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텍 임재춘 단식 35일, 박영호 사장 결자해지 바라며
"좋은 인연이란 끝이 좋은 인연"
콜텍 해고노동자들이 2007년 사측의 일방적인 공장 폐쇄와 정리해고에 맞서 투쟁을 시작한지 13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3월 12일, 콜텍의 해고노동자 임재춘씨는 '정리해고 사과, 정년이 되기 전 명예복직, 해고기간 보상'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갔습니다. 임재춘씨는 하루하루 타들어가는 몸과 불면의 고통을 인내하며 견디고 있습니다.
임재춘씨의 단식농성 35일(농성 4457일)이 되는 4월 15일 박영호 콜텍 사장이 참석하는 교섭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번 교섭으로 투쟁이 잘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단식 중인 임재춘씨의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기자 말]
"다 알자녀~"
3월 28일 서울 강서구 등촌동 콜텍 본사 앞 콜텍지회(민주노총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소속) 농성장에 가니 임재춘 조합원이 반갑게 맞아준다. 임재춘씨는 17일 째 정리해고 사과와 복직 등을 요구하며 단식농성 중이다. 투쟁을 시작한 지 4439일이 되는 이날, '기타를 던져라' 공연 때문에 다른 조합원들은 외부에 나가 있다고 했다.
"착잡해. 노동자들이 맨 날 이렇게까지 하는데, 나라는 손 한번 안 쓰잖아. 일곱 차례 교섭했는데, 회사가 아무 것도 없이 왔어. 3월 7일에는 박영호 사장이 와서 교섭을 했는데도 아무 것도 안 갖고 온 거야. 그러니 어쩔 수 없지. 끝장 선언 했잖여. 어떻게 됐든 끝을 봐야 된다 생각한 거지."
이인근 지회장은 이미 수차례 단식을 했고, 김경봉 조합원은 건강이 좋지 않아 재춘씨 밖에 할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장기화 되는 단식에 체중 감소와 함께 체력은 계속 떨어져 가는데,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의 수척한 얼굴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늘 그랬듯이 기타 이야기만 나오면 재춘씨의 눈이 반짝이고 그의 말이 빨라진다. 재춘씨가 기타노동자로 살아온 지 36년이다. 그에게 기타노동자로 살아온 역사를 물었다.
"그냥 내리고 싶더라고"
재춘씨가 기타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83년이다. 공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 동안 농사를 짓다가 동네 선배를 따라 의정부에 있는 통기타 만드는 성음악기에 입사했다. 재춘씨는 성음악기에서 나무로 기타에 들어가는 부자재를 만드는 성형라인에서 일했다. 회사 기숙사에 살면서 매일 오전 8시 30분에 출근해서 밤 9시까지 일을 했고, 주말에도 무조건 일을 해야 했다.
"일요일 날 교회에 안가면 주차를 까. 성음이 기독교 회사거든. 거기에 불만이 있었지."
재춘씨는 어릴 때만 해도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착실하게 외우는 착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중학교 때 '교회 비리'를 알게 되면서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성음악기에서 교회에 나가는 게 무척 힘들었다. 그러던 중에 1985년 당시 인천 대우자동차에 다니던 친구의 소개로 대우자동차에 입사 지원을 하게 된다.
"그때 삼익악기도 사람 뽑는다고 해서 거기도 이력서를 넣었지. 면접 시간이 2시로 똑같았어. (버스 정류장이) 삼익악기 다음에 대우자동차야. 삼익악기에 내려서 거기 들어간 거야."
재춘씨는 그렇게 대우자동차는 면접도 못보고, 삼익악기에 입사를 했다.
"그냥 삼익악기에서 내리고 싶더라고."
재춘씨의 기타 인연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날 만약 재춘씨가 삼익악기를 지나쳐 대우자동차 정류장에서 내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거기(대우자동차) 안가길 잘했지. 그때 갔으면 나도 해고 당했지. 1750명 대량 정리해고 했잖아."
