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도 못 갔지만 일류 호텔 입성... 퇴직 후 그가 간 곳은
쉐라톤 워커힐 출신의 차영일, 그의 인생 3막
영화 '해피 해피 브레드', 미시마 유키코가 감독을 맡았던 2012년 개봉작이다. 일본 홋카이도에 있는 아름다운 도야코 호수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극중에서, 도시생활을 접고 이곳에 카페 '마니'를 연 젊은 부부 리에와 미즈시마는 맛난 빵과 요리를 통해 손님과 이웃에게 행복을 전하고자 한다.
어느 날, 학교에 가지 않고 카페 '마니'의 맞은 편 버스정거장에 홀로앉아 있는 초등학생 스에하사가 리에와 미즈시마의 눈에 띈다. 스에하사는 아빠와 헤어지고 집에서 나간 엄마를 그리워하는 소녀다. 엄마가 해줬던 호박스프를 특히 못 잊어하며 아픔 속에서 방황하는 아이를 부부는 따뜻하게 돌봐준다. 우유를 데워주고 호박 스프를 만들어주고 맛난 빵을 정성스레 빚어준다.
스에하사는 빵의 온기, 스프의 따뜻함에 힘을 얻어 상처를 이겨내고 아빠와 화해한다. 그렇게 '해피 해피 브레드'에서는 '따뜻한 빵'으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차영일, 그는 지금 인천 월미산 아래 '꿈베이커리'에서 빵을 굽고 있다. 또 젊은 청년들에게 '빵 만드는 노하우'를 전하고 있다.
그가 제빵 책임자로 있는 '꿈베이커리'는 2016년 이창호·강현식·이성인 등 지역의 치과의사와 약사들이 조금씩 힘을 보태 만든 빵집이자 기부단체다. 지역아동센터에 맛있고 건강한 빵을 보내주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조직이다. 이들이 뜻을 모으게 된 계기는 지역아동센터에 전달되는 빵들이 유통기한이 임박하거나, 너무 당분이 많은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차영일은 이들의 뜻에 공감하면서 제빵 책임자로 기꺼이 합류했다. 2016년 당시 정년 퇴직 상태였던 그는 빵과 함께 한 50년 인생의 마지막을 보람되게 장식하고 싶은 맘으로 참여했다.
52년생 차영일은 지금 예순여덟의 나이다. 정읍 출신으로 8남매의 넷째로 태어난 그는 16살 되는 해 형과 함께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돈을 벌어 가난한 집에 보탬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렇지만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그에게 서울은 결코 살갑지 않았다. 겨우 터 잡은 곳이 장충동에 있는 '중앙공무원교육원'의 구내식당이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급여 없이 일하는 조건이었다. 거기서 3개월을 보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집에 돈을 보낼 수 없어 그는 식당, 이발소 등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종로뉴욕제과에 들어갔다. 종로 2가 고려당과 이웃하며 자리했던, 당시로서는 제법 큰 제과점이었다. 그곳에 '시다'로 들어갔고, 첫 월급으로 500원을 받았다.
1963년도에 삼립식품에서 나온 '크림빵'은 큰 인기를 끌었다. 국민들의 허기를 달래줬던 그 빵이 당시 10원이었다. '크림빵' 50개를 사먹을 수 있는 정도 돈을 받고 시작한 빵 인생의 서막이었다.
기술이 없던 그는 보조에서 시작했다. 청소하고, 선배들 앞치마 빨고, 동작 늦으면 두드려맞고, 연탄 오븐에 불피우고... 그러다 피곤하면 밀가루 포대에서 눈을 붙이곤 했다. 휴일이라곤 한 달에 두 번 남짓, 쉬는 날엔 50원을 받아 목욕하고 극장 구경가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얼마 전 '파리바케뜨'의 불법파견이 이슈가 되면서 제빵 노동자들의 고단한 상황이 화제가 됐었다. 그게 2018년의 일이다. 그런데 제빵 노동자들의 어려운 노동 실태는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우리나라만의 일도 아니다.
