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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재심 결정, 진실 규명과 현대사 바로서는 계기 되길

등록|2019.03.25 09:28 수정|2019.03.25 09:28
지난 3월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1948년 10월 발생한 여순사건에 대한 재심 결정을 확정했다. 70여 년만에 한국 현대사의 가장 참혹한 사건으로 불리웠던 여순사건이 다시 소환된 것이다.

보도된 바에 따르면, 1948년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사형 당한 장모씨 등 3명의 유족이 2013년 법원에 청구한 재심 요청에 대해 대법원 전원합의체 재판부는 "당시 군·경이 적법한 절차 없이 민간에 대한 체포·감금이 무차별적으로 이뤄졌음을 알수 있고 이를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도 이에 부합한다"며 "원심의 재심개시 결정에 관련 법령을 위반한 잘못이 없다"고 판단했다.

앞서 1심인 광주지법 순천지원은 "당시 판결문에 구체적인 범죄사실의 내용과 증거 요지가 기재되지 않았고, 순천탈환 후 불과 22일 만에 사형이 선고돼 곧바로 집행된 점 등에 비춰보면 장씨 등은 법원이 발부한 영장이 없이 체포·구속됐다고 봄이 상당하다"며 재심청구를 받아들였으며 이어 2심인 광주고법도 "불법으로 체포·구속됐다"며 1심의 재심 결정이 옳다고 판단한 바 있다.

주지하다시피,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제주도에서 이승만 정부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해 일어난 항거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여수 주둔 14연대 군인들이 거부하자 이에 여수·순천 등지의 민중들이 결합하며 발생한 사건이다. 사건 발생 후 이승만 정부와 국방부는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진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무수한 민간인을 학살했다.

사건 발생 1년 후 당시 전라남도 당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은 1만1131명에 이르며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학살된 사람들까지 합치면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 활동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화위)'는 보고서를 통해 여순사건 토벌과정에서 민간인 희생이 전라남북도, 경남 등 37개 지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발생했으며 진화위에 신청된 민간인 죽음과 관련한 사안 7533건 중 832건을 여순사건에 의한 것으로 분류한 바 있으나 여전히 전체 희생규모는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다.

민간인 희생자 규모조차 파악되지 못한 현대사의 비극

여순사건 과정에서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무고한 민간인 희생의 진상규명과 더불어 당시 제주도민에 대한 무력진압을 거부한 여수 주둔 14연대 군인들의 행동도 재평가되어야 한다.

1948년 10월 11일 당시 국방부는 제주 4·3 항쟁을 토벌하기 위해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며 군대를 동원한 제주도민에 대한 무력 진압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출동명령을 받은 14연대의 군인들은 어떤 선택을 했어야 했을까?

국민을 진압하고 학살하라는 명령을 수행하거나 거부하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에서 그들은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며 국가권력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국방부는 여전히 이 사건을 '반란'으로 규정하고 있고 보수 일각에서 남로당에 의한 발생한 사건이라 주장하나 이 역시 학계에선 논란 중인 사안이다. 여순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의 과정에서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더불어 재검토되고 다시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여순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재심 결정으로 한국 현대사의 70여년 전 아픈 역사가 다시 소환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국민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재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국가의 의무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여순사건의 진실이 규명되고 한국군의 역사에 대한 평가와 반성이 이루어져야 하며 우리 현대사가 바로 서는 과정이 수반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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