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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원 '빠루 사진'과 "예쁜 우리 배현진"이 말하는 것

[어느 '중년 한남' 안치용의 페미니즘 이야기 4] 아그네스와 배현진, 임이자, 그리고 나경원

등록|2019.05.03 11:59 수정|2020.11.17 10:20
 

'빠루' 들어보이는 나경원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지난 26일 오전 경호권이 발동된 국회 본관 의안과 앞에서 긴급의원총회를 열고, 이날 새벽 의안과 출입문 개문을 위해 국회 경위들이 사용했던 쇠지렛대(일명 빠루)를 입수해 들어보이고 있다. ⓒ 남소연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은 전후 독일의 사회상을 파헤친 고전이다. 20세기 전반기 독일과 유럽의 역사를 단치히에서 뒤셀도르프로 옮겨가며 펼쳐낸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소설에서 가장 선명하게 회자되는 장면은 부두의 '말대가리와 장어'가 아닐까.

바다에서 건져낸 (물론 죽어서 몸에서 분리된) 말 대가리에서 장어가 쏟아져 나오는 모습을 보며 주인공 오스카의 어머니 아그네스는 모든 것을 다 토해 버린다. 이 사건은 이후 아그네스의 죽음으로 연결된다.

문학평론에서는 이 장면을 오스카의 아버지 마체라트에 의한 아그네스 학대로 해석하기도 한다. 여기서 학대는 '성적 학대'다. 대표적인 강장식품으로 분류된 장어는 이미 그 모양 때문에 확고한 성적 상징으로 사용되는데, 소설에서는 관능적인 출현이 아니라 기괴하고 공포스러우며 폭력적인 출현으로 그려진다. 소설 속에서 여러모로 흥미로운 인물이자 다층적 의미를 가진 아그네스는 당대 역사와 가부장(제)에 의해 희생된다.

여성 정치인을 소비하는 '상투성'

선거제와 개혁법안의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을 두고 요즘 국회가 시끄럽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이 사태의 중심에서 전례 없는 존재감을 발휘했다. 나 원내대표의 존재감은, 개인의 기억이고 정치에 그다지 정통하지 못하다는 한계를 전제하고 말하자면, 지지세력 내에서도 대체로 양가적이었지 싶다. 기회에 민감하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인물이란 느낌이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아무튼 이번 국면에서는 그러한 양가성을 불식하고 자신만의 뚜렷한 색깔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나 원내대표의 존재감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보도사진은 '빠루 든 나경원'이다. 나 원내대표 스스로 이 한 장의 사진이 만들어낼 이미지와 정치적 효과를 감안했을 터인데, 본인의 기대를 훨씬 넘어선 효과를 거두지 않았을까. 폭력적 충돌의 현장에서 단호하게 맞서 싸우는 강인한 정치지도자의 이미지. 아마도 나 원내대표가 의도한 효과의 핵심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사진에서 앞에서 인용한 그라스 소설의 그 장면을 떠올렸다. 패스트트랙을 둘러싼 현실정치에 대한 페미니즘적 평가와, 그 평가에 기반한 관점에 따라 상투적이라고 보일 수도 있는 정신분석학적 해석이 무관해 보이는 두 장면을 연결 짓게 만들었다.

이야기를 전개하기에 앞서 나 원내대표가 '여성'으로 소비된 정황을 간단하게 확인하고 넘어가자. 어느 일간지는 이 사진을 넣은 기사에서 <뺏은 '빠루' 든 나경원 "할 수 있는 수단 다해 오늘도 온몸으로 막겠다>는 제목을 달았다. 제목만으로는 '온몸으로 막는'의 주어가 나경원이다.

기사를 읽어보면 주어는 "저희"로, 즉 자유한국당이다. 나 원내대표가 한 말은 "저들은 국회법을 위반했고, 국회 관습법도 위반했다.(...) 저희는 오늘도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통해 온몸으로 저항하겠다"이다. 편집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여성의 성적 소비'가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비친다.

댓글에서도 나 의원에 대한 '성적 소비'는 이어진다. "온몸으로"라는 제목을 보고 "성적수치심이 느껴지니 몸 거부한다", "온 남성을 성추행한 거다"라는 댓글이 달린다. 어떤 누리꾼들에게 나 의원은 이렇게 '성추행범' 취급을 당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나 원내대표에게 성추행 발언을 한 것이나 다름 없다. 나 원내대표 등 여성 정치인에 대한 이런 식의 성 학대적, 여성혐오적 소비는 일상적이다.

성적 소비에 대한 '선별적' 대응
  

광화문집회 참석한 한선교, 배현진자유한국당 한선교 사무총장과 배현진 당협위원장이 지난 27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앞에서 열린 문재인 정권 규탄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 권우성


이런 방식의 성적 소비는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이들을 공격하는 한 방편이지만 정치적 견해가 같은 이들 사이에서는 자제된다. 또한 성적 소비, 혹은 성적 폭력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당하는 입장에서는 정치적 잣대에 의거하여 선별적으로 대응하는 '기현상'도 목격된다.

