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 무릎 꿇린 6월항쟁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84회] 정부의 '4ㆍ13호헌조치'는 철회되고 직선제 개헌론이 관철되었다
▲ 87년 6월 항쟁을 상징하는 사진 한장. 한 청년이 태극기 앞으로 손을 들고 뛰쳐 나가고 있다. ⓒ 6월항쟁기념사업회
잠실체육관에서는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가 열려 전두환 대통령이 육사동기인 노태우의 손을 높이 들어주었다. 민정당 대통령후보에 선출된 노태우는 울먹이면서 전두환의 '배려'에 감격해했다.
▲ 1987년 6월 10일. 노태우 민주정의당 총재 취임. ⓒ 권주훈/눈빛
이날 오후 6시 정각, 국민대회가 열리는 대한성공회 종탑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지고 성당의 종이 42번 울리는 것을 신호로 성당 구내에 있던 차량들이 경적을 울리고 도심을 지나던 차량들도 일제히 따라 경적을 울렸다.
▲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6월항쟁은 고등학생들의 의식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들은 6월 항쟁의 거리시위에 적극 동참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을 깨우쳐 간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세력의 대한성공회 6ㆍ10대회는 아침부터 전경들에게 에워싸여 일반시민들이 접근할 수 조차 없었다. 따라서 출정식을 가진 학생들은 각 대학별로 오후 5시경 을지로 2가 로타리, 을지로 네거리를 점거하고 연좌농성을 벌였고,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학생들을 격려했다. 경찰은 사과탄을 마구 쏘아 이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학생들은 소단위로 신세계백화점, 남대문시장, 퇴계로 2가, 을지로 입구 등지에 나타나 시위를 벌였다.
▲ 6월 항쟁 당시 시위에 참가한 '넥타이 부대'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후 6시가 넘자 학생들의 시위는 점차 격렬해지고 시민들의 합세도 점점 늘어났다. 서울역, 만리동입구, 신세계 앞, 서부역 등에서 최루탄과 돌멩이가 난무했다. 퇴계로 2가 파출소를 지키던 전경들이 시위대의 급습을 받고 무장을 해제당한 채 감금되기도 했다.
▲ 1987년 6월 항쟁 당시의 시청 앞 광장.1987년 6월 항쟁 당시의 시청 앞 광장. ⓒ 연합뉴스
6월 9일 경찰의 직격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연세대 이한열 군이 사경을 헤매는 사건이 발생하자 범연세인들의 규탄대회가 전국 각 도시로 확산되었고, 국민운동본부는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선포하고 대대적으로 최루탄 추방운동을 전개했다. 이날 전국 14개 도시에서 20여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 1987년 6월 항쟁의 백양로. 한 청춘의 죽음은 들끓는 분노를 폭발시켰다.1987년 6월 항쟁의 백양로. 한 청춘의 죽음은 들끓는 분노를 폭발시켰다. ⓒ 보도사진
6월 26일, 드디어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 시작되었다. 서울에서는 학생ㆍ재야ㆍ야당ㆍ시민 등이 국민운동본부의 행동지침에 따라 탑골공원 일대ㆍ신세계백화점ㆍ시청 앞ㆍ광화문 등 7개 집결지로 진출하려 했으나 경찰의 3중제지로 처음에는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 1987년 6월 항쟁 촉발에 큰 역할을 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위에 참가한 시민ㆍ학생들은 '호헌철폐' 등의 구호에서 '민주쟁취' '독재타도', '군부독재 지원하는 미국은 물러가라' 등으로 격화되었다. 6ㆍ26대행진은 철저히 평화주의를 원칙으로 했다. 최루탄에 쫓기면서도 시위대들은 '질서'를 외쳤다. 일부 방화와 파괴 그리고 투석전 등 과격양상을 띤 것은 경찰의 과잉진압과 최루탄 난사 때문이었다.
제5공화국 이래 최대의 인파가 참가한 6ㆍ26대행진에 정부 여당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게 되고, 막다른 골목에서 돌파구를 찾은 것이 6ㆍ29선언이었다. 마침내 6월 민중항쟁이 5공 군부독재의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
▲ ▲ "종철아 잘가그래이.. 아부지는 할말이 없대이" 박 군 아버지의 목소리를 플래카드에 담아나온 6월 항쟁 당시 시위대 ⓒ ⓒ 6월항쟁기념관
전두환은 5월 1일 시급수습에 관한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하여 "여야가 국회에서 개헌안에 합의하면 이를 국민투표에 회부해 개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노 대표의 구상을 전폭적으로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이로써 정부의 '4ㆍ13호헌조치'는 철회되고 직선제 개헌론이 관철되었다. 따라서 제5공화국은 6월항쟁으로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고, 제6공화국을 출범케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6.29선언.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6.29선언.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
6ㆍ29선언으로 여야합의 하에 국회에서 개헌안이 의결되고 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에서 찬성률 93.1%로 확정되어 29일 공포되었다. 제9차 개헌으로 제6공화국의 헌법이 된 이 개헌안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전문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4ㆍ19민주이념의 계승 및 조국의 민주개혁의 사명 명시 ② 총강에서 국군의 정치적 중립,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정책 수립추진 규정 신설 ③ 기본권에서 구속적부심 청구권 전면보장, 범죄피해자에 대한 국가구조제 실설, 형사피의자의 권리확대, 허가ㆍ검열의 금지에 의한 표현의 자유 확대 ④ 국정감사권 부활, 국회회기 제한규정 삭제 ⑤ 대통령 직선제 및 5년 담임제, 대통령의 비상조치권ㆍ국회해산권 폐지 ⑥ 대법관을 국회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 ⑦ 헌법재판소를 신설, 위헌법률 심판, 탄핵심판, 국가기관간 권한쟁의 심판, 헌법소원을 관장하게 한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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