1871년 파리 꼬뮨에서도 주요한 슬로건이 "제빵 노동자들의 야간노동 철폐"였었다. 미국에서도 그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1884년, 오리건주의 세인트헬렌스 제빵노동조합 조합가에서는 "지하에서 꼬박 18시간, 노역 속에 빵을 만드네. 공기도 빛도 소리도 차단된 채 우리는 과연 산 목숨인가 죽은 목숨인가?"라고 처연했던 상황을 묘사했다.
우리나라 60년대가 이보다는 나았을까? 어쨌거나 차영일은 바로 이런 조건에서 앳된 소년 노동자로 빵을 배우기 시작했다.
차영일의 하루 일과는 제법 바쁘다. 꿈베이커리가 인천지역아동센터와 그룹홈 등 48개 기관에 간식으로 보내는 빵은 하루 평균 500개 이상이다. 또 빵의 종류도 단팥빵, 머핀, 마들렌, 쿠키 등 15가지에 이른다.
그의 업무는 반죽으로 시작한다.
정성껏 재료를 섞고 밀어펴면서 치대는 그의 손길은 부드럽다.
들어올렸다 다시 치대는 그의 손놀림은 또 힘이 있다.
옆으로 접고 또 옆으로 접는 그의 손동작은 우아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반죽이 마무리되면 예쁘게 둥굴려 성형을 한다.
50년 세월의 깊은 내공이 묻어나온다.
이런 경지(?)에 오르는 데는 '쉐라톤 워커힐' 제과제빵에서 닦은 33년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차영일은 종로뉴욕제과를 시작으로 여러 동네 빵집들을 전전하며 경력자가 된다. 하지만 모두 어깨너머 배운 기능이어서 이론은 없었다. 그 갈증을 풀어준 곳이 바로 대방동에 있는 제과학교였다. 1972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생긴 제과제빵 교육기관이다. 3기로 입학한 그는 거기서 처음으로 재료과학을 공부하면서 밀가루, 설탕의 특성들을 배웠고 빵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선배의 소개로 76년에 쉐라톤 호텔 제과제빵부서에 입사했다. 당시 직원이 4명일 정도로 규모도 작았고 알음알음으로 취직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78년 쉐라톤 호텔이 워커힐과 체인 협약을 하게 되면서 상황이 변한다. 세계 수준의 호텔답게 지배인·주방장 및 식당별 쉐프가 들어섰고, 이때 제과제빵도 10여 명으로 늘어나면서 그의 빵 인생도 꽃이 핀다.
무엇보다 제과제빵 쉐프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들어와 많은 기예를 배울 수 있었다. 초대 쉐프 프랑스인 퐁스로부터는 케이크 류를 배웠다. 독일 사람에게는 유럽빵과 바케트를, 스위스인에게는 초콜릿을, 일본인으로부터는 섬세한 잔재주를 익힐 수 있었다.
당시 그를 괴롭힌 것은 초등학교 졸업뿐이라는 학력이었다. 외국 쉐프와 말이 통하지 않아 더 많이 배우지 못하는 답답함이 컸다. 그래서 그는 퇴근 후면 카세트 테이프를 안고 살며 영어 회화를 익히고 손짓 발짓을 써서 그들의 선진(?)기술을 익혀나갔다.
그렇게 해서 2009년 정년 퇴직하기까지 33년 동안 전 세계의 많은 빵 기술을 접하고 익힐 수 있었다. 나중에는 부임하는 쉐프마다 차영일에게 자문을 구할 정도로 '쉐라톤 워커힐'의 명장 아닌 명장이 되었다.
이런 경력의 그이지만 빵을 구울 땐 늘 정성을 쏟고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빵 인생 50년 동안 그는 "레시피는 전할 수 있지만 노하우는 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스스로를 벼리고 또 벼려야 장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꿈 베이커리에서 빵을 배우는 젊은 청년들에게도 그가 늘 강조하는 대목이다.
