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는점 660.3°C, 오토바이 엔진까지 모조리 녹아내렸다
[현장-강원도 산불 그후④] 이재민의 아픔을 대변하는 피해 현장
▲ 파란 하늘 아래 벚꽃이 만개한 영랑호, 그 뒤로 설악산 울산바위까지 모두 하늘빛을 그대로 받아 파랗다. ⓒ 정덕수
▲ 밭 가장자리에 세워둔 오토바이가 불탔다. 농사일을 보러 다니며 이용했을 오토바이는 이 농부에겐 소중한 재산이다. ⓒ 정덕수
4일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에서 발생했던 산불이 5일 저녁 최종적으로 진화됐다고 하고도 사흘이 지난 8일 아침, 속초에서 화재 현장을 지켜본 후유증인지 심란한 마음을 어떻게든 풀어야 했다. 8시에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가 한참을 기다려 버스를 타고 고성으로 출발했다.
고성군 토성면과 속초시 장사동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지 잠시 갈등했으나 버스가 영랑호를 통과할 때 벌떡 일어나 차 좀 세워달라고 했다. 장사동 입구에서 버스가 정차하자 횡단보도를 건너 맑은 영랑호와 설악산을 향해 지름길로 달려갔다.
사진 몇 장 촬영하고 아무래도 여기만 둘러볼 수는 없겠다 싶어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시간이 되면 아버님 계신 곳을 찾아가려는데 같이 갈 수 있는지 물었다. 마침 친구도 곧 출발할 생각이었단다. 속초고등학교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걸어가는데 조금 전과 판이하게 다른 풍경에 멍해졌다.
자신의 고통을 스스럼없이 보여주다
▲ 어렸을 때 농기계 정비와 용접, 선반 등 기술을 배웠다. 먹고살기 위해선 기술이 최고란 말들을 하던 시기였다. 그때라면 이 경운기는 농민이 공장에 당장 가져가 수리를 받았다. 그런데 지금 이걸 수리하는 것과 새로 사는 것 두 중 어떤 쪽이 더 유리한지 모르겠다. ⓒ 정덕수
▲ 융해된 엔진의 잔해. 660.3°C에 이르면 알루미늄은 융해된다. 가볍고 내식성이 강한 소재로 경량화가 필요한 산업에 많이 사용된다. 철은 융해점이 1538°C다. ⓒ 정덕수
밭을 갈려던 경운기는 바퀴와 V벨트, 로터리 바퀴와 고무판이 다 탄 모습으로 기울어져 있다. 삽과 괭이나 호미, 쇠스랑 등 온갖 농기구도 쇳덩이만 남았다. 농사일을 하며 이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오토바이는 실린더와 피스톤 엔진까지 모조리 녹아내린 상태로 주저앉아 있었다.
"수명을 다해도 고물상에라도 넘겨지는 게 정상인데, 어떻게 이렇게 알뜰하게 태워지는 운명이란 말인가"라며 혼자 중얼거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온 산이 다 새까맣다. 먹 하나로 그린 수묵화라도 생명이 느껴지기 마련인데, 이 풍경에선 도무지 생명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
둔덕 위 불탄 집에 차가 서 있어 올라가 "이 집 주인이신가요? 혹 괜찮으시다면 사진 촬영을 좀 해도 되겠어요?"라 물었다. 선선히 승낙을 해줘 현관으로 연결된 계단참을 오르려는데 현관문으로 사용했던 두꺼운 장식 유리가 깨진 게 아니라 조각이 나며 녹은 채 휘고 구부러진 상태로 쏟아져 있었다. 마치 기묘한 작품처럼 보였다.
