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화장실이 되어버린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 자리
[가나자와 편①]일본 가나자와성에 남겨진 윤봉길 의사의 이상(理想)
가나자와 여행 속 역사의 발자취
가나자와(金沢)! 새롭게 떠오르는 일본 여행지이다. 온천이 유명하고, 해산물이 맛있으며, 일본 3대 정원과 물에 젖지 않는 이상한 수영장이 있는 곳. 문화와 예술 그리고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이곳에 아픈 우리 역사도 함께 숨 쉬고 있다.
'도시락은 잊더라도 우산은 잊지 마라'(弁当忘れても傘忘れるな)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나자와는 비와 눈이 자주 내리고 변덕스러운 날씨로 유명하다. 내가 가나자와를 방문한 날도 어김없이 흐리고 으스스했다.
딱! 을씨년스러웠다. '을씨년스럽다'는 '을사년스럽다'가 변한 것으로, 1905년(을사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사실상 속국이 되어버린 날의 비통함이 담겨 있다.
가나자와역(金沢駅)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간 곳은 모리모토역(森本駅)이다. 오후 4시 35분쯤, 모리모토역에 도착하는 전철을 탔다. 오후 4시 35분은 윤봉길 의사가 가나자와역을 지나 모리모토역에 하차한 시각이다.
1932년 12월 18일, 윤봉길 의사는 오사카에서 사형 집행을 위해 비밀리에 가나자와로 압송된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해 훙커우공원의거(도시락 폭탄 사건)로 상해파견군 제9사단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였다.
상해에서의 공개 처형도 언급되었지만, 김구 선생의 체포를 위해 윤봉길 의사의 사형 집행은 계속해서 연기되었다. 그러던 도중 국제여론은 악화되었고, 이를 의식한 일제는 윤봉길 의사를 오사카성 안에 있는 제4사단 육군위수형무소에 이감시키기로 결정한다.
윤봉길 의사는 11월 18일 상해에서 호송되어, 11월 20일 오사카성 육군위수형무소로 이감된다. 그리고 오사카에서 사형이 집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가 오사카로 이감되자, 오사카 반제국주의 동맹에서 윤봉길 의사의 석방을 요구하는 전단지를 발행하기 시작한다. 오사카 반제국주의동맹은 재일 조선인들이 많았으며,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일제를 향한 재일 조선인들의 민심은 날카로워져만 갔다. 불안함을 느낀 일제는 오사카에서의 사형 집행을 철회하고 삼엄한 경비 속에 윤봉길 의사를 가나자와로 압송시킨다. 가나자와시에 있는 모리모토역에 하차한 윤봉길 의사는 가나자와성 안에 있는 위수구금소로 보내진다. 윤봉길 의사는 위수구금소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19일) 아침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가나자와성 위수구금소는 현재 어떤 모습일까?
윤봉길 의사가 뜬 눈으로 지새운 위수구금소 건물은 현재 철거된 상태이며, 그 자리에 공중화장실이 들어섰다. 가나자와성 하시즈메문의 입장표 발권소 건너편에 있는 공중화장실이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가나자와성에 남아있는 역사의 흔적
나는 (구)위수구금소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누이야구라 터'(戌亥櫓跡)에 올라갔다. 야구라(櫓)는 망루(望樓)라는 뜻으로 망을 보기 위해 높이 세운 다락집을 의미한다. '이누이야구라 터'로 올라가는 길에는 제9사단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올라가는 동안 전쟁의 아픔을 되새길 수 있다. 나는 1941년도에 작성된 (구)가나자와성 내 배치도를 기반으로 역사의 흔적을 거슬러 올라가 봤다.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역사의 흔적은 가나자와성 도조・쓰루마루 창고(金沢城土蔵 ・鶴丸倉庫)이다. 당시, 이 건물은 제9사단의 군복을 보관하던 피복고(被服庫)로 사용되었다. 제9사단은 상해파견군으로 윤봉길 의사의 상해 훙커우공원의거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군대이다.
(구)피복고 건너편에는 다소 기묘한 모양의 입구가 보이는데, 제9사단의 탄약고로 들어가는 입구 중 하나였다. 현재 탄약고는 철거되었으나, '이누이야구라 터'로 올라가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모형을 통해, 그 형태를 좀 더 명확히 예측할 수있다.
(구)피복고를 지나 산길을 따라 '이누이야구라 터'로 올라가다보면, 풀 숲에 세워진 '러일전쟁 전몰자 기념비'(日露戦没記念碑)가 보인다. 전몰자는 전사자(戰死者)를 의미한다. 제9사단의 제일 큰 업적이 러일전쟁(1904-1905)의 승전이다.
때문에, 가나자와에서 조금만 관심 있게 둘러보면 러일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식민지의 한(恨) 서린 역사를 가진 나로서는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윤봉길 의사의 이상(理想)이 느껴지는 순간
'이누이야구라 터'에 다다르자 하늘에서 거센 비바람과 함께 우박이 떨어졌다. 변덕스러운 날씨는 우여곡절 많은 우리의 지난 역사를 대변해 주는 듯하였다. '이누이야구라 터'에서 내려다보는 (구)위수구금소는 장난감마냥 너무나도 작았다.
저 작은 곳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큰 뜻을 저버리지 않은 윤봉길 의사의 높은 기상이 느껴졌다. 1930년 10월 18일 윤봉길 의사가 칭타오에서 어머니께 보낸 서신 중,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그의 이상이 현실이 된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이상 또한 현실이 되길 바란다.
가나자와(金沢)! 새롭게 떠오르는 일본 여행지이다. 온천이 유명하고, 해산물이 맛있으며, 일본 3대 정원과 물에 젖지 않는 이상한 수영장이 있는 곳. 문화와 예술 그리고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이곳에 아픈 우리 역사도 함께 숨 쉬고 있다.