반죽이 끝난 빵을 예쁘게 동굴리고 모양을 만들어 오븐에 넣으면 차영일은 더욱 긴장한다. 빵은 시간과 온도, 효모의 달콤한 마술이라고 했다. 어쨌거나 마지막은 오븐에서 완성되는 것이기에 색이 잘 나오고 있는지, 진한 부분은 없는지, 트레이를 골고루 돌려주며 그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예전에는 고객을 위해, 손님을 위해 만들었던 빵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해피 해피 브레드'의 리에와 미즈시마가 따뜻한 빵으로 어린 소녀 스에하사의 상처를 위로했듯,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의 희망을 위해 빵을 굽는다. 그렇기에 한번 더 손길을 주고 더욱 정성을 기울인다.
'해피 해피 브레드'의 후반부에선 이야기 하나가 또 펼쳐진다.
일생 동안 동네 목욕탕을 하면서 살았던 사카모토 노부부. 부인이 아프고 삶에 대한 의욕을 잃게 되면서 젊은 날 사랑을 약속했던 이곳에 자살을 결심하고 눈보라치는 겨울날 찾아온다.
그런데 리에가 내온 따뜻한 솥단지 밥 한 그릇, 그리고 정성스레 빚어 따뜻한 온기가 숨쉬는 팥빵을 먹으며 부인은 생각을 바꾼다. 내일 일어나서도 이 맛있는 팥빵을 먹고 싶다고...
차영일의 일과는 늦은 오후면 마무리된다.
이제는 육십 후반에 이르러 체력이 젊을 때와 다르다. 평생을 서서 일한 직업, 몸마디가 쑤실 때가 많다. 오븐 열기에 데인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렇지만 사랑했던 일이다.
정년 퇴직했을 때 '쉐라톤 워커힐 제과제빵장' 이름을 내걸고 창업을 할까 고민도 했었다. 이런 저런 스카우트 제의도 많았다. 모두 마다하고 방송통신대에서 4년을 공부했고, 2012년 환갑이 넘은 나이에 졸업장을 받았다. 그 선택이 "잘한 일"이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리고 지금 '꿈베이커리'의 하루하루를 "잘한 선택"이었다고 스스로를 격려한다.
차영일은 몸이 힘들 때면 아이들이 보내 온 삐뚤삐뚤하면서도 또박또박 써내려간 편지를 집어든다.
"안녕하세요. 꿈베이커리 선생님들 빵 정말 맛있어요. 겨울철 감기 조심하시고..."
"꿈 베이커리 선생님 안녕하세요. 맛있는 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저희에게 맛있는 빵을 주세요."
그렇게 읽어가노라면 어느덧 차영일의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내일 해가 뜨면 차영일과 꿈베이커리는 다시 반죽을 시작할 것이다.
때로는 치유가 되고 때로는 삶에 대한 포기마저 돌려세울 수 있는 빵,
그 따뜻한 빵이 '꿈베이커리' 오븐 속에서 천천히 부풀어 오를 것이다.
<한 줄 덧붙이며>
'꿈베이커리'의 활동상은 https://cafe.naver.com/kkumbakery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차영일을 만든 시간들>
극중에서, 도시생활을 접고 이곳에 카페 '마니'를 연 젊은 부부 리에와 미즈시마는 맛난 빵과 요리를 통해 손님과 이웃에게 행복을 전하고자 한다.
스에하사는 빵의 온기, 스프의 따뜻함에 힘을 얻어 상처를 이겨내고 아빠와 화해한다. 그렇게 '해피 해피 브레드'에서는 '따뜻한 빵'으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차영일, 그는 지금 인천 월미산 아래 '꿈베이커리'에서 빵을 굽고 있다. 또 젊은 청년들에게 '빵 만드는 노하우'를 전하고 있다.
