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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단식과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79회] 학생ㆍ재야ㆍ노동세력과 연대하면서, 5공정권은 더욱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등록|2019.04.21 17:00 수정|2019.04.21 17:01
 

단식 중인 김영삼(1983년 5월)신군부의 강압에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영삼은 1983년 5월 18일, 5.18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이하여 5.18영령들을 추모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인다. ⓒ 김영삼 회고록


폭력으로 도득한 정권은 아무리 방비가 치밀해도 국민의 자발적인 동의가 없으면 허물어지게 마련이다.

전두환 정권은 학생ㆍ노동자들의 산발적인 저항을 공권력이라는 폭력으로 제압하면서 철옹성을 쌓아갔다. 광주학살과 조작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지켜보면서 국민들은 공포심을 어찌하기 어려웠다. 5공의 철옹성에 망치를 든 것은 김영삼이었다.

83년 5월 18일 전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서울 상도동 자택에서 단식에 들어갔다. 80년 5ㆍ17군사쿠데타에 의해 타의로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자택에 연금당한 지 3년 만에 단식을 결행한 것이다.

김영삼은 <단식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는데, 이 성명에서 "민주화투쟁을 더욱 굳건히 그리고 더욱 튼튼한 신념으로 해나가기 위하여  이번 단식을 하는만큼 나는 이 단식으로 민주화투쟁에 대한 나의 움직일 수 없는 결의를 나 자신과 국민에게 분명히 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5ㆍ18광주민주항쟁 3주년을 계기로 시작한 김영삼의 단식투쟁은 출범 3년을 맞은 제5공화국의 체제 내 정치권에 큰 파문을 던졌으며, 임시국회 소집문제를 비롯하여 제1야당 민한당의 진로문제와 특히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의 계기를 만들었다.

김영삼은 단식에 앞서 5월 2일 발표한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서 ① 구속인사의 전원석방 ② 전면해금 ③ 해직교수 및 근로자ㆍ제적학생의 복직ㆍ복교ㆍ복권 ④ 언론자유 ⑤ 개헌 및 국가보안법의 개폐 등 5개항을 요구한 바 있다.

김영삼의 단식과 관련, 5월 19일 전 신민당 소속의원, 재경지구당위원장, 지도위원 등 20여 명은 긴급 모임을 갖고 대책을 논의하여 '김영삼총재 단식대책위원회 6인소위'를 구성하고 국무총리의 면담을 요구키로 했다.

단식이 8일째 계속되던 5월 25일 오전, 노량진경찰서장과 정보과장 등이 상도동 자택을 찾아 김씨를 병원으로 이송할 것임을 통보하고 앰뷸런스에 태워 서울대병원에 강제 입원시켰다.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되고도 김영삼은 단식을 중단하지 않았다. 정부당국은 그의 건강상태가 악화된 시점인 5월 30일 김씨의 연금을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이날 김영삼은 김덕룡 비서실장을 통해 "연금의 해제는 지극히 당연하고 마땅한 조처이나 단식을 시작한 이유가 아니고 요구사항도 아니다"면서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서 명시한 5개항의 민주화 요구를 정부당국이 받아들일 것을 거듭 촉구했다.
  

▲ 1983년 6월 김대중-문동환이 미국 현지에서 김영삼 단식을 지지하는 활동을 함께하는 모습. ⓒ 김대중평화센터


민한당의 유치송 총재, 윤보선 전 대통령, 김수환 추기경, 유진오 전 신민당 총재 등이 5월 29일부터 차례로 김영삼과 면담, 단식중단을 종용했다. 6월 1일 전 신민당 및 통일당 소속 의원 32명과 원외인사 7명 등 39명은 회합을 갖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국선언문 및 결의문을 채택하고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적 연합전선을 구축키로 하는 한편, 15일 째가 되는 김영삼의 단식 중단을 종용키로 합의했다.

이들은 결의문에서 ① 김씨가 제시한 5개항의 민주화요구 지지 ②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적 연합전선 구축 ③ 당국의 성의있는 결단과 대화촉구 ④ 단식중단 호소 등을 결의했다. 이들 중 일부는 6월 2일 서울대병원에서 다시 모임을 갖고 민주화추진을 위해 구성키로 한 범국민적 조직의 명칭을 '민주국민협의회'로 정하고 의장에 이민우, 대변인에 김덕룡을 지명했다.

단식이 20일을 넘기게 되자 의료진의 혈액검사 결과 건강상태가 위험수위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김영삼은 23일 만에 단식을 중단하고, 그 후 20여 일의 회복치료를 받은 뒤 6월 30일 퇴원했다.

84년 5월 17일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는 광주민주항쟁 4주년에 즈음하여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했다. 1년 전에 김영삼이 '민주화 요구 5개항'을 놓고 단식을 시작하면서부터 논의되기 시작해 83년 8월 서울과 워싱턴에서 <김영삼ㆍ김대중 8ㆍ15공동선언>이 발표된 것을 계기로 '80년 서울의 봄' 이래 갈라섰던 야권의 양대진영이 다시 합쳐 민추협을 결성하고 반독재투쟁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단식중단 이후 가택연금이 풀린 김영삼은 상도동계 친목모임인 민주산악회를 구성하는 한편, 미국에 망명중인 김대중의 동교동계 측과 제휴를 모색, 양계열의 합작으로 민추협을 결성한 것이다.

민추협은 84년 5월 18일 김영삼ㆍ김대중 공동의장 이름으로 발표한 결성선언문 <민주화 투쟁선언>에서 "우리는 군인의 정치개입이 민주헌정을 후퇴시키고 민족사의 불행과 안보상의 불안을 초래한다는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군인이 본연의 사명인 신성한 국방의무로 복귀할 것을 주장하고 시민민주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투쟁한다"는 등 9개항의 내용을 발표했다.
  

▲ 84년 12월 11일,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이 민추협 사무실에서 이듬해 2.12총선에 대한 방침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 당시 김대중 공동의장은 국내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어서 김영삼 왼쪽에 앉아 있는 김상현 씨가 공동의장 대행을 맡고 있었다. ⓒ 민청련동지회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84년 11월 말 정부는 정치활동 미해금자 중 84명을 해금했다. 풀려난 이들은 민추협 인사들과 함께 군정종식과 문민정치ㆍ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신당창당 작업에 들어갔다.

상도동계의 이민우ㆍ최형우ㆍ김동영, 동교동계의 김상현ㆍ김녹영ㆍ조연하 등은 84년 12월 15일 실무대표회의를 갖고 창당발기인 선정기준 등 구체적인 실무협의에 들어갔으며 소집책에 이민우를 선정했다. 이 무렵 민한당 소속 일부 의원과 전직 의원들이 탈당, 신당에 가담했다.

신당은 12월 20일 발기인 115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한민주당 창당 발기인대회를 연데 이어 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을 창당했다. 신한민주당의 창당은 정치권에서 반 전두환 투쟁의 모체가 되고, 학생ㆍ재야ㆍ노동세력과 연대하면서, 5공정권은 더욱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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