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재판... 검사, 변호사, 간수의 기묘한 관계
[도쿄옥탑방일기-제19화] 안중근 서거일... 일본 고치현과 한국의 인연
▲ 일본 고치현의 일본인들이 지난해 11월 1일 고치 시내에 있는 '한국 고아의 어머니' 윤학자(다우치 치즈코) 여사 추모비 앞에서 헌화하고 그의 업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김경년
일본 본토를 구성하는 주요 섬 가운데 가장 작은 시코쿠에 있는 고치(高知)현. 고치현은 예로부터 도사번(土佐藩)으로 불려왔으며,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인물이라는 사카모토 료마가 태어난 곳이다. 공항 이름부터 '료마공항'인데다 주요 거리나 관광지, 호텔 현관 등에는 어김없이 료마의 동상이나 그림이 세워져 있다.
그런 고치현이 의외로 한국과 매우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다우치 치즈코(한국명 윤학자)가 1968년 사망하자 목포시는 목포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러 애도했고, 그의 고향인 고치에서는 1997년 이곳에 목포에서 가져온 돌로 추모비를 세우고 매년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
▲ 일본 고치현 고치시내에 위치한 '한국 고아의 어머니' 윤학자(다우치 치즈코) 여사 추모비. ⓒ 김경년
인구 60만 작은 시골에 이런 우연이...
또한 고치는 안중근 의사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뤼순 감옥에 수감돼 재판을 받고 있을 때 그를 조사한 검찰관이 두 명 있었는데 모두 고치 출신이다. 관선 변호인 역시 두 명인데 그 중 한 명은 고치 출신이고 다른 한 명은 돗토리현 출신이지만 나중에 고치로 본적을 바꾸고 시의회 의장까지 지냈으니 사실상 고치 출신이다. 당시 뤼순고등법원장도 고치 출신이다.
[일본어기사] 安重根裁判と高知の奇妙な因み
안중근의 수감생활을 감시하다가 '언충신행독경만방가행(言忠信行篤敬蠻邦可行)'이란 유묵을 받아온 간수도 고치 출신이다. 심지어 그의 재판과정을 취재하고 재판정 모습을 스케치한 기자까지 고치 출신이었다.
총리를 지낸 김황식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은 지난해 9월 직접 고치에 가서 강연을 하고 유품을 기증한 후손들에게 사의를 표하기도 했다. 도쿄에서 비행기로 2시간을 타고 가야 하는 당시 인구 60만 명 정도의 작은 시골 고치현에서 안중근 재판과 관련된 인물이 어찌 이리 많이 나올 수 있었을까.
고치의 향토사학자 구몬 고(公文豪.70)씨를 만나 이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구몬씨는 고치현 의원을 지내기도 했으며 메이지시대의 자유민권운동과 고치현 역사에 매우 밝은 인물이다. 특히, 안중근 재판과 관련 있는 사람들의 후손들을 설득해 그들이 보관하고 있는 안 의사 관련 유품들을 서울의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기증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구몬씨는 "고치에 안 의사 재판과 관련된 인물들이 많은 것은 당시 조슈번과 사쓰마번 출신들이 장악한 중앙 정치와 법조계에 회의를 느낀 도사번 출신들이 대륙으로 많이 건너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안 의사에 대해서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한 행동이었으므로 한국인들이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이혜균 안중근의사기념관 사무국장은 "구몬씨는 고치에서 발견된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나 재판 스케치 등을 한국에 기증하는 데 다리를 놓아준 고마운 분"이라며 "고치는 한국과의 인연이 깊은 곳인만큼 한일 관계 개선과 안중근 기념사업을 위해 앞으로도 교류를 더욱 활성화해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작년 11월 1일 다우치 치즈코 여사의 추모비 건립 22주년 기념식 취재차 고치에 방문했을 때 구몬씨와 인터뷰를 했다. 26일 안중근 의사 서거일을 맞아 인터뷰 내용을 싣는다.