▲ 꿈베이커리 현판 앞에서 꿈베이커리 1층에 있는 현판앞에서 차영일이 멋진 포즈를 취해주었다. ⓒ 김동욱
그가 제빵 책임자로 있는 '꿈베이커리'는 2016년 이창호·강현식·이성인 등 지역의 치과의사와 약사들이 조금씩 힘을 보태 만든 빵집이자 기부단체다. 지역아동센터에 맛있고 건강한 빵을 보내주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조직이다. 이들이 뜻을 모으게 된 계기는 지역아동센터에 전달되는 빵들이 유통기한이 임박하거나, 너무 당분이 많은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차영일은 이들의 뜻에 공감하면서 제빵 책임자로 기꺼이 합류했다. 2016년 당시 정년 퇴직 상태였던 그는 빵과 함께 한 50년 인생의 마지막을 보람되게 장식하고 싶은 맘으로 참여했다.
52년생 차영일은 지금 예순여덟의 나이다. 정읍 출신으로 8남매의 넷째로 태어난 그는 16살 되는 해 형과 함께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돈을 벌어 가난한 집에 보탬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렇지만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그에게 서울은 결코 살갑지 않았다. 겨우 터 잡은 곳이 장충동에 있는 '중앙공무원교육원'의 구내식당이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급여 없이 일하는 조건이었다. 거기서 3개월을 보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집에 돈을 보낼 수 없어 그는 식당, 이발소 등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종로뉴욕제과에 들어갔다. 종로 2가 고려당과 이웃하며 자리했던, 당시로서는 제법 큰 제과점이었다. 그곳에 '시다'로 들어갔고, 첫 월급으로 500원을 받았다.
1963년도에 삼립식품에서 나온 '크림빵'은 큰 인기를 끌었다. 국민들의 허기를 달래줬던 그 빵이 당시 10원이었다. '크림빵' 50개를 사먹을 수 있는 정도 돈을 받고 시작한 빵 인생의 서막이었다.
기술이 없던 그는 보조에서 시작했다. 청소하고, 선배들 앞치마 빨고, 동작 늦으면 두드려맞고, 연탄 오븐에 불피우고... 그러다 피곤하면 밀가루 포대에서 눈을 붙이곤 했다. 휴일이라곤 한 달에 두 번 남짓, 쉬는 날엔 50원을 받아 목욕하고 극장 구경가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얼마 전 '파리바케뜨'의 불법파견이 이슈가 되면서 제빵 노동자들의 고단한 상황이 화제가 됐었다. 그게 2018년의 일이다. 그런데 제빵 노동자들의 어려운 노동 실태는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우리나라만의 일도 아니다.
1871년 파리 꼬뮨에서도 주요한 슬로건이 "제빵 노동자들의 야간노동 철폐"였었다. 미국에서도 그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1884년, 오리건주의 세인트헬렌스 제빵노동조합 조합가에서는 "지하에서 꼬박 18시간, 노역 속에 빵을 만드네. 공기도 빛도 소리도 차단된 채 우리는 과연 산 목숨인가 죽은 목숨인가?"라고 처연했던 상황을 묘사했다.
우리나라 60년대가 이보다는 나았을까? 어쨌거나 차영일은 바로 이런 조건에서 앳된 소년 노동자로 빵을 배우기 시작했다.
차영일의 하루 일과는 제법 바쁘다. 꿈베이커리가 인천지역아동센터와 그룹홈 등 48개 기관에 간식으로 보내는 빵은 하루 평균 500개 이상이다. 또 빵의 종류도 단팥빵, 머핀, 마들렌, 쿠키 등 15가지에 이른다.
그의 업무는 반죽으로 시작한다.
정성껏 재료를 섞고 밀어펴면서 치대는 그의 손길은 부드럽다.
들어올렸다 다시 치대는 그의 손놀림은 또 힘이 있다.
옆으로 접고 또 옆으로 접는 그의 손동작은 우아하기까지 하다.
