후의 여왕인 앤 여왕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녀에게는 어린 시절을 함께한 오랜 친구이자 권력 실세인 사라가 있다.

사라는 감정에 충실하고, 사랑을 갈구하며, 히스테릭한 앤을 대신해 사실상 국정을 총괄하는 실세다. 앤은 사라에게 사랑과 관심을 요구하며 사라는 때론 어머니처럼 인자하게 때론 선생님처럼 엄격하게 앤을 통제한다. 이 사랑과 통제의 균형은 앤의 사촌인 애비게일에 의해 균열을 일으키게 된다.

상처와 거위가 의미하는 것
 

▲ <더 페이버릿> 스틸컷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몰락양반 출신의 앤은 사촌인 사라의 덕 좀 보기 위해 왕실을 향하나 사라는 멍청하게 가문을 몰락시킨 애비게일의 아버지를 비웃고 그녀에게 부엌일을 맡긴다. 신분상승의 욕구를 지닌 애비게일은 앤에게 접근하고 당시 야당이던 토리당은 사라의 남편 말러버가 중심이 된 휘그당을 견제하기 위해 애비게일에게 힘을 실어준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이 작품을 통해 처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과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는 점만 보아도 얼마나 대중에게 가까워졌는지 알 수 있는 영화이다.

대중이 쉽게 접근하고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왕실 암투극을 복잡하지 않게 풀어내며 각각의 캐릭터의 특징과 욕망을 향한 근원적인 동력을 보여준다. 여기에 <더 랍스터>가 보여주었던 난해함, <킬링 디어>가 보여주었던 어두움 같은 대중들이 거리감을 느낄 요소들을 최대한 줄이면서 좀 더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동시에 본인의 스타일이라 할 수 있는 은유적인 상징과 안개처럼 깔려 있는 암울함을 통해 여전한 자신만의 매력을 선보인다.

영화는 작품 속에서 크게 3가지를 통해 은유적인 상징을 보여준다. 첫 번째는 상처이다. 앤과 사라, 애비게일은 셋 다 표면적인 상처를 지니고 있고 이 상처는 그들의 행위에 영향을 준다. 애비게일은 왕실에서 하녀로 일하던 중 바닥청소를 하다 화상을 입게 된다. 아무도 그녀에게 바닥을 닦는 물이 화상을 입을 수 있는 양잿물이라 말해주지 않았고 장갑을 끼지 않은 그녀는 손에 화상을 입는다. 손은 인간 행위의 대부분을 수행하는 신체기관이다. 밥을 먹을 때도, 글을 쓸 때도, 물건을 잡을 때도 손을 사용한다. 이런 손의 상처는 애비게일로 하여금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 <더 페이버릿> 스틸컷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자신이 원하는 무엇도 이루지 못한 채 무시당하는 하녀로 평생 살아갈 수 있다는 불안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앤은 다리에 상처를 지니고 있다. 거동이 불편한 앤 여왕에게 통증을 주는 다리의 상처는 왕실 업무 하나 자신의 의사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현실을 더욱 강하게 인식시켜준다. 앤은 상대를 누르고 싶은 권력욕과 상처 받기 싫은 소녀 같은 면모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녀는 여왕이지만 왕실 업무를 스스로 결정하고 처리하기 싫어하며 사라에게 의존한다. 그녀는 여왕이라는 중요한 위치에서 자신의 '다리'로 걷지 못한다(혹은 않는다).

애비게일과 앤은 이 상처를 통해 만나게 된다. 애비게일이 자신의 상처에 바르던 약초를 앤에게 발라주면서 둘 사이의 인연은 피어난다. 반면 사라의 상처는 앤과의 사이에서 균열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된다. 사라는 애비게일의 계략으로 얼굴에 큰 상처를 입고 이 상처는 앤이 사라를 거부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어린아이가 예쁜 꽃은 좋아하지만 징그러운 두꺼비는 멀리하듯 마치 아이 같은 앤은 복잡한 내면의 심리보다 외형적인 이유로 사라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거위이다. 거위 경주를 즐기는 귀족들은 거위에게 끈을 묶어 데리고 다닌다. 총리인 고돌핀은 가장 빠른 거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들의 모습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왕국 밖 현실에 있다. 영국은 프랑스와 전쟁 중이며 그 비용을 위해 토지세를 올리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 처해 있다. 한마디로 백성들은 전쟁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데 귀족들은 자신들의 유희를 즐기고 있다. 토마토를 특정 남성에게 던지며 즐기는 장면이나 짙게 화장한 남자 의원들의 모습은 백성과 나라가 아닌 오직 유희와 권력만을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인다.