▲ 일본 고치시의 향토사학가 구몬 고씨가 안중근 의사가 뤼순에서 재판을 받을 당시 인연을 맺었던 고치 출신 인사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오른쪽은 역시 안중근 의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니시모리 시오조 전 고치현의회 의장. ⓒ 김경년
사쓰마-조슈 출신들에게 밀려난 도사의 젊은이들
-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의거 후 뤼순감옥에 수감됐을 당시 그와 관계된 많은 일본인들이 고치 출신이다. 무슨 이유인가.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우연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도사번(지금의 고치현)은 법학교육이 활발했고 많은 젊은이들이 법조계로 진출했다. 그 사람들이 당시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중국의 다롄과 뤼순 등으로 많이 건너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왜 중국으로 건너갔나.
"도쿠가와 막부를 쓰러뜨리고 메이지정부를 세운 중심세력은 사쓰마번(지금의 가고시마현)과 조슈번(야마구치현) 출신이었다. 이후 일본의 정치계는 그들이 중심적으로 이끌어갔다. 관료나 경찰도 그곳 출신들이 많이 채용됐다. 자기 고향사람들만 데려간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들과 같이 메이지유신에서 큰 역할을 했으면서도 정한론 등에서 대립해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도사번(고치현) 출신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자유민권운동(메이지유신 이후 1870년대 정부의 전제적이고 독단적인 개혁에 반대하여 도사번 인사들이 의회개설, 헌법제정 등을 요구하며 일으킨 정치·사회운동... 기자 주)을 벌인다. 법조계도 마찬가지여서 밀려난 일부 도사번 출신 인사들이 러일전쟁 후 일본이 점령한 다롄과 뤼순으로 옮겨간 것이다."
- 도사번에서 법률 교육이 활발했던 이유는 뭔가.
"당시 도사에는 자유민권운동의 중심 단체인 '리시샤(立志社)'라고 하는 법률연구소가 있었다. 리시샤는 서민들의 법률 문제 해결을 위한 자문이나 변호를 해주면서, 법률을 공부하기 위한 사람들을 위한 교육도 했다. 그런 영향이 있어서 메이지 초기시대에 법학교육이 활발했던 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법을 공부하게 됐고 이 사람들이 결국 20-30년 후에 판사, 검찰관, 변호사 등으로 중앙에서도 활약하게 된다. 그런데 법조계에서도 사쓰마, 조슈가 영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반발한 고치 출신들이 대륙으로 건너가게 된 것이다."
- 지금도 그런 전통이 여전한가.
"지금은 그렇지 않다. 고치에 대학이 있지만 법학부는 없다. 그렇지만 지금부터 140여 년 전에는 법학교육의 기초를 만들기 위한 사립학교가 몇 개나 있었다. 거기서 공부한 사람들이 중앙으로 진출해 법조인은 물론 대정치가가 됐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들이 대륙에 가서 안중근 재판에 관계하게 된 것이다."
▲ 안중근을 신문한 검찰관 미조부치 다카오 ⓒ 눈빛<대한국인 안중근>
"한일 양국을 대표한 안중근과 검찰관, 미움은 없었다"
- 안중근을 조사한 검찰관이 두 명 있는데, 그 중에서도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 검찰관(검사)이 안중근을 가장 조사를 많이 한 것 같다.
"학교는 어디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고치 출신이 맞다. 아마 처음부터 뤼순에서 검찰관을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사건이 터지자 하얼빈에 가서 안중근을 조사했다. 뤼순에 와서는 정식재판 이전에 예심이 있었는데 그 조사를 전부 그가 했다. 그 조사를 담당한 미조부치는 안중근에 대한 미움이 전혀 없었다. 안중근은 한국 민족을 대표해서 이토를 쏜 것이잖나. 한국의 독립을 위해, 한국을 구하기 위해. 미조부치는 단지 일본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그를 조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뿐이다.
