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만 그냥 두었으면 세계적 관광지가 되었을 텐데
[대구 완전 학습] 호수와 고인돌의 도시였던 대구, 30여년 만에 살풍경으로 추락
오늘날의 대구는 깊숙한 내륙 지역으로 인식되지만 아득한 옛날에는 그와 정반대였다. 공룡들이 많이 살았던 1억4500만 년-6500만 년 전의 대구는 거대한 호수였다. 호수는 대구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경상북도 안동, 남쪽으로 전라남도 광양에 이르기까지 평평한 물결을 일렁였다.
경상북도는 낙동강과 금호강이 계속 흙을 실어날라 거대 호수를 메운 끝에 마침내 땅으로 변했다. 그래도 지대가 낮은 곳은 여전히 호수로 남았다. 지금도 전국 1만7505개 호수의 32%인 5,547개 호수가 경상북도에 있다. 당연히 대구에도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도시화가 본격화된 1980-1990년대 이전까지는 무수한 호수들이 있었다.
일제가 강제로 메운 천왕당지
대구에서 가장 안타까운 매립 사연을 가진 연못은 천왕당지(天王堂池)이다. 천왕당지의 본래 이름은 남지(南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남쪽은 달성의 남쪽이라는 뜻이다. 오늘날의 달성공원은 신라가 서기 261년(첨해왕 15)에 달벌성을 축성한 현장인 데서 짐작되듯이 예로부터 대구의 기준점이었다.
천왕당지는 1928년에 매립되었다. 일제는 비산동과 내당동 등지의 고분을 마구 파헤쳐 그 흙으로 천왕당지를 메운 후, 달서문 터(중구 경상감영길 1) 앞에서 동산 파출소 터(동산동 15) 앞 오토바이 골목 일대에 자리잡고 있던 서문시장을 그곳으로 강제 이전시켰다. 일제로서는 1919년 3월 8일 대구 독립만세 운동의 발원지인 서문시장을 본래 자리에 그대로 두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경북대학교 뒤쪽 복현오거리 일대의 배자못, 대구교대 앞의 대명동 영선못, 달성고등학교 일원의 감삼못, 원대 지하도 둘레의 비산동 날뫼못, 수성구청 주변의 범어못, 송라시장 일대의 신암동 소래못, 달성공원 서쪽의 사리못, 대구MBC 앞의 한골못, 메워져 서구청 자리가 된 평리동 들마못, 역시 메워져 효목공원이 된 동구 효목동 소못 등은 일제가 아니라 우리가 없앴다. 대구에는 본래 크기의 30%가량만 잔존한 성당못, 그리고 일제 강점기 때의 본래보다 조금 더 커진 수성못이 남아 있는 호수의 전부이다.
대불지의 흔적을 말해주는 이름들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1370-1번지(대학로 80)의 경북대학교 북문에서 500m가량 오른쪽으로 나아가면 복현오거리가 나온다. 오거리를 지나 250m쯤 직진하면 왼쪽에 '북구 청소년 회관'을 거느린 야산이 나타난다. 야산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 공원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공원 안 배드민턴장 회원들은 그 이름을 대체로 알고 있을 법하다. 북구 산격동 산9-2번지에 있는 테니스장의 이름은 '대불 배드민턴 클럽'이다. 공원 이름이 '대불 공원'인 까닭에 자연스레 그런 이름을 얻었다.
대불이라면 얼핏 '大佛(대불)'이 떠오른다. 공원 안이나 인근에 대불사라는 고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공원과 배드민턴장에 대불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그뿐이 아니다. 왼쪽으로 대불 공원을 낀 채 검단동으로 넘어가는 도로도 이름이 '대불 서로'이다. 복현동 536번지(검단로 8-14)의 건물에도 '대불 노인 복지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대구EXCO 뒤편에는 '대불 스포츠 센터'도 있다.
