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아픔... '너븐숭이'의 비극
제주 4·3 역사탐방,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너븐숭이 기념관
▲ 무덤터가 된 북촌리 너븐숭이(넓은 돌밭). ⓒ 김종성
슬픔이란 대체로 눈물로 한숨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말과 글로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4·3의 슬픔은 눈물로도 필설로도 다 할 수 없다. 그 사태를 겪은 사람들은 덜 서러워야 눈물이 나온다고 말한다. - 현기영 <목마른 신들> 중에서
1947년 3·1절 기념대회에서 기마경찰이 민간인에게 발포한 총에 6명이 죽으면서 촉발된 제주 4·3 항쟁. 사망자 중 1명은 아기 업은 여성이었다. 민심은 들끓었고 3월 22일에는 제주도 전체의 총파업으로 이어진다.
총파업에는 제주도의 많은 행정기관(23개)과 학교(105개) 우체국 전기회사 등 제주 직장인의 95%에 달하는 4만여 명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게다가 제주 경찰의 20%도 파업에 동참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당시 경무부장(현 경찰청장)이었던 조병옥 박사는 5백 명이 넘는 서북청년회을 응원경찰대로 제주도에 보내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하게 된다.
▲ 제주시 봉개동 중산간 지역에 자리한 4.3 평화공원. ⓒ 김종성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조사 결과, 공식적으로 밝혀진 사망자만 1만4032명(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1만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 1764명 외)에 달한다.
▲ 올해로 71주기을 맞은 제주 4.3 ⓒ 김종성
"해방이 되니까 일제 때 노동자로 갔던 사람, 징병 징용 갔던 사람들이 많은 기대를 품고 귀향했는데, 제주도에선 먹고살 길이 없었어. 4·3을 두고 남로당 어쩌구 하는데 그건 지엽적인 문제야. 문제는 해방되었지만 친일파들은 그대로 있고 대학을 다녔어도 취직이 안 되고, 경찰들이 모리배 노릇을 하고 탄압하니까 이에 반발한거야" - 강순현 (당시 27세, 오현중교사, 미군정 관재처 불하과장 역임)
70년이 지나도 선명한 북촌리 '너븐숭이'의 비극
▲ 올레길따라 해안가를 걷다보면 만나는 소담한 마을 북촌리. ⓒ 김종성
▲ 북촌리 희생자 원혼 위령비. ⓒ 김종성
마을의 집들도 다섯 채만 남기고 모두 불탔다. 마을, 오름 등 제주 섬 곳곳에 학살현장이 남아있지만, 북촌리는 당시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입은 곳이어서 비극을 상징하는 마을이 되었다.
북촌초등학교 인근 너븐숭이(넓은 돌밭)에서 무장대의 습격을 받아 부대원 2명이 희생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군인들은 광란의 학살극을 벌였다. 북촌리 학살은 학교를 중심으로 동·서쪽 들과 밭에서 자행됐다. 이날 학살을 주도한 2연대 3대대는 서북청년회 위주로 편성돼 '서북대대'로 불렸다.'
서북청년회는 북한에서 토지개혁과 친일청산 등 정치 변화에 내몰려 남한으로 쫓기다시피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좌익 혹은 사회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컸다. 그러다보니 '제주는 빨갱이 섬'이라는 말에 분개한 나머지 제주도민을 죽이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경찰 직함을 받았으나 급료 없이 제주도로 보내졌다. 때문에 제주도민을 약탈하기도 했다.
"우리는 어느 지방에서 좌익 분자들이 날뛰니 와달라고 하면 서북청년회를 보냈어요. 어떤 객관적인 근거는 없었어요. 그 한 예가 제주도에요. 경무부장(경찰청장)이었던 조병옥 박사가 4·3이 나자마자 제주도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다며 저를 불렀어요. 반공정신이 투철한 사람들로 경찰 전투대를 편성한다며 5백 명을 보내달라기에 보낸 적이 있습니다." - 문봉제(당시 서북청년회 단장)
▲ 북촌리 너븐숭이 기념관. ⓒ 김종성
▲ 북촌리 마을 한씨 가족의 비극을 그린 강요배 화백의 그림 <젖먹이>. ⓒ 기념관내 그림 촬영
한 어머니가 아기를 안은 채 싸늘히 식어가고 있고, 배고파 울던 아기는 죽은 엄마의 가슴에 매달려 젖을 빨고 있는 그림이다. 실제 북촌리 마을에서 희생당한 한씨 가족의 사례를 담았다고 한다. 그림 위에 '더 이상 죽이지 마라'로 시작되는 시가 써져있다.
이 장면은 당시 학교 운동장에 모였던 모든 주민의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유족이자 기념관 안내를 했던 마을주민 할아버지는 <순이 삼춘> 이야기를 해주며 "남자들은 그때 거의 다 죽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당시 제주경찰서 차량계 소속 경찰로서 그날 대대장이 승차한 차량을 운전했던 김병석(78세) 씨는 다음과 같이 현장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앰블런스 안에서 대대장을 포함한 지휘관들이 의논을 하는데, 기관총을 걸고 집중사격 하자는 등 여러 가지 방안이 나왔다. 그런데 한 장교가, "우리 사병들은 적을 사살해 본 경험이 없는 군이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적을 사살하는 경험도 쌓을 겸 몇 명 단위로 데려가서 총살시키자"는 제안을 했는데 그게 채택 되었다.
그때부터 군인들은 주민들을 학교 동쪽 옹팡밭과 서쪽 너븐숭이 일대 등으로 끌고가 총살하기 시작했다.
▲ 20여기의 돌무더기로 이루어진 너븐숭이 애기무덤. ⓒ 김종성
▲ 옴팡밭에 널부러진 시신을 상징하는 비석. ⓒ 김종성
돌무덤을 지나 조금 가니 '옴팡밭'이 나온다. 당시 시신이 밭에서 뽑아 던져놓은 무처럼 쌓여있던 곳이라고 한다. 바닥의 돌들은 아무렇게나 엎어져있던 시신을 상징한다고 한다.
아직 눈도 떠보지 못한 아기들일까
제대로 묻어주지도 못한
어머니의 한도 함께 묻힌 애기 돌무덤
사람이 죽으면
흙 속에 묻히는 줄로만 알았던 우리 눈이
너무 낯선 돌무덤 앞에
목이 메인다
목이 메인다
- 너븐숭이 애기무덤 앞 비석의 글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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