심문조서를 읽어 보면 안중근은 한국을 대표해서, 미조부치는 일본을 대표해서 두 사람의 의견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경우도 있었다. 두 사람은 나라를 대표하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최종적으로 미조부치는 안중근에게 사형을 구형했지만 안중근도 미조부치의 입장을 이해했다. 그래서 미조부치에게 유묵을 써보냈지만, 아쉽게도 현재 남아 있지는 않다."
- 검찰관이 한 사람 더 있다.
"맞다. 이 때 검찰관이 두 명이었는데 재판 도중에 다른 한 사람이 이동하게 됐다. 그래서 오게 된 사람이 야스오카 세이시로(安岡靜四郞)다. 이 사람 역시 고치 출신이고 둘은 서로 친척관계였다. 야스오카는 나중에 가족들에게 미조부치가 자신을 뤼순으로 불러온 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야스오카는 안중근의 조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재판소의 직원들로부터 돈을 거두어 음식과 속옷을 사서 넣어줬다. 매우 추운 곳이니까. 안중근을 사형에 처하라는 외무성의 지시가 뤼순고등법원장인 히라이시 우지토(平石氏人)에게 전달돼 법원 내부에서는 지방법원의 독립을 지켜야 한다는 직원들의 반발이 높았다고 한다. 안중근은 야스오카에게 이름이 들어간 유묵을 써서 보내줬다."
- 유묵에 이름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는 것 같다.
"그렇다. 이름이 없는 것이 많지만 실제 재판에 관여했던 미조부치 검찰관이나 차입품을 넣어준 야스오카 검찰관, 그리고 통역관에게는 이름이 들어간 유묵을 써서 보냈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200장 이상의 유묵을 썼는데 실제 발견된 것은 60여 장 정도다."
▲ 안중근 의사의 국선변호인이었던 미즈노 기치다로 변호사의 추모비가 그의 고향마을 앞에 서있다. ⓒ 안중근의사기념관 제공
안중근 재판정 모습 유일하게 그린 기자도 고치 출신
- 안중근을 담당한 관선변호인도 두 명이 있었다. 그 중 미즈노 기치타로(水野吉太郞)는 처음엔 안중근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는데 나중엔 구명운동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청년기엔 고치에서 자유민권운동을 했는데, 법률공부에 마음을 두고 도쿄에 가서 지금의 호세이대학에서 공부해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미즈노는 고치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한 뒤 홋카이도의 호타루를 거쳐 다롄으로 건너간다. 거기서 변호사를 하다가 이 사건의 변호인으로 뽑히게 된다. 다른 변호사는 카마타 마사하루(鎌田正治)다. 그는 원래 돗토리현 출신이었으나 재판중에 미즈노 변호사와 사이가 아주 좋아져 재판 후 같이 고치에 와서 사무실을 개설했다. 그리고 그는 현의원을 거쳐 현의회 의장까지 지냈다."
▲ 안중근 의사의 뤼순감옥 시절 국선변호인를 지냈던 카마타 마사하루의 사진이 고치시청에 걸려있다. 그는 후에 고치현의회 27대 의장을 지냈다. ⓒ 김경년
- 뤼순감옥의 간수로는 미야기현 출신으로 안 의사가 사형당하기 전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군인본분)이란 유묵을 받은 치바 도시치가 유명하지만, 고치현 출신 간수도 있었다고 하던데...
"야기 마사노리(八木正禮)라는 경찰관인데, 치바보다 계급이 높은 경부(경위) 출신이다. 이 사람은 처음 타이완총독부에서 순사를 하다가 이토 암살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뤼순을 관할하는 관동도독부로 이동하게 된다. 사건 후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경비 관련 일을 하지 않았을까. 안 의사가 사형 당하기 전에 써준 '언충신행독경만방가행(言忠信行篤敬蠻邦可行·말이 성실하고 신의가 있으며 행실이 돈독하고 경건하면 오랑캐 나라에서도 이를 따른다)'는 유묵을 그의 후손이 한국에 기증했다."