거위는 이런 귀족들의 모순을 보여준다. 거위 경주를 시키며 유희를 즐기는 모습과 함께 거위를 던져 총으로 쏘는 사냥을 통해 말이다. 이 사냥은 생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강한 권력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애비게일이 총을 쏴서 거위를 맞췄을 때, 그 피가 사라에게 튀는 장면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장면을 통해 애비게일이 사라의 권력에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입으로는 백성과 국가를 말하지만 자신들의 권력과 유희에만 몰두하는 귀족들의 모순된 모습을 영화는 거위를 통해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권력욕
 

▲ <더 페이버릿> 스틸컷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세 번째는 토끼이다. 앤의 방에 있는 15마리의 토끼는 그녀가 유산한 아이들을 의미한다. 앤은 토끼 한 마리, 한 마리에 이름을 붙여주고 마치 아이처럼 기른다. 토끼가 가진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번식력이다. 앤은 후계자를 낳지 못하면서 스튜어트 왕조를 그녀의 대에서 끝내게 되었다. 토끼는 자식을 잃으며 후대를 이어가지 못한 앤의 아쉬움과 절망감, 그로 인해 권력의 세습에 실패한 마지막 왕이라는 부담을 기형적인 형태로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토끼는 사라가 권력을 쥐었을 때는 우리에 갇혀 있다. 헌데 그 권력의 중추가 애비게일로 넘어간 순간 우리 밖으로 나와 방 안을 돌아다닌다.

이 순간 영화는 앤과 사라, 앤과 애비게일 사이의 권력 구조를 조명한다. 앤과 사라 사이에는 끈끈한 유대감이라는 게 있었다. 둘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고 사라는 앤을 조종하는 법을 안다. 두 사람은 왕과 귀족의 관계이지만 같은 추억과 업무를 공유하기에 동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애비게일은 다르다. 그녀의 권력은 아슬아슬하다. 귀족 출신이긴 하지만 몰락귀족 출신이며 엄연히 앤의 하인으로 일하고 있다. 또 하층민의 삶을 경험하면서 몸에 새겨진 저급한 생각과 행동들이 완벽한 유대감을 방해한다.

방 안을 돌아다니는 토끼들의 모습은 고전영화 <이브의 모든 것>의 결말부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브는 마고를 이용해 최고의 여배우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그 자리에 오른 이브는 자신이 그랬던 거처럼 수많은 신인 여배우들이 자신의 왕좌를 노릴 것이라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낀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바라보는 거울 속 수많은 이브의 모습들은 불완전한 권력과 이를 노리는 세력들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한다. 방 안을 돌아다니는 토끼들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사라는 권력을 통제하고 지킬 수 있었다. 토끼들을 우리에서 나오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애비게일은 그럴 수 없다. 우리를 나온 토끼들은 자유자재로 번식할 수 있다. 그 번식은 곧 권력의 재생산을 의미한다. 애비게일은 이 치고 올라오는 권력들을 사라처럼 통제하기 힘들 것이란 걸 알고 있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 또 그녀의 자리로 치고 올라올 것이란 걸 실감한다. 토끼는 앤에게는 자신의 대에서 끊기게 된 왕조와 가정을 이뤄내지 못했다는 고통의 의미를 담아내지만 애비게일에게는 치고 올라오는 권력욕의 번식과 불안정한 자신의 현재를 상징한다 할 수 있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개성 강한 감독이 대중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모범적으로 보여준 영화라 할 수 있다. 이야기의 선을 더 진하게 만들고 갈등은 강하게 부각시키면서 암울하고 우울한 분위기는 긴장감을 유지할 만큼 줄이고 은유와 상징은 내용 이해에 방해가 안 될 만큼 축소해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이번 영화를 통해 씨네필들의 마음은 물론 대중들의 마음마저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준모 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 키노라이츠, 루나글로벌스타에도 실립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