그날 그가 대우자동차에서 내렸다면 우리는 재춘씨를 콜텍 투쟁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게 되었을까? 대우자동차에서 해고가 되었다면 다른 일을 했을 거라니 하마터면 우리는 재춘씨를 못 만날 뻔 했다. 어찌됐건 기타와 인연을 맺는 재춘씨의 삶이 신기하기만 하다.
힘들어도 악착같이 하던 그런 시대
2001년 정리해고는 피했지만, 2007년에 그는 해고자가 된다.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비정규직보호법'이 만들어진 직후였다. 혹시, 박영호 사장은 '시대의 흐름에 맞게' 콜텍 노동자들을 해고한 후에 그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채워 진정한 '꿈의 공장'을 만들 계획을 세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콜텍 해고노동자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그 꿈이 무산된 것은 아닐까? 재춘씨는 "우리 시대 사회가 그랬던 거"라고 했다.
이렇게 재춘씨의 기타인생 2막이 시작되었다. 삼익악기에서는 콤파운드와 왁스를 섞어 전기기타 광택 내는 일을 했다. 성음악기에서의 경력이 있어 월급도 많이 받았다. 노동 조건은 전 직장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일했던 시간이었다.
"그때는 젊었잖아. 힘들어도 악착같이 하던 그런 시대였지."
삼익악기에서 1년 반 정도 근무한 재춘씨는 1986년 다시 고향에 내려온다. 성음악기에서 공장장 하던 사람이 계룡에 기타 공장을 만든다고 같이 일하자고 했다. 그 회사가 콜텍의 전신인 덕영악기(덕영산업)다. 그리고 1991년 수출용 샘플 기타를 생산하던 덕영악기를 콜텍이 인수하면서 덕영악기 노동자들은 콜텍에 그대로 고용승계 되었다. 재춘씨는 그때만 해도 그것(그대로 고용승계 되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재춘씨의 콜텍과의 질긴 인연이 시작되었다. 콜텍 대전공장은 1994년부터 본격적인 흑자를 냈고, 1997년 IMF이후 환율 상승으로 수입이 크게 늘어 계룡시 두마면 왕대리로 공장을 확장해서 이전했다. 회사는 나날이 성장해 갔지만, 재춘씨를 포함한 콜텍의 노동자들이 평일 오전 8시 30분부터 저녁 9시까지 일을 하고 토요일 격주로 일을 하는 삶에는 변화가 없었다. 재춘씨는 콜텍에서도 완성반 광택 일을 했다.
"기타에서 최고 힘들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 광택 일이야. 사람 몸으로 때우고 해야 되는 거니께. 생산량은 계속 늘었어. 콜텍에서 최고 많이 만들 때는 하루에 350대 400대도 만들었지. 힘든 거는 너무 개인적인 시간이 없는 거? 생산 못하면 더 연장도 해야 되니까. 가족들하고 보내는 시간이 없지."
조퇴 월차 쓸라면 4번 결재를 맡아야 했어
재춘씨는 콜텍에서 근무했던 다른 노동자들과 달리 본인이 일하면서 직접적으로 크게 힘든 게 없었다고 했다. 재춘씨는 인정받는 기술자였고 완성라인 관리자이기도 했다. 그는 사실 아쉬울 게 없었다. 재춘씨가 일하는 반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휴가나 조퇴를 쓰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휴가 쓸 생각도 없었어. 일하면 다 돈인데 왜 그걸 그러나(왜 휴가를 쓰나) 했지. 할아버지가 한문이나 '삼강오륜' 같은 거 공부하고 그랬어. 나라에 충성하고, 바른 생활 해야 한다, 부모님한테 무조건 효도해야 한다, 반항하지 마라, 제사를 잘 모셔야 된다. 그런 얘기 듣고 자랐으니께.."