▲ 산불 피해를 입은 속초 장사동 한 민가에서 주인의 허락을 받고 촬영했다. ⓒ 정덕수
▲ 현관으로 오르는 계단 오른쪽 에어컨 실외기와 창문 모두 불에 탔다. ⓒ 정덕수
▲ 계단참엔 현관문이 불타며 깨지다 못해 녹은 유리가 쏟아져 있다. ⓒ 정덕수
하긴 풀도 채 자라지 않은 밭에 세워두었던 경운기도 탈 정도니, 불에 탈 수 있는 옷이며 가구로 채워졌던 집인들 온전할까 싶었다. 알루미늄 문틀도 견딜 수 없는 화염, 그 속에서 두꺼운 유리가 뒤틀리고 녹을 정도였다니. 자칫 집을 지키려고 마지막까지 버텼더라면 대피할 기회조차 없었을 모습이다. 그런데도 이 집 주인은 선선히 사진 촬영을 허락해줬다.
허락을 받았지만 막상 처한 환경에 계단참에서 멈칫거렸다. 이 집 주인은 습관처럼 집에 들른 모양인데 그새 어딘가로 떠났다는 걸 그때야 깨달았다. 이 주인처럼 많은 이들이 지금 자신의 고통을 스스럼없이 보여준다. 공감이란 뭔가. 바로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더불어 희망을 찾아가는 거 아닌가. 이들이 웃을 수 있는 그 순간까지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안으로 들어서자 한 가족의 단란한 아침이나 저녁이 차려졌을 부엌이 처참하게 주저앉은 지붕 아래 나타났다. 그 옆엔 쇠붙이로 전락한 식탁과 의자가 불기를 먹어 제 빛을 상실한 채 제자리를 지킨다. 식탁에 어린아이들이 앉아 엄마가 차려주는 맛난 밥을 기다렸을 풍경이 그려졌다. '엄마 맛있어요', '엄마 더 주세요' 이런 말들이 들리는 것 같았다.
▲ 단란한 가족의 건강한 밥상에 올랐던 그릇들이 다시는 쓸모없게 됐다. ⓒ 정덕수
▲ 어린 아이들이 의자에 앉아 '엄마 더 주세요. 맛있어요'라 하는 말이 들리는 듯하다. ⓒ 정덕수
▲ 얼마나 단란한 가정이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운동기구와 식탁, 그리고 부엌의 그릇들이 이재민의 아픔을 대신 말하고 있다. ⓒ 정덕수
곳곳에 흉터를 만들어 놓은 풍경
이 집 주인은 젊어 보였다. 마흔이나 됐을까 싶은 모습이었다. 그릇으로 미뤄 대가족이 한집에 살았던 듯하다. 찜기와 냉면이나 여름철 콩국수를 담았음직한 도자기 냉면 대접이 두 죽(그릇 따위의 열 벌을 묶어 세는 단위) 정도 되는데, 그중 12개의 냉면 대접은 포개어진 상태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있다.
시골 가정집에선 볼 수 없는 금고가 있는 방. 가족들이 건강을 위해 운동을 했었나 보다. 부모님을 위해 준비한 듯한 안마의자가 갖춰진 방도 화마엔 달리 도리가 없었다. 불에 탄 금고 옆엔 누군가 금고를 확인하려 했는지 마시다만 물병이 놓여있는데 그것만 다른 색깔이라 낯설다.
TV도, 컴퓨터도 모두 불타고 철판만 흉물스럽게 바닥을 뒹굴었다. 유리를 녹일 정도의 열기가 휩쓴 상태에서 가족이 안전한 게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탈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태워졌다. 이걸 어떻게 해결할지 주인은 막막할 뿐이겠다.
몇 장 더 사진을 촬영하는데 친구가 전화로 어디냐고 물었다. 속초고등학교 근처라고 일러주고 친구가 기다리는 학교 앞으로 갔다. 차에 오르자 "참 신기하지. 중간에 있는 집은 멀쩡한데 그 주변에 있는 집들은 다 타고 말이야"라 했다. 조금 전 내가 들렀던 집도 바로 앞도 그랬다.
강풍에 불이 어지럽게 날리며 곳곳에 흉터를 만들어 놓은 풍경이 차창 밖으로 지나간다. 흉터를 찾는 일보다 성한 산과 집을 찾기가 더 어려운 풍경, 친구와 돌아보고 싶은 장소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도 마음은 어지럽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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