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 분열로 노태우 집권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85회] 두 김씨의 적전분열로 그 어부지리를 5ㆍ17쿠데타의 2인자에게 헌납한 꼴이 되어
▲ 6월 29일 직선제 개헌 수용 선언을 발표하는 당시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표 ⓒ MBC 뉴스데스크 캡처
신한민주당(신민당)은 '이민우 파동'을 거치면서 새로운 통일민주당(민주당)으로 변신하여 두 김씨 중심의 정통야당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87년 6월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하여 대권경쟁에 나서게 되었다.
▲ 13대 대통령 선거 전당대회 당시 전두환과 노태우 ⓒ 동아일보 DB
김대중 고문은 8월 8일 민주당에 입당했다. 72년 10월 유신투데타로 당원자격을 잃은 지 15년 만에 정당 당원이 된 것이다. 김 고문의 입당으로 민주당은 곧바로 후보경쟁 회오리에 휩싸였다.
김영삼 총재는 당내조직의 기득권을 배경으로 대통령후보의 조기공천을 주장한 반면, 뒤늦은 사면복권으로 당내기반이 취약한 김대중 고문은 여권의 집중적인 공격을 피하기 위해 선거 직전에 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이었다. 또 김총재 측은 재야민주인사들을 영입해서 범야 단일후보를 선출하자고 맞서는 등, 어느 쪽도 양보의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팽팽하게 맞섰다.
민주당은 양측의 치열한 대립 속에 김 고문 측이 지방방문을 시작하고, 김 총재 측이 10월 10일 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하겠다고 공식선언하고 나서자, 김 고문도 11일 사실상 대통령후보 출마를 선언했다. 이로써 두 김씨는 적전분열을 감행하면서 분당의 가파른 길로 내닫기 시작했다.
▲ 제 13대 대선(1987)에 출마한 김대중 후보 유세 유세장(군산 월명종합운동장) 풍경. ⓒ 조종안
10월 29일 민주당 내 동교동계 의원 24명과 무소속 1명, 각계 인사 등 51명으로 창당준비위를 구성하고 당명을 평화민주당(평민당)으로 정한 다음, 10월 30일 창당준비위원회, 11월 12일 창당대회라는 초고속의 창당절차를 밟아 김대중을 당총재 및 대통령후보로 선출했다.
6ㆍ29선언 이후 김종필의 정계복귀 선언을 계기로 구공화당 시절의 각료ㆍ의원을 중심으로 87년 10월 30일 신민주공화당(공화당)이 출범했다. 공화당은 10월 5일 창당발기인대회를 거쳐 10월 30일 창당대회 겸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열어 김종필을 총재 및 대통령후보로 추대했다.
▲ 1987년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대표위원의 6.29 선언이 있던 날 서울 북창동의 한 다방은 '오늘은 기쁜 날'이라는 환영 대자보를 유리창에 붙이고 손님들에게 무료로 커피를 대접하고 있다. ⓒ 연합뉴스
87년 12월 16일 실시되는 제13대 대통령선거는 71년 4ㆍ27대통령선거 이래 16년 7개월여 만의 직선제 대통령선거였다. 72년의 유신쿠데타, 80년 5ㆍ17쿠데타 등을 거치면서 국민은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권리를 박탈당했다.
85년 2ㆍ12의 제12대 국회의원선거 이후 야당과 재야세력이 줄기차게 추진해 온 대통령직선제 개헌투쟁으로 제9차 개헌이 이루어지고 새 헌법에 따라 12월 16일로 대통령선거일이 결정되었다.
대통령선거에는 민정당의 노태우, 민주당의 김영삼, 평민당의 김대중, 신공화당의 김종필, 사회당의 홍숙자, 무소소의 백기완, 한주의당의 신정일, 일민당의 김선적 후보 등 8명이 입후보했다. 선거운동 기간 중 홍숙자ㆍ백기완ㆍ김선적 후보가 사퇴하고 5명의 후보가 정권도전에 나섰다. 그러나 대체적인 여론은 노태우ㆍ김영삼ㆍ김대중ㆍ김종필의 '1노 3김' 또는 김종필을 뺀 '1노 양김'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 노태우 대통령. 사진은 1989년 9월 국회에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 ⓒ 국가기록원
선거결과 유권자수 2,587만 3천여 명 중 2,306만 6천여 명이 투표하여, 89.2%의 투표율을 보였으며, 이중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유효투표의 36.6%인 828만 2,738표를 얻었고, 김영삼 후보는 28%인 633만 7천여 표, 김대중 후보는 27%인 611만 3천여 표, 김종필 후보는 8.1%인 182만 3천여 표를 얻어 노태우 후보가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두 김씨가 유효투표의 55%를 얻고도 노태우가 얻은 36.6%에 눌려 정권을 넘겨주게 된 것이다. 야권분열이 군정연장의 기회를 마련해준 셈이었다.
▲ 13대 대선 후보별 득표율13대 대선에서 야권은 55.1%의 득표율을 기록했음에도 군부세력의 집권연장을 허용해줄 수밖에 없었다. 단일화에 실패한 양김분열의 결과다. ⓒ 손우정
12월 15일 "김대중후보 민주대연정에 참여할 듯"이라는 통일민주당보 호외 형식으로 제작된 유인물이 호남지방에 뿌려지기도 하는 등 타락상이 계속되었다. 13대 대통령선거의 가장 대표적인 부정은 '구로구청사건'으로 이름 붙여진 투표함 반출사건이다.
▲ 전두환 전 대통령(오른쪽)은 6·29 선언을 준비할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자신에게 '직선제 개헌을 건의할 테니 크게 노해 호통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었다고 증언했다. 전 전 대통령은 30일 연합뉴스가 단독 입수한 『전두환 회고록』2권 '청와대 시절'에서 6·29 선언 비화를 소개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사진은 1987년 6월 전두환 대통령이 힐튼호텔에서 열린 축하연에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후보를 축하해 주는 모습. ⓒ 연합뉴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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