그때만 해도 재춘 씨는' 노동조합 마인드' 보다는 회사가 있어야 노동자도 있다는 '사측 마인드'에 가까웠다. 하지만,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비인간적인 대우와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관리자의 성폭력, 휴가 조차 쓸 수 없는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해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조퇴 월차 쓴다고 하면 나는 잘 해줬어. 근데 위에 가서 다 잘리지. 생산량은 누가 맞추냐고... 조퇴 월차 쓸라면 4번 결재를 맡아야 했어."
콜텍에서는 조퇴나 휴가를 쓰기 위해서는 반장과 라인 팀장, 차장, 공장장 결재를 받아야 했다. 재춘씨가 결재를 올리면 위에 팀장에서 바로 반려가 되었다.
"이인근이 노조 만드는데 조합원 가입해달라고 해서 말없이 (도장) 찍어줬어. 86년 삼익악기 다닐 때도 노조 만든다 해서 도장 찍어 줬거든. 노조가 있으면 좋다는 건 알았으니께."
2006년, 재춘씨는 이렇게 노동조합에 가입을 한다. 노동조합 간부도 아니었고, 관련된 교육 한 번 받은 게 없었다. 노조라는 게 있으면 좋다는 걸 알아서 가입한 거, 그게 다였다고 했다. 노조 가입한 지 1년 후에 정리해고를 당하고, 투쟁을 시작했고, 콜텍과의 인연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게 13년이다.
누가 됐든 책임을 져야 되는 거 아냐
"억울하기도 하고... 내가 대한민국 기타의 최고 고참이고, 대한민국 기타의 역사잖아. 대한민국 기타 공장이 문 닫는 걸 다 봤잖아. 어떻게 됐든 누가 됐든 책임을 져야 되는 거 아냐. 그런 얘기 해줄 사람이 필요한 거지. 내가 마음 먹었지. 내가 한다. 그런데 이렇게 길어질 줄 알았으면 안 했지. 처음에 5~6년 잡고 했는데, 더 길어진 거지. "
임재춘씨가 쓴 농성일기를 모아 출간한 책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2016, 네잎클로바)에는 그의 첫 직장이자 그가 기타와 처음 인연을 맺었던 성음악기에 관한 글이 나온다. 재춘씨는 콜텍에 있다가 성음악기로 간 동료들에게 성음악기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새로운 성음악기 경영주는 노동자들에게 공을 돌리고 소통하며 좋은 인연을 쌓아 그 덕분에 경영도 안정적이라고 했다.
재춘씨는 성음악기와 콜텍을 비교하면서 경영주와 좋은 인연을 맺는 기준을 경영주-직원 간의 소통이라고 했다. 콜텍 사장은 기타를 돈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직원과 소통을 하지 않고 정리해고를 해서 좋은 인연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콜텍은 우리랑 좋은 인연이 될 수가 없지. 합의가 되도 마음에는 항상 상처가 남을 거 같아."
하지만, 투쟁을 하면서 맺은 좋은 인연도 많다. 투쟁을 함께 만들고 고민을 나누는 많은 문화 활동가와 종교인, 시민, 13년 동안 한결 같이 함께 해주는 대전충북지역 동지들과 콜텍지회 조합원들이 그렇다. 지금도 매주 주말이면 대전에서 콜텍지회 조합원들이 올라온다.
"조합원들이 노조 때문에 정리해고가 된 거라고 하면서 취업을 안 시켜 준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마음이 짠해."
좋은 인연의 시작, 결자해지
불교에서는 결과를 만드는 내적·직접적 원인 '인(因)'과 외적·간접적 원인 '연(緣)'을 합해 인연이라 부르고, 모든 현상은 인연에 의해 발생했다가 인연에 의해 소멸한다고 본다. 콩 심고 팥 나기를 바라는 것이나, 나쁜 일을 하고 좋은 결과를 바라는 것은 이러한 인연법에 어긋난다. 임재춘씨는 위의 책에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는데, 요즘 우리는 사람과의 연을 쉽게 생각하고 돈에 매여 자신만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불교의 어느 경전에는 옷깃을 한 번 스치기 위해서는 전생에 5백겁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한 나라에 같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1천겁의 인연이, 하루 동안 길을 동행하기 위해서는 2천겁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인간계의 4억 3200만 년을 1겁이라고 한다는데, 30년이 다 되어가는 재춘씨와 콜텍·박영호 사장은 몇 겁의 인연이 있었던 것일까?