대불동은 없는데 '대불' 이름 붙은 곳은 많아
대불동도 아닌 복현동과 산격동에 대불 공원, 대불 배드민턴 클럽, 대불 노인 복지관, 대불 서로, 대불 스포츠 센터 등이 있다? 이 일대와 대불이라는 어휘 사이에 역사적 상관성이 있겠다 싶은 느낌이 저절로 일어난다. '북구 청소년 회관 건립 유래비'를 읽어본다.
유래비에 언급되어 있듯이, 복현오거리 일대는 불과 25년 전인 1994년만 해도 3만7천여 평(11,212㎡)에 이르는 크고 아름다운 호수였다. 개발 명목으로 매립하지 않았으면 대구 시민들은 오늘도 복현오거리 일대에서 이 호수와 만나 삶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호수의 이름이 바로 대불지(大佛池)였다
옛날에 이 호수를 가다듬던 사람들은 커다란(大) 부처(佛)를 발굴했다. 그 이후 호수에 대불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때가 정확히 언제인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제가 1918년에 제작한 <대구지형도>에 처음으로 대불지라는 이름이 나온다는 전영권의 <살고 싶은 대구, 흥미로운 대구 여행>에 따르면, 불상이 발견된 때는 1918년보다 이전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가 하면, 16세기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18세기 <대구읍지>에는 대불지가 불상지(佛上池)로 기록되어 있다. 상(上)이 '윗 상'이므로 불상지는 '부처가 물 위로 떠오른 연못'이라는 뜻이다. 즉 불상지와 대불지는 속뜻이 같다. 대불지라는 이름이 16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대불지의 본래 이름은 배자못
불상지나 대불지로 불리기 전에는 이 호수에 이름이 없었을까? 못의 본래 이름이 '배채못'이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못 주변에 배씨와 채씨들이 많이 거주하여 그렇게 불렀는데, 뒷날 발음하기 쉽게 '배자못'으로 바뀌었다는 구전이다. 그러나 배채못 또는 배자못이라는 이름이 언제 생겨났는지, 그것이 불상지보다 먼저인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재의 대구 시민들이 대불지보다 배자못이라는 이름을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 고장 대구>를 펴낸 권영재도 '당시 많은 학교는 배자못(대불지)으로 소풍을 갔다'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배자 공원, 배자 배드민턴 클럽, 배자 서로, 배자 노인복지관이 아니라 대불 공원, 대불 배드민턴 클럽, 대불 서로, 대불 노인복지관이 되었다. 배자못은 못도 죽임을 당했지만 그 이름까지 빼앗기고 만 것이다.
도시 개발 미명하에 사라진 감삼못
배자못이 없어지기 10년 전인 1984년에는 감삼못이 완전히 매립되었다. '완전히'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그보다 10년 이상 전인 1973년에 달성고등학교를 신설하느라 못의 동편이 먼저 매립되었기 때문이다. 7,576평(25,000㎡)에 달하던 감삼못 자리의 대부분은 그 이후 광장타운이라는 대단지 아파트가 1차, 2차라는 접두어까지 뽐내며 차지하고 있다.
감삼동이라는 이름의 유래 중에는 '감' '셋'에서 왔다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대구직할시교육위원회가 1988년에 펴낸 <우리 고장 대구- 지명 유래>에 따르면, 약 300여 년 전에 원님이 현재의 감삼동 69-1번지 일대인 시등(枾登, 감나무에 감이 많이 달려 있는 산등성)을 지나던 중 붉은 감을 보고 그 탐스러움에 반하여 감탄사를 연발했다.
인사차 나와 있던 마을 대표가 감을 따서 원님에게 대접하였다. 원님은 '감이 매우 맛있구나!'라면서 연거푸 세 개나 먹었다. 이윽고 마을 대표가 동명을 지어주십사 청하니 원님은 '감을 세 개나 먹은 곳'이니 '감삼동이 어떠냐?' 하였다. 그 이후 이 마을은 감삼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 감삼동에 가면 감나무도 없고 감삼못도 없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세 곳 있어서 감삼동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화도 있지만, 샘터로 전해지는 감삼동 148-6번지, 190-2번지, 284-3번지 어디에도 샘은 없다. <우리 고장 대구- 지명 유래>의 표현에 따르면 '1970년에서 1980년대에 걸쳐 도시의 개발로 주택지로 바뀌어 아파트와 단독주택들이 빽빽히 들어서' 있을 뿐이다.