지난달 27일 배현진 자유한국당 송파을 당협위원장과 같은 당 한선교 사무총장이 사회를 맡은 자유한국당의 광화문 집회의 한 장면을 살펴보자. 한 사무총장이 "여러분, 우리 배현진이 이러지 않았다, 늘 예쁜 아나운서였는데 이 나라가, 문재인의 나라가 배현진, 예쁜 우리 배현진을 민주투사로 만들었다"는 발언에서 '잔인한 일상'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뉴스 보도로만 판단하자면 배 위원장은 무감각해 보인다. 배 위원장은 "저는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37세 청년이다. 일하느라 시집도 못 가고 부모님을 모시며 열심히 살았다"고 자신을 "시집도 못간 청년"으로 소개했다. 배 위원장이 한 총장의 발언을 문제 삼았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게 당연해 보인다. 한 사무총장이나, 배 위원장, 그리고 집회에 참가한 청중까지 아무도 일상의 폭력을 자각하지 못했다.

자유한국당 임이자 의원의 이른바 '성추행 논란'에 이르면 사태는 전혀 다른 차원에 도달한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24일 패스트트랙 지정에 반발해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문희상 국회의장실을 항의 방문한 과정에서 임 의원은 팔을 벌려 나가려는 문 의장을 막았다. 임 의원이 "의장님 이거 손대면 성희롱이에요"라고 말하자 문 의장이 임 의원의 볼을 감싼 이후, 임 의원은 강제추행 및 모욕 등의 혐의로 문 의장을 고소했다.

문제는 같은 당 이채익 의원이 임 의원을 옹호하기 위해 한 발언이었다. 24일 비상의원총회에서 이 의원은 "키 작은 사람은 좀 열등감이 있다. 결혼도 포기하면서 이곳까지 온 어떻게 보면 올드미스인데, '못난' 임이자 의원 같은 사람은 모멸감을 주고 조롱하고 수치심을 극대화하고 성추행해도 되느냐"고 말했다.

그런데 임 의원은 이 의원이 '선한 의도'로 한 이야기이기에 문제가 없지만 문 의장은 "용서받지 못할 행동을 했다"고 상반되게 대처했다.

문 의장의 행동이 적절하지 못했지만, 전반적인 상황을 고려했을 때 성추행이라기보다는 해프닝으로 봐야 한다는 여성단체들의 성명이 이 사건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해석이지 싶다. 한국여성단체연합과 한국여성의전화 등 30여 개 여성단체는 지난  25일 연대성명을 내고 "해프닝을 성추행 프레임으로 만들고, 미투 운동의 상징인 하얀 장미를 사용해 집단행동에 나선 한국당 여성위원회는 여성들의 용기로 주도된 미투 운동의 정신과 취지를 심각하게 훼손한다"며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정쟁의 도구로 삼는 자유한국당을 규탄했다.

페미니즘은 보편적 진보의 편에 서야
  

흰 장미 들고 기자회견장 찾은 한국당 여성의원들자유한국당 여성의원과 중앙여성위원회 위원들이 지난 24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 흰 장미를 들고 등장해 "(임이자 의원 등) 동료의원이 의장실 항의방문 당시 문희상 국회의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라고 주장하며 문 의장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이날 회견에는 신보라, 박순자, 송희경, 박인숙, 김정재, 전희경 의원이 참석했다. ⓒ 남소연


일련의 사건에서 자유한국당의 여성정치인들은 흑백논리로 나누면 아무튼 '피해자'다. 그런데도 적어도 나는 그들이 피해자라는 판단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분명 사회적으로 여성으로 식별된 그들이 성적 대상화에 처하고 성적 혐오의 맥락에 갇혀서 소비되고 있지만, 그라스 소설의 아그네스에게서 느끼는 공감이나 연민 같은 걸 이들에게선 전혀 느끼지 못한다. 특별히 임이자 의원의 행태에는 더더욱 공감하지 못할뿐더러 모종의 불쾌함까지 느끼게 된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젠더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는, 단순화해서 설명하면 '(생물학적인) 섹스는 없고 (사회학적인) 젠더만 있다'고 말한다. 사회적으로는 젠더만 있고 섹스는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다. 버틀러에 기대어 말하면 나 원내대표, 임 의원, 배 위원장 같은 이들이 '젠더'적으로는 사실상 여성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젠더'적으로는 사실상 여성이 아니라는 나의 표현이 또 다른 여성혐오가 아님을 유념해 주길 바란다.

그들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가부장제 폭력에 순응하는 한편 정치적 목적을 위해 스스로를 성적 대상화 기제에 기꺼이 던져 넣는다. 동시에 여성혐오의 희생양으로 코스프레한다. 임이자 의원에게서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우리가 논의한 범위 내에서 나 원내대표는 임 의원이나 배 위원장이 보인 몰염치나 무감각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성적으로 소비된 전투적인 여성 정치인일 뿐 이 국면에서 '페미니즘' 관점에서 특별한 흠결을 드러내지 않은 나 원내대표에게서, 그렇다면 아그네스에게서 느낀 것과 같은 공감과 지지를 찾아내어야 하였을까.

'성공'한 정치인으로서 나 원내대표는 확실히 임 의원처럼 자기 몸을 던져 수모를 자초하는 험한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임 의원이나 배 위원장 등과 함께 그가 만들어가는 세상은 여성혐오가 일상적으로 무감각하게 작동하고, 가부장제와 기득권이 결합한 억압의 질서가 온존하고 확대되는 곳이라는 혐의를 거둘 수가 없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으나, 난 페미니즘이 보편적 진보의 편에 서야 한다고 믿는다. 보편적 진보에 역행하는 사람은 결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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