재춘씨가 콜텍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던 2000년에 개봉한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는 많은 관객들이 기억하는 배우 이병헌(서인우 역)의 인연에 관한 대사가 나온다.
"이 지구상 어느 한 곳에 요만한 바늘 하나를 꽂고 저 하늘 꼭대기에서 밀씨를 또 딱 하나 떨어뜨리는 거야. 그 밀씨가 나풀나풀 떨어져서 그 바늘 위에 꽂힐 확률. 그 계산도 안 되는 기가 막힌 확률로 만난 거. 그걸 인연이라고 부르는 거다." 그리고 이병헌은 이야기한다. "인연이라는 게 좀 징글징글하지?"
그렇다. 징글징글한 13년 인연이다. 중학생이었던 딸이 직장인이 되어버린 세월, 검던 중년의 머리가 환갑을 눈 앞에 둔 허연 머리로 변해버린 세월, 고공농성·점거농성·단식농성·노숙농성 죽는 거 빼고 다 해본 세월. 그 징글징글한 세월, 징글징글한 인연. 이제는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너무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콜텍 사측이 해고노동자들의 소박한 요구를 수용하고 잘 마무리가 되어 해고노동자들이 가족·친구·지인들과 편안한 마음으로 따뜻한 밥 한 끼 먹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책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혜민 스님)에는 "좋은 인연이란? 시작이 좋은 인연이 아닌 끝이 좋은 인연입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시작은 나와 상관없이 시작되어도 인연을 어떻게 마무리하는가는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결자해지(結者解之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뜻으로, 일을 저지른 사람이 그 일을 해결하여야 한다는 말. Daum 사전)일 거라 생각한다.
콜텍의 해고노동자들은 지난 13년 동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이제 콜텍 박영호 사장 차례다. 박영호 사장이 결자해지 해야 할 때이다. 2019년 4월 15일이 그 날이 되기를 바란다.
임재춘씨의 단식농성 35일(농성 4457일)이 되는 4월 15일 박영호 콜텍 사장이 참석하는 교섭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번 교섭으로 투쟁이 잘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단식 중인 임재춘씨의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기자 말]
▲ 단식농성 23일차, 콜텍 해고노동자 임재춘 씨 ⓒ 연정
"다 알자녀~"
"착잡해. 노동자들이 맨 날 이렇게까지 하는데, 나라는 손 한번 안 쓰잖아. 일곱 차례 교섭했는데, 회사가 아무 것도 없이 왔어. 3월 7일에는 박영호 사장이 와서 교섭을 했는데도 아무 것도 안 갖고 온 거야. 그러니 어쩔 수 없지. 끝장 선언 했잖여. 어떻게 됐든 끝을 봐야 된다 생각한 거지."
이인근 지회장은 이미 수차례 단식을 했고, 김경봉 조합원은 건강이 좋지 않아 재춘씨 밖에 할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장기화 되는 단식에 체중 감소와 함께 체력은 계속 떨어져 가는데,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의 수척한 얼굴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늘 그랬듯이 기타 이야기만 나오면 재춘씨의 눈이 반짝이고 그의 말이 빨라진다. 재춘씨가 기타노동자로 살아온 지 36년이다. 그에게 기타노동자로 살아온 역사를 물었다.
"그냥 내리고 싶더라고"
재춘씨가 기타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83년이다. 공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 동안 농사를 짓다가 동네 선배를 따라 의정부에 있는 통기타 만드는 성음악기에 입사했다. 재춘씨는 성음악기에서 나무로 기타에 들어가는 부자재를 만드는 성형라인에서 일했다. 회사 기숙사에 살면서 매일 오전 8시 30분에 출근해서 밤 9시까지 일을 했고, 주말에도 무조건 일을 해야 했다.