▲ 꿈베이커리에서 반죽하는 모습좋은 재료가 첫째라면 빵은 반죽이 얼마나 잘 되는냐에 좌우된다. 차영일이 정성스럽게 반죽을 하고 있다 ⓒ 김동욱
그렇게 반죽이 마무리되면 예쁘게 둥굴려 성형을 한다.
50년 세월의 깊은 내공이 묻어나온다.
이런 경지(?)에 오르는 데는 '쉐라톤 워커힐' 제과제빵에서 닦은 33년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차영일은 종로뉴욕제과를 시작으로 여러 동네 빵집들을 전전하며 경력자가 된다. 하지만 모두 어깨너머 배운 기능이어서 이론은 없었다. 그 갈증을 풀어준 곳이 바로 대방동에 있는 제과학교였다. 1972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생긴 제과제빵 교육기관이다. 3기로 입학한 그는 거기서 처음으로 재료과학을 공부하면서 밀가루, 설탕의 특성들을 배웠고 빵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선배의 소개로 76년에 쉐라톤 호텔 제과제빵부서에 입사했다. 당시 직원이 4명일 정도로 규모도 작았고 알음알음으로 취직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78년 쉐라톤 호텔이 워커힐과 체인 협약을 하게 되면서 상황이 변한다. 세계 수준의 호텔답게 지배인·주방장 및 식당별 쉐프가 들어섰고, 이때 제과제빵도 10여 명으로 늘어나면서 그의 빵 인생도 꽃이 핀다.
무엇보다 제과제빵 쉐프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들어와 많은 기예를 배울 수 있었다. 초대 쉐프 프랑스인 퐁스로부터는 케이크 류를 배웠다. 독일 사람에게는 유럽빵과 바케트를, 스위스인에게는 초콜릿을, 일본인으로부터는 섬세한 잔재주를 익힐 수 있었다.
당시 그를 괴롭힌 것은 초등학교 졸업뿐이라는 학력이었다. 외국 쉐프와 말이 통하지 않아 더 많이 배우지 못하는 답답함이 컸다. 그래서 그는 퇴근 후면 카세트 테이프를 안고 살며 영어 회화를 익히고 손짓 발짓을 써서 그들의 선진(?)기술을 익혀나갔다.
그렇게 해서 2009년 정년 퇴직하기까지 33년 동안 전 세계의 많은 빵 기술을 접하고 익힐 수 있었다. 나중에는 부임하는 쉐프마다 차영일에게 자문을 구할 정도로 '쉐라톤 워커힐'의 명장 아닌 명장이 되었다.
이런 경력의 그이지만 빵을 구울 땐 늘 정성을 쏟고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빵 인생 50년 동안 그는 "레시피는 전할 수 있지만 노하우는 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스스로를 벼리고 또 벼려야 장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꿈 베이커리에서 빵을 배우는 젊은 청년들에게도 그가 늘 강조하는 대목이다.
반죽이 끝난 빵을 예쁘게 동굴리고 모양을 만들어 오븐에 넣으면 차영일은 더욱 긴장한다. 빵은 시간과 온도, 효모의 달콤한 마술이라고 했다. 어쨌거나 마지막은 오븐에서 완성되는 것이기에 색이 잘 나오고 있는지, 진한 부분은 없는지, 트레이를 골고루 돌려주며 그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 오븐 속에서 막 구워진 빵의 모습오븐 속에서 온기를 뿜어내고 나오는 빵의 모습은 정겹고 사랑스럽다 ⓒ 김동욱
▲ 성형을 마친 빵에 데코를 하는 모습오븐에 들어가기전 성형을 마치고 빵의 모습을 예쁘게 단장하고 있다. ⓒ 김동욱
예전에는 고객을 위해, 손님을 위해 만들었던 빵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해피 해피 브레드'의 리에와 미즈시마가 따뜻한 빵으로 어린 소녀 스에하사의 상처를 위로했듯,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의 희망을 위해 빵을 굽는다. 그렇기에 한번 더 손길을 주고 더욱 정성을 기울인다.