▲ 고마츠 모토코 기자의 안중근 재판 모습 스케치. 왼쪽부터 안중근을 지지하는 방청객들을 제지하는 일본 헌병들, 재판받는 안중근의 뒷모습, 한인 변호사들, 방청석의 취재진들. 고마츠의 후손이 지난 2016년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기증한 것이다. ⓒ 안중근의사기념관 제공
- 놀랍게도 안중근 재판을 취재한 기자도 고치 출신이라고 들었다.
"고마츠 모토코(小松元吾)란 사람인데, 화가이면서 고치 지역신문인 도요신문(土陽新聞)의 기자였다. 도요신문은 지금의 고치신문 전신으로 자유민권운동과도 큰 관련이 있다. 고마츠는 미즈노 변호사와 아이 때부터 친구였다고 한다. 안중근 사건 때문에 뤼순에 간 것은 아니고 가 있는 동안 우연히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재판정을 사진으로 찍을 수 없어서 마침 화가이기도 한 그가 당시 재판 모습을 그렸는데, 안중근 재판이 그림으로 보도된 것은 이 신문뿐이었다. 아사히신문 같은 큰 신문도 기사로 보도는 했지만 그림은 없다. 그의 후손이 가지고 있던 '志士仁人殺身成仁(지사인인살신성인)' 유묵과 방청권, 그리고 재판정 스케치는 2016년 서울 남산에 있는 안중근기념관에 기증됐다."
- 그 외 또 다른 고치 사람은.
"당시 히라이시 우지토(平石氏人) 뤼순고등법원장도 고치 출신이다. 그는 뤼순의 고치현인회(高知県人会)의 회장을 지내고, 나중에 뤼순 시장이 되기도 한다."
- 언제부터 안중근 연구를 해왔나.
"30년 전 지역 역사연구회에서 공부를 하며 안중근을 알게 됐다."
▲ "한국인들이 안중근을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는 구몬씨. ⓒ 김경년
"나라 위해 목숨 건 행동... '구국의 영웅' 당연하다"
- 안중근은 어떤 사람인가.
"당시 재판에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입을 맞춰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그를 일본의 초대 총리를 죽인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하지만 그를 만난 사람들은 멋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 당신의 의견은.
"당시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지구상에서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일본은 기회만 있으면 한국을 병합하려고 했다. 나라가 소멸하려던 때 목숨을 걸고 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 같은 입장이었으면 일본인들도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벌인 행동을 단순한 테러리스트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여러분들이 구국의 영웅으로서 칭송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 안중근 때문에 한일강제병합이 앞당겨졌다고 하는 주장도 있는데.
"당시의 일본 정부 자료를 보면, 암살 1년여 전에 이미 각의에서 기회가 있으면 병합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안중근 사건이 병합을 일으켰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강화도사건부터 시작해서 경부선철도부설, 청일·러일전쟁을 지나 차례차례 외교권을 빼앗아간다. 급기야 이토가 통감부를 세워 외교권뿐 아니라 내정까지도 간섭해 일본의 양해가 없으면 한국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상태를 만들어놨으니 반식민지 상태였고 병합은 시간문제였다. 그런 흐름 속에서 안중근 사건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 당시 안중근은 불과 31살의 젊은 나이였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러게 말이다. 대단하다. 그런데 당시엔 일본도 그랬다. 메이지유신을 이뤄간 사람들은 전부 20-30대였다. 료마처럼. 요즘도 한국은 젊은이들이 열심히 시위를 하지 않나."
- 지금 일본의 젊은이들은 어떤가.
"최근 서울에 갔다가 시청 앞 호텔에 묵었는데 한쪽에선 젊은이들이 촛불시위를 하고 한쪽에선 노인들이 태극기시위를 하더라. 어찌됐든 사람들이 국가와 정치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말 아닌가. 한국과 일본은 에너지가 다르다. 일본은 무기력, 무관심, 무감동 사회다. 일본 젊은이들은 힘이 없는 것 같아 우려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필자는 한국언론진흥재단 후원으로 도쿄 게이오대학에서 1년간 방문연구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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