"일요일 날 교회에 안가면 주차를 까. 성음이 기독교 회사거든. 거기에 불만이 있었지."
재춘씨는 어릴 때만 해도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착실하게 외우는 착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중학교 때 '교회 비리'를 알게 되면서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성음악기에서 교회에 나가는 게 무척 힘들었다. 그러던 중에 1985년 당시 인천 대우자동차에 다니던 친구의 소개로 대우자동차에 입사 지원을 하게 된다.
"그때 삼익악기도 사람 뽑는다고 해서 거기도 이력서를 넣었지. 면접 시간이 2시로 똑같았어. (버스 정류장이) 삼익악기 다음에 대우자동차야. 삼익악기에 내려서 거기 들어간 거야."
재춘씨는 그렇게 대우자동차는 면접도 못보고, 삼익악기에 입사를 했다.
"그냥 삼익악기에서 내리고 싶더라고."
재춘씨의 기타 인연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날 만약 재춘씨가 삼익악기를 지나쳐 대우자동차 정류장에서 내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거기(대우자동차) 안가길 잘했지. 그때 갔으면 나도 해고 당했지. 1750명 대량 정리해고 했잖아."
그날 그가 대우자동차에서 내렸다면 우리는 재춘씨를 콜텍 투쟁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게 되었을까? 대우자동차에서 해고가 되었다면 다른 일을 했을 거라니 하마터면 우리는 재춘씨를 못 만날 뻔 했다. 어찌됐건 기타와 인연을 맺는 재춘씨의 삶이 신기하기만 하다.
힘들어도 악착같이 하던 그런 시대
2001년 정리해고는 피했지만, 2007년에 그는 해고자가 된다.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비정규직보호법'이 만들어진 직후였다. 혹시, 박영호 사장은 '시대의 흐름에 맞게' 콜텍 노동자들을 해고한 후에 그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채워 진정한 '꿈의 공장'을 만들 계획을 세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콜텍 해고노동자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그 꿈이 무산된 것은 아닐까? 재춘씨는 "우리 시대 사회가 그랬던 거"라고 했다.
이렇게 재춘씨의 기타인생 2막이 시작되었다. 삼익악기에서는 콤파운드와 왁스를 섞어 전기기타 광택 내는 일을 했다. 성음악기에서의 경력이 있어 월급도 많이 받았다. 노동 조건은 전 직장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일했던 시간이었다.
"그때는 젊었잖아. 힘들어도 악착같이 하던 그런 시대였지."
삼익악기에서 1년 반 정도 근무한 재춘씨는 1986년 다시 고향에 내려온다. 성음악기에서 공장장 하던 사람이 계룡에 기타 공장을 만든다고 같이 일하자고 했다. 그 회사가 콜텍의 전신인 덕영악기(덕영산업)다. 그리고 1991년 수출용 샘플 기타를 생산하던 덕영악기를 콜텍이 인수하면서 덕영악기 노동자들은 콜텍에 그대로 고용승계 되었다. 재춘씨는 그때만 해도 그것(그대로 고용승계 되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재춘씨의 콜텍과의 질긴 인연이 시작되었다. 콜텍 대전공장은 1994년부터 본격적인 흑자를 냈고, 1997년 IMF이후 환율 상승으로 수입이 크게 늘어 계룡시 두마면 왕대리로 공장을 확장해서 이전했다. 회사는 나날이 성장해 갔지만, 재춘씨를 포함한 콜텍의 노동자들이 평일 오전 8시 30분부터 저녁 9시까지 일을 하고 토요일 격주로 일을 하는 삶에는 변화가 없었다. 재춘씨는 콜텍에서도 완성반 광택 일을 했다.