대구교대 앞 영선못도 자취도 없이 사라져
없어진 호수라면 영선못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 사진의 개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최계복의 1933년 작품 <영선못의 봄>을 보면 양복에 중절모까지 쓴 중년 신사 등 상춘객을 가득 태운 놀잇배가 영선지를 선유하고 있다. 그만큼 영선지가 대단한 유원지였다는 뜻이다.
대구교육대학 맞은편 영선시장 입구의 <영선못터> 표지석에는 '영선못이 있던 자리는 현재의 영선시장과 그 일대 주택가로 규모는 2만여 평 정도였다. 영선못은 시가지에서 가까운 데다 물이 많고 주변 경치가 좋아 시민들이 여름에는 낚시와 수영, 겨울철에는 얼음지치기 등을 즐기는 휴식처로 사랑을 받았으며, 가뭄 때에는 농사에 이용되었고 장마 중에는 홍수 조절 역할을 했다. 그후 도심지 개발에 따라 매립 공사로 못은 없어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라는 안내문이 새겨져 있다.
영선못은 자연 호수는 아니다. 2000년 발간 <대구 시사>는 영선못이 조선 말기에 축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영선못은 조선 말기에 12년 동안의 공사 끝에 만들어졌는데, 어떤 고위 관리가 사비를 들여 축조했다고 한다. 도사가 나타나 영선못 자리를 가리키면서 '저곳에 집을 지으면 나라에 아주 해로운 일이 생길 것이고, 12년에 걸쳐 못을 만들면 나라에 아주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말하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주 깊었던 그 관리가 그 말을 따랐다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대구가 아득한 옛날에는 땅이 아니라 거대한 호수였다는 것과, 1980-1990년대의 도시화 과정에서 대부분 매립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이 글은 그러한 '사실'을 적시하는 데에 집필 목적이 있지 않다. 지질학적 변동을 고려할 때 대구만큼 수많은 호수를 가진 도시는 지구상에 존재할 수 없는데, 왜 대구는 호수 도시로서의 세계적 위상을 불과 30년이란 짧은 시간 안에 모두 잃어버렸을까, 그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앞날을 내다볼 줄 아는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구에는 그런 지도자가 없었다. 그저 도시 확장이라는 토목적 안목뿐이었고, 그 까닭에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천혜의 자연 경관을 도로 내고 아파트 짓는 눈앞의 재개발 이익 앞에 헌납했다.
본래가 거대 호수였기에 수많은 연못을 거느릴 수 있었던 대구, 겨우 30년 만에 호수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의 대구, 그런 대구의 변모를 통해 미래사회를 내다볼 줄 아는 지도자가 있어야 지역 공동체가 다른 곳과 차별성 있는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교훈을 깨닫는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호수를 거느린 대구, 그 호수에서 신천과 금호강 또는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천변 따라 역시 세계 최다의 고인돌이 놓여 있는 대구, 이제는 그 장관을 볼 수 없다. 호수와 고인돌이 그대로 있었으면 세계 희귀의 관광 도시가 되었을 텐데 단 30년 만에 그 천혜의 기회를 스스로 뭉개버렸다. 그 안타까움을 글로 적느라 몸을 떨면서, 대구가 지금도 잃어가고 있는 다른 것에는 무엇이 또 있을까 생각해 본다.
경상북도는 낙동강과 금호강이 계속 흙을 실어날라 거대 호수를 메운 끝에 마침내 땅으로 변했다. 그래도 지대가 낮은 곳은 여전히 호수로 남았다. 지금도 전국 1만7505개 호수의 32%인 5,547개 호수가 경상북도에 있다. 당연히 대구에도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도시화가 본격화된 1980-1990년대 이전까지는 무수한 호수들이 있었다.