딱! 을씨년스러웠다. '을씨년스럽다'는 '을사년스럽다'가 변한 것으로, 1905년(을사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사실상 속국이 되어버린 날의 비통함이 담겨 있다.
가나자와역(金沢駅)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간 곳은 모리모토역(森本駅)이다. 오후 4시 35분쯤, 모리모토역에 도착하는 전철을 탔다. 오후 4시 35분은 윤봉길 의사가 가나자와역을 지나 모리모토역에 하차한 시각이다.
▲ 모리모토역에 전차 들어오는 풍경. ⓒ 김보예
1932년 12월 18일, 윤봉길 의사는 오사카에서 사형 집행을 위해 비밀리에 가나자와로 압송된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해 훙커우공원의거(도시락 폭탄 사건)로 상해파견군 제9사단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였다.
상해에서의 공개 처형도 언급되었지만, 김구 선생의 체포를 위해 윤봉길 의사의 사형 집행은 계속해서 연기되었다. 그러던 도중 국제여론은 악화되었고, 이를 의식한 일제는 윤봉길 의사를 오사카성 안에 있는 제4사단 육군위수형무소에 이감시키기로 결정한다.
윤봉길 의사는 11월 18일 상해에서 호송되어, 11월 20일 오사카성 육군위수형무소로 이감된다. 그리고 오사카에서 사형이 집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가 오사카로 이감되자, 오사카 반제국주의 동맹에서 윤봉길 의사의 석방을 요구하는 전단지를 발행하기 시작한다. 오사카 반제국주의동맹은 재일 조선인들이 많았으며,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일제를 향한 재일 조선인들의 민심은 날카로워져만 갔다. 불안함을 느낀 일제는 오사카에서의 사형 집행을 철회하고 삼엄한 경비 속에 윤봉길 의사를 가나자와로 압송시킨다. 가나자와시에 있는 모리모토역에 하차한 윤봉길 의사는 가나자와성 안에 있는 위수구금소로 보내진다. 윤봉길 의사는 위수구금소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19일) 아침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가나자와성 위수구금소는 현재 어떤 모습일까?
윤봉길 의사가 뜬 눈으로 지새운 위수구금소 건물은 현재 철거된 상태이며, 그 자리에 공중화장실이 들어섰다. 가나자와성 하시즈메문의 입장표 발권소 건너편에 있는 공중화장실이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 (구)가나자와 육군 위수구금소 사진. ⓒ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 (현)공중화장실 (구)위수구금소 위치(현장 사진). ⓒ 김보예
가나자와성에 남아있는 역사의 흔적
나는 (구)위수구금소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누이야구라 터'(戌亥櫓跡)에 올라갔다. 야구라(櫓)는 망루(望樓)라는 뜻으로 망을 보기 위해 높이 세운 다락집을 의미한다. '이누이야구라 터'로 올라가는 길에는 제9사단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올라가는 동안 전쟁의 아픔을 되새길 수 있다. 나는 1941년도에 작성된 (구)가나자와성 내 배치도를 기반으로 역사의 흔적을 거슬러 올라가 봤다.
▲ 1941년 (구)성내배치도 원본. ⓒ 김보예
▲ 1941년도 (구)성내배치도와 2019년도 가나자와성 관광지도. ⓒ 김보예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역사의 흔적은 가나자와성 도조・쓰루마루 창고(金沢城土蔵 ・鶴丸倉庫)이다. 당시, 이 건물은 제9사단의 군복을 보관하던 피복고(被服庫)로 사용되었다. 제9사단은 상해파견군으로 윤봉길 의사의 상해 훙커우공원의거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군대이다.
▲ (구)피복고. ⓒ 조현준
(구)피복고 건너편에는 다소 기묘한 모양의 입구가 보이는데, 제9사단의 탄약고로 들어가는 입구 중 하나였다. 현재 탄약고는 철거되었으나, '이누이야구라 터'로 올라가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모형을 통해, 그 형태를 좀 더 명확히 예측할 수있다.
▲ (구)탄약고의 입구. ⓒ 조현준
▲ 이누이야구라 터에서 본(구)탄약고의 전경(모형). ⓒ 조현준
(구)피복고를 지나 산길을 따라 '이누이야구라 터'로 올라가다보면, 풀 숲에 세워진 '러일전쟁 전몰자 기념비'(日露戦没記念碑)가 보인다. 전몰자는 전사자(戰死者)를 의미한다. 제9사단의 제일 큰 업적이 러일전쟁(1904-1905)의 승전이다.
때문에, 가나자와에서 조금만 관심 있게 둘러보면 러일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식민지의 한(恨) 서린 역사를 가진 나로서는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 러일전쟁 전몰자 기념비. ⓒ 조현준
윤봉길 의사의 이상(理想)이 느껴지는 순간
'이누이야구라 터'에 다다르자 하늘에서 거센 비바람과 함께 우박이 떨어졌다. 변덕스러운 날씨는 우여곡절 많은 우리의 지난 역사를 대변해 주는 듯하였다. '이누이야구라 터'에서 내려다보는 (구)위수구금소는 장난감마냥 너무나도 작았다.
저 작은 곳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큰 뜻을 저버리지 않은 윤봉길 의사의 높은 기상이 느껴졌다. 1930년 10월 18일 윤봉길 의사가 칭타오에서 어머니께 보낸 서신 중,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그의 이상이 현실이 된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이상 또한 현실이 되길 바란다.
▲ (구)가나자와 육군 위수구금소 전경. ⓒ 조현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광양시민신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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