"기타에서 최고 힘들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 광택 일이야. 사람 몸으로 때우고 해야 되는 거니께. 생산량은 계속 늘었어. 콜텍에서 최고 많이 만들 때는 하루에 350대 400대도 만들었지. 힘든 거는 너무 개인적인 시간이 없는 거? 생산 못하면 더 연장도 해야 되니까. 가족들하고 보내는 시간이 없지."
▲ 콜텍 본사 앞 시민사회 연대단식 농성장 ⓒ 연정
조퇴 월차 쓸라면 4번 결재를 맡아야 했어
재춘씨는 콜텍에서 근무했던 다른 노동자들과 달리 본인이 일하면서 직접적으로 크게 힘든 게 없었다고 했다. 재춘씨는 인정받는 기술자였고 완성라인 관리자이기도 했다. 그는 사실 아쉬울 게 없었다. 재춘씨가 일하는 반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휴가나 조퇴를 쓰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휴가 쓸 생각도 없었어. 일하면 다 돈인데 왜 그걸 그러나(왜 휴가를 쓰나) 했지. 할아버지가 한문이나 '삼강오륜' 같은 거 공부하고 그랬어. 나라에 충성하고, 바른 생활 해야 한다, 부모님한테 무조건 효도해야 한다, 반항하지 마라, 제사를 잘 모셔야 된다. 그런 얘기 듣고 자랐으니께.."
그때만 해도 재춘 씨는' 노동조합 마인드' 보다는 회사가 있어야 노동자도 있다는 '사측 마인드'에 가까웠다. 하지만,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비인간적인 대우와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관리자의 성폭력, 휴가 조차 쓸 수 없는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해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조퇴 월차 쓴다고 하면 나는 잘 해줬어. 근데 위에 가서 다 잘리지. 생산량은 누가 맞추냐고... 조퇴 월차 쓸라면 4번 결재를 맡아야 했어."
콜텍에서는 조퇴나 휴가를 쓰기 위해서는 반장과 라인 팀장, 차장, 공장장 결재를 받아야 했다. 재춘씨가 결재를 올리면 위에 팀장에서 바로 반려가 되었다.
"이인근이 노조 만드는데 조합원 가입해달라고 해서 말없이 (도장) 찍어줬어. 86년 삼익악기 다닐 때도 노조 만든다 해서 도장 찍어 줬거든. 노조가 있으면 좋다는 건 알았으니께."
2006년, 재춘씨는 이렇게 노동조합에 가입을 한다. 노동조합 간부도 아니었고, 관련된 교육 한 번 받은 게 없었다. 노조라는 게 있으면 좋다는 걸 알아서 가입한 거, 그게 다였다고 했다. 노조 가입한 지 1년 후에 정리해고를 당하고, 투쟁을 시작했고, 콜텍과의 인연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게 13년이다.
누가 됐든 책임을 져야 되는 거 아냐
"억울하기도 하고... 내가 대한민국 기타의 최고 고참이고, 대한민국 기타의 역사잖아. 대한민국 기타 공장이 문 닫는 걸 다 봤잖아. 어떻게 됐든 누가 됐든 책임을 져야 되는 거 아냐. 그런 얘기 해줄 사람이 필요한 거지. 내가 마음 먹었지. 내가 한다. 그런데 이렇게 길어질 줄 알았으면 안 했지. 처음에 5~6년 잡고 했는데, 더 길어진 거지. "
임재춘씨가 쓴 농성일기를 모아 출간한 책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2016, 네잎클로바)에는 그의 첫 직장이자 그가 기타와 처음 인연을 맺었던 성음악기에 관한 글이 나온다. 재춘씨는 콜텍에 있다가 성음악기로 간 동료들에게 성음악기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새로운 성음악기 경영주는 노동자들에게 공을 돌리고 소통하며 좋은 인연을 쌓아 그 덕분에 경영도 안정적이라고 했다.