▲ 일제는 1919년 3월 8일 대구 독립만세 운동이 발원된 곳이라는 이유로 서문시장을 본래 장소(달서문 터 앞에서 동산파출소 터 사이)에서 현재의 위치로 강제 이전시켰다. 사진은 현재의 서문시장 입구. ⓒ 정만진
일제가 강제로 메운 천왕당지
천왕당지는 1928년에 매립되었다. 일제는 비산동과 내당동 등지의 고분을 마구 파헤쳐 그 흙으로 천왕당지를 메운 후, 달서문 터(중구 경상감영길 1) 앞에서 동산 파출소 터(동산동 15) 앞 오토바이 골목 일대에 자리잡고 있던 서문시장을 그곳으로 강제 이전시켰다. 일제로서는 1919년 3월 8일 대구 독립만세 운동의 발원지인 서문시장을 본래 자리에 그대로 두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경북대학교 뒤쪽 복현오거리 일대의 배자못, 대구교대 앞의 대명동 영선못, 달성고등학교 일원의 감삼못, 원대 지하도 둘레의 비산동 날뫼못, 수성구청 주변의 범어못, 송라시장 일대의 신암동 소래못, 달성공원 서쪽의 사리못, 대구MBC 앞의 한골못, 메워져 서구청 자리가 된 평리동 들마못, 역시 메워져 효목공원이 된 동구 효목동 소못 등은 일제가 아니라 우리가 없앴다. 대구에는 본래 크기의 30%가량만 잔존한 성당못, 그리고 일제 강점기 때의 본래보다 조금 더 커진 수성못이 남아 있는 호수의 전부이다.
▲ 대구는 엄청나게 많은 호수를 거느린 도시였지만 재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모두 매립해버렸다. 원형이 남아 있는 것은 수성못(사진)이 유일하고, 30%쯤 남은 성당못도 희귀한 잔존 사례에 들 정도이다. ⓒ 정만진
대불지의 흔적을 말해주는 이름들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1370-1번지(대학로 80)의 경북대학교 북문에서 500m가량 오른쪽으로 나아가면 복현오거리가 나온다. 오거리를 지나 250m쯤 직진하면 왼쪽에 '북구 청소년 회관'을 거느린 야산이 나타난다. 야산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 공원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공원 안 배드민턴장 회원들은 그 이름을 대체로 알고 있을 법하다. 북구 산격동 산9-2번지에 있는 테니스장의 이름은 '대불 배드민턴 클럽'이다. 공원 이름이 '대불 공원'인 까닭에 자연스레 그런 이름을 얻었다.
대불이라면 얼핏 '大佛(대불)'이 떠오른다. 공원 안이나 인근에 대불사라는 고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공원과 배드민턴장에 대불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그뿐이 아니다. 왼쪽으로 대불 공원을 낀 채 검단동으로 넘어가는 도로도 이름이 '대불 서로'이다. 복현동 536번지(검단로 8-14)의 건물에도 '대불 노인 복지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대구EXCO 뒤편에는 '대불 스포츠 센터'도 있다.
대불동은 없는데 '대불' 이름 붙은 곳은 많아
대불동도 아닌 복현동과 산격동에 대불 공원, 대불 배드민턴 클럽, 대불 노인 복지관, 대불 서로, 대불 스포츠 센터 등이 있다? 이 일대와 대불이라는 어휘 사이에 역사적 상관성이 있겠다 싶은 느낌이 저절로 일어난다. '북구 청소년 회관 건립 유래비'를 읽어본다.
대구의 영봉 팔공산의 웅장한 자태와 유구한 금호강을 인접한 이곳 대불산 자락에 위치한 '북구 청소년 회관'은 원래 대불산 옆 대불지(일명 배자못)이 오랜 세월 동안 '아래들'을 비롯한 산격, 검단 일대의 농토를 비옥하게 적셔주던 것을 이 일대가 유통단지 등으로 개발되면서 그 용도가 택지로 바뀌게 되어 이를 기념하고자 당시 제2대 대구광역시 북구의회에서 '대불지 기념사업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중략) 1998년 5월 1일 (북구 청소년 회관) 기공식을 갖고 2000년 12월 28일 개관식을 갖기에 이르렀습니다.