'해피 해피 브레드'의 후반부에선 이야기 하나가 또 펼쳐진다.
일생 동안 동네 목욕탕을 하면서 살았던 사카모토 노부부. 부인이 아프고 삶에 대한 의욕을 잃게 되면서 젊은 날 사랑을 약속했던 이곳에 자살을 결심하고 눈보라치는 겨울날 찾아온다.
그런데 리에가 내온 따뜻한 솥단지 밥 한 그릇, 그리고 정성스레 빚어 따뜻한 온기가 숨쉬는 팥빵을 먹으며 부인은 생각을 바꾼다. 내일 일어나서도 이 맛있는 팥빵을 먹고 싶다고...
차영일의 일과는 늦은 오후면 마무리된다.
이제는 육십 후반에 이르러 체력이 젊을 때와 다르다. 평생을 서서 일한 직업, 몸마디가 쑤실 때가 많다. 오븐 열기에 데인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렇지만 사랑했던 일이다.
정년 퇴직했을 때 '쉐라톤 워커힐 제과제빵장' 이름을 내걸고 창업을 할까 고민도 했었다. 이런 저런 스카우트 제의도 많았다. 모두 마다하고 방송통신대에서 4년을 공부했고, 2012년 환갑이 넘은 나이에 졸업장을 받았다. 그 선택이 "잘한 일"이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리고 지금 '꿈베이커리'의 하루하루를 "잘한 선택"이었다고 스스로를 격려한다.
▲ 꿈베이커리 창가에 앉은 차영일하루 일과를 마치면 창가에 앉아 월미산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낙이라고 한다. ⓒ 김동욱
차영일은 몸이 힘들 때면 아이들이 보내 온 삐뚤삐뚤하면서도 또박또박 써내려간 편지를 집어든다.
"안녕하세요. 꿈베이커리 선생님들 빵 정말 맛있어요. 겨울철 감기 조심하시고..."
"꿈 베이커리 선생님 안녕하세요. 맛있는 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저희에게 맛있는 빵을 주세요."
그렇게 읽어가노라면 어느덧 차영일의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내일 해가 뜨면 차영일과 꿈베이커리는 다시 반죽을 시작할 것이다.
때로는 치유가 되고 때로는 삶에 대한 포기마저 돌려세울 수 있는 빵,
그 따뜻한 빵이 '꿈베이커리' 오븐 속에서 천천히 부풀어 오를 것이다.
<한 줄 덧붙이며>
'꿈베이커리'의 활동상은 https://cafe.naver.com/kkumbakery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차영일의 경력 |
52년 2월. 정읍 출생 67년 6월. 종로 뉴욕제과 입사 73년 8월. 한국제과고등기술학교 수료 76년 3월. 워커힐호텔 입사 93년 3월. 일본 제과기술학교 수료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만찬행사 준비 2009년 1월. 쉐라톤 워커힐 호텔 정년 퇴직 2012년 3월. 방통대 경영학과 입학 2016년 2월. 방통대 경영학과 졸업 2016년 4월. 꿈베이커리 입사 |
<차영일을 만든 시간들>
▲ 제빵일 시작한 어린 차영일16살, 종로뉴욕제과에서 제빵 노동자로 첫발을 내디뎠을 때다. ⓒ 차영일
▲ 73년 한국제과기술고등학교 수료기념사진3기로 입학한 대방동에 소재한 학원에서 빵이론에 눈을 뜨게 되었다. ⓒ 차영일
▲ 쉐라톤워커힐 호텔 제빵부문의 독일인 쉐프 및 직원들과쉐라톤 워커힐 호텔에 근무할 당시, 가운데가 차영일이다. ⓒ 차영일제공
▲ 2012년 방통대 졸업사진초등학교 졸업이었던 그는 정년퇴직후 검정고시를 보고 방통대에 입학 경영학 학사학위를 받는다. ⓒ 차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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