재춘씨는 성음악기와 콜텍을 비교하면서 경영주와 좋은 인연을 맺는 기준을 경영주-직원 간의 소통이라고 했다. 콜텍 사장은 기타를 돈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직원과 소통을 하지 않고 정리해고를 해서 좋은 인연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콜텍은 우리랑 좋은 인연이 될 수가 없지. 합의가 되도 마음에는 항상 상처가 남을 거 같아."
하지만, 투쟁을 하면서 맺은 좋은 인연도 많다. 투쟁을 함께 만들고 고민을 나누는 많은 문화 활동가와 종교인, 시민, 13년 동안 한결 같이 함께 해주는 대전충북지역 동지들과 콜텍지회 조합원들이 그렇다. 지금도 매주 주말이면 대전에서 콜텍지회 조합원들이 올라온다.
"조합원들이 노조 때문에 정리해고가 된 거라고 하면서 취업을 안 시켜 준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마음이 짠해."
▲ 2019년 1월, 콜텍 기타노동자 끝장투쟁 돌입 기자회견 후 진행된 행진 장면. 맨 오른쪽이 임재춘 씨 ⓒ 연정
좋은 인연의 시작, 결자해지
불교에서는 결과를 만드는 내적·직접적 원인 '인(因)'과 외적·간접적 원인 '연(緣)'을 합해 인연이라 부르고, 모든 현상은 인연에 의해 발생했다가 인연에 의해 소멸한다고 본다. 콩 심고 팥 나기를 바라는 것이나, 나쁜 일을 하고 좋은 결과를 바라는 것은 이러한 인연법에 어긋난다. 임재춘씨는 위의 책에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는데, 요즘 우리는 사람과의 연을 쉽게 생각하고 돈에 매여 자신만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불교의 어느 경전에는 옷깃을 한 번 스치기 위해서는 전생에 5백겁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한 나라에 같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1천겁의 인연이, 하루 동안 길을 동행하기 위해서는 2천겁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인간계의 4억 3200만 년을 1겁이라고 한다는데, 30년이 다 되어가는 재춘씨와 콜텍·박영호 사장은 몇 겁의 인연이 있었던 것일까?
재춘씨가 콜텍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던 2000년에 개봉한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는 많은 관객들이 기억하는 배우 이병헌(서인우 역)의 인연에 관한 대사가 나온다.
"이 지구상 어느 한 곳에 요만한 바늘 하나를 꽂고 저 하늘 꼭대기에서 밀씨를 또 딱 하나 떨어뜨리는 거야. 그 밀씨가 나풀나풀 떨어져서 그 바늘 위에 꽂힐 확률. 그 계산도 안 되는 기가 막힌 확률로 만난 거. 그걸 인연이라고 부르는 거다." 그리고 이병헌은 이야기한다. "인연이라는 게 좀 징글징글하지?"
그렇다. 징글징글한 13년 인연이다. 중학생이었던 딸이 직장인이 되어버린 세월, 검던 중년의 머리가 환갑을 눈 앞에 둔 허연 머리로 변해버린 세월, 고공농성·점거농성·단식농성·노숙농성 죽는 거 빼고 다 해본 세월. 그 징글징글한 세월, 징글징글한 인연. 이제는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너무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콜텍 사측이 해고노동자들의 소박한 요구를 수용하고 잘 마무리가 되어 해고노동자들이 가족·친구·지인들과 편안한 마음으로 따뜻한 밥 한 끼 먹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책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혜민 스님)에는 "좋은 인연이란? 시작이 좋은 인연이 아닌 끝이 좋은 인연입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시작은 나와 상관없이 시작되어도 인연을 어떻게 마무리하는가는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결자해지(結者解之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뜻으로, 일을 저지른 사람이 그 일을 해결하여야 한다는 말. Daum 사전)일 거라 생각한다.
콜텍의 해고노동자들은 지난 13년 동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이제 콜텍 박영호 사장 차례다. 박영호 사장이 결자해지 해야 할 때이다. 2019년 4월 15일이 그 날이 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민중언론 참세상>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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