유래비에 언급되어 있듯이, 복현오거리 일대는 불과 25년 전인 1994년만 해도 3만7천여 평(11,212㎡)에 이르는 크고 아름다운 호수였다. 개발 명목으로 매립하지 않았으면 대구 시민들은 오늘도 복현오거리 일대에서 이 호수와 만나 삶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호수의 이름이 바로 대불지(大佛池)였다
옛날에 이 호수를 가다듬던 사람들은 커다란(大) 부처(佛)를 발굴했다. 그 이후 호수에 대불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때가 정확히 언제인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제가 1918년에 제작한 <대구지형도>에 처음으로 대불지라는 이름이 나온다는 전영권의 <살고 싶은 대구, 흥미로운 대구 여행>에 따르면, 불상이 발견된 때는 1918년보다 이전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가 하면, 16세기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18세기 <대구읍지>에는 대불지가 불상지(佛上池)로 기록되어 있다. 상(上)이 '윗 상'이므로 불상지는 '부처가 물 위로 떠오른 연못'이라는 뜻이다. 즉 불상지와 대불지는 속뜻이 같다. 대불지라는 이름이 16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대불지의 본래 이름은 배자못
불상지나 대불지로 불리기 전에는 이 호수에 이름이 없었을까? 못의 본래 이름이 '배채못'이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못 주변에 배씨와 채씨들이 많이 거주하여 그렇게 불렀는데, 뒷날 발음하기 쉽게 '배자못'으로 바뀌었다는 구전이다. 그러나 배채못 또는 배자못이라는 이름이 언제 생겨났는지, 그것이 불상지보다 먼저인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 감삼못이 넓게 펼쳐져 있었던 광장타운아파트와 달성고등학교 일대가 지하철 감삼역 표지판 뒤로 보이는 풍경 ⓒ 정만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재의 대구 시민들이 대불지보다 배자못이라는 이름을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 고장 대구>를 펴낸 권영재도 '당시 많은 학교는 배자못(대불지)으로 소풍을 갔다'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배자 공원, 배자 배드민턴 클럽, 배자 서로, 배자 노인복지관이 아니라 대불 공원, 대불 배드민턴 클럽, 대불 서로, 대불 노인복지관이 되었다. 배자못은 못도 죽임을 당했지만 그 이름까지 빼앗기고 만 것이다.
도시 개발 미명하에 사라진 감삼못
배자못이 없어지기 10년 전인 1984년에는 감삼못이 완전히 매립되었다. '완전히'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그보다 10년 이상 전인 1973년에 달성고등학교를 신설하느라 못의 동편이 먼저 매립되었기 때문이다. 7,576평(25,000㎡)에 달하던 감삼못 자리의 대부분은 그 이후 광장타운이라는 대단지 아파트가 1차, 2차라는 접두어까지 뽐내며 차지하고 있다.
감삼동이라는 이름의 유래 중에는 '감' '셋'에서 왔다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대구직할시교육위원회가 1988년에 펴낸 <우리 고장 대구- 지명 유래>에 따르면, 약 300여 년 전에 원님이 현재의 감삼동 69-1번지 일대인 시등(枾登, 감나무에 감이 많이 달려 있는 산등성)을 지나던 중 붉은 감을 보고 그 탐스러움에 반하여 감탄사를 연발했다.
인사차 나와 있던 마을 대표가 감을 따서 원님에게 대접하였다. 원님은 '감이 매우 맛있구나!'라면서 연거푸 세 개나 먹었다. 이윽고 마을 대표가 동명을 지어주십사 청하니 원님은 '감을 세 개나 먹은 곳'이니 '감삼동이 어떠냐?' 하였다. 그 이후 이 마을은 감삼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 감삼동에 가면 감나무도 없고 감삼못도 없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세 곳 있어서 감삼동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화도 있지만, 샘터로 전해지는 감삼동 148-6번지, 190-2번지, 284-3번지 어디에도 샘은 없다. <우리 고장 대구- 지명 유래>의 표현에 따르면 '1970년에서 1980년대에 걸쳐 도시의 개발로 주택지로 바뀌어 아파트와 단독주택들이 빽빽히 들어서' 있을 뿐이다.
▲ 최계복의 1933년 작품인 <영선못의 봄>은 이 못의 당시 규모와 성격을 잘 말해준다. (<최계복 사진집>의 수록 작품을 재촬영한 것이므로 원작과 여러모로 다릅니다.) ⓒ 최계복
대구교대 앞 영선못도 자취도 없이 사라져
없어진 호수라면 영선못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 사진의 개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최계복의 1933년 작품 <영선못의 봄>을 보면 양복에 중절모까지 쓴 중년 신사 등 상춘객을 가득 태운 놀잇배가 영선지를 선유하고 있다. 그만큼 영선지가 대단한 유원지였다는 뜻이다.
대구교육대학 맞은편 영선시장 입구의 <영선못터> 표지석에는 '영선못이 있던 자리는 현재의 영선시장과 그 일대 주택가로 규모는 2만여 평 정도였다. 영선못은 시가지에서 가까운 데다 물이 많고 주변 경치가 좋아 시민들이 여름에는 낚시와 수영, 겨울철에는 얼음지치기 등을 즐기는 휴식처로 사랑을 받았으며, 가뭄 때에는 농사에 이용되었고 장마 중에는 홍수 조절 역할을 했다. 그후 도심지 개발에 따라 매립 공사로 못은 없어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라는 안내문이 새겨져 있다.
영선못은 자연 호수는 아니다. 2000년 발간 <대구 시사>는 영선못이 조선 말기에 축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영선못은 조선 말기에 12년 동안의 공사 끝에 만들어졌는데, 어떤 고위 관리가 사비를 들여 축조했다고 한다. 도사가 나타나 영선못 자리를 가리키면서 '저곳에 집을 지으면 나라에 아주 해로운 일이 생길 것이고, 12년에 걸쳐 못을 만들면 나라에 아주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말하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주 깊었던 그 관리가 그 말을 따랐다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대구가 아득한 옛날에는 땅이 아니라 거대한 호수였다는 것과, 1980-1990년대의 도시화 과정에서 대부분 매립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이 글은 그러한 '사실'을 적시하는 데에 집필 목적이 있지 않다. 지질학적 변동을 고려할 때 대구만큼 수많은 호수를 가진 도시는 지구상에 존재할 수 없는데, 왜 대구는 호수 도시로서의 세계적 위상을 불과 30년이란 짧은 시간 안에 모두 잃어버렸을까, 그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 대구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3,000여 기의 고인돌을 가진 도시였지만 이 역시 거의 대부분을 땅에 파묻고 말았다. 사진은 수성구 상동 171번지 앞에 남아 있는 고인돌. ⓒ 정만진
앞날을 내다볼 줄 아는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구에는 그런 지도자가 없었다. 그저 도시 확장이라는 토목적 안목뿐이었고, 그 까닭에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천혜의 자연 경관을 도로 내고 아파트 짓는 눈앞의 재개발 이익 앞에 헌납했다.
본래가 거대 호수였기에 수많은 연못을 거느릴 수 있었던 대구, 겨우 30년 만에 호수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의 대구, 그런 대구의 변모를 통해 미래사회를 내다볼 줄 아는 지도자가 있어야 지역 공동체가 다른 곳과 차별성 있는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교훈을 깨닫는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호수를 거느린 대구, 그 호수에서 신천과 금호강 또는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천변 따라 역시 세계 최다의 고인돌이 놓여 있는 대구, 이제는 그 장관을 볼 수 없다. 호수와 고인돌이 그대로 있었으면 세계 희귀의 관광 도시가 되었을 텐데 단 30년 만에 그 천혜의 기회를 스스로 뭉개버렸다. 그 안타까움을 글로 적느라 몸을 떨면서, 대구가 지금도 잃어가고 있는 다른 것에는 무엇이 또 있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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