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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언니의 독설이 필요할 때... 맹자를 추천합니다

[북리뷰] 조윤제 지음 '이천 년의 공부'

등록|2019.06.15 17:35 수정|2019.06.15 17:35
영화 <기생충>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부자인데도 착한 게 아니라, 부자니까 착한 거야." 자기가 그만큼 부자였으면 더 착했을 거라고, 가장 착했을 거라고 말하며 웃는다(<기생충>을 아직 안 본 분들을 위해 여기까지만).

영화 속 인물의 말처럼 부자면 자기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적고, 그런 사람이 없으니 세상을 아름답게 볼 거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그렇게 돌아가던가.

<이천 년의 공부> 서문에 나오듯, 살면서 누구나 고난에 맞닥뜨린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당황스럽고,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막막한 순간이 생긴다. 부유한 사람이라고 그렇지 않으리라는 건 역시 '착한' 사람이나 뱉을 수 있는 막언이다.
  

▲ 영화 <기생충> 홍보 스틸컷 ⓒ 영화 <기생충>


고난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까? 누군가는 커뮤니티 고민 상담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다른 누군가는 동네 친구를 불러내어 소줏잔을 기울일지도 모르겠다. 폴 오스터 소설 속 주인공처럼 부랑자가 되어 이곳저곳을 떠돌 수도, 안나 카레리나처럼 전차에 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복잡한 현대에서는 가장으로서의 책임, 대리로서의 역할, 연인으로서의 책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고난이 온다고 휘청거릴 수 있는 것 또한 가진 자의 여유일지 모른다.

그런 고민이 들 때 들춰보는 것이 고전이다. 주변에 현명한 조언을 하는 친구가 있다면 좋겠지만, 책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어디 흔하랴. 몇 천 년 동안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 말이라면, 나도 고개를 끄덕일 확률이 높다. <이천 년의 공부> 서문에는 맹자의 말이 나온다.
 
"(맹자는)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고 가르친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말라. 회피하지도 포기하지도 말라.' 고난의 돌파자로서, 정의의 수호자로서, 사랑의 힘을 가르쳐준 스승으로서, 백성의 보호자로서, 그리고 진정한 어른으로서 맹자는 말하고 있다. '마음의 주인은 바로 당신 자신이다. 마음만 굳게 잡으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다.'"
 

▲ <이천 년의 공부> 조윤제 위즈덤하우스 ⓒ 위즈덤하우스


<이천 년의 공부>는 맹자를 통해 수많은 위기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기르는 법에 대해 이야기 한다. 공자의 <논어>와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좀 더 단단하고 강인한 느낌이다. 쎈 언니의 독설 같았달까. 마음에 남았던 책의 몇 구절을 옮긴다.

하나, 말의 그릇도 본질만큼 중요하다

마음은 따뜻한데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굳이 키워드를 꼽는다면 남자, 경상도, 중년이랄까.

예쁘게 말하는 것, 꾸며서 말하는 것을 남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내 마음이 곧으면 남들이 알아줄 것이라 믿는다. 물론 가장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남들이 알 길은 없다. <이천 년의 공부>에서는 맹자가 양혜왕에게 비유를 통해 설득한 사례가 나온다.
 
"개나 돼지가 사람 음식을 먹는데도 단속할 줄 모르고, 길에 굶어 죽는 사람이 있어도 곡식을 풀 줄 모르면서 사람이 죽으면 ' 내 탓이 아니라 흉년 탓이다'라고 한다면, 사람을 찔러 죽인 다음에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 무기가 죽인 것이다'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맹자는 말의 본질만큼이나 꾸밈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공감 가는 말이다. 밥도 예쁜 그릇에 담아 먹으면 더 먹음직스러워 보이듯, 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둘, 착하기만 해서는 부족하다

"걔가 알고 보면 착한 애인데."
"마음씨는 참 좋은데."


착하다는 말은 요즘 사회에서 더이상 칭찬이 아닌 것 같다. 김영민 교수의 말대로 호구의 동의어거나, 예쁘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때 쓰는 어색한 칭찬이 되어버린 걸까. <이천년의 공부>에서 말하는 맹자는 정치를 할 때 착하기만 해서는 부족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금 인자한 마음이 있고 인자하다는 평판이 있다고 해도 백성들이 그 혜택을 보지 못하고 후세에 본보기가 되지 못하는 것은 좋은 선왕의 도를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말에 단지 선한 마음만으로는 좋은 정치를 하기에 부족하고, 좋은 법도가 있어도 저절로 실행될 수는 없다고 했다." 

정치뿐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마냥 착하기만 한 것으로는 좋은 말을 듣기 어렵다. 나는 곧잘 착한 사람보다는 일 잘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고 말하곤 한다. 착하고 무능한 팀장 덕에 호되게 고생을 한 덕이다.

얼마 전엔 한참 <왕좌의 게임>에 빠져 있었는데, 최종 주인공 격인 존 스노우의 착하고 고집스러운 면모 때문에 고구마를 백 개 먹은 듯 답답했던 적이 많았다.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단순한 '착함'을 지키기 위해 수만 명의 사람을 희생 시켜야 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맹자도 <왕좌의 게임>을 함께 봤다면 존 스노우를 욕하지 않았을까. 고전은 고지식한 이야기만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천 년의 공부>를 통해 본 맹자는 달랐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보다는 회사 생활을 십 년은 먼저 한 선배와 술자리에서 나누는 이야기 같았다.
 

▲ <이천 년의 공부>, 조윤제, 위즈덤하우스 ⓒ 위즈덤하우스


셋, 근심할 만한 것만 근심하라
 
 "군자에게는 평생토록 근심하는 것은 있어도, 하루아침의 근심은 없다" <맹자> <이루 하>

우리가 하는 고민의 90% 이상은,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말도 있다. 밤잠을 설치며 고민했던 것들을 떠올리면, 내가 밤새 뒤척인다고 해서 나아지는 일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소풍가기 전 날 비가 올까 걱정하느라 늦잠을 자는 꼬마의 마음이다.

세상 일에는 나 말고도 변수가 너무 많다. 다른 사람의 결정, 내일의 날씨, 우연, 세계정세까지. 사소한 모든 변수들이 모여 내일이 결정된다. 그렇다면 당연히 걱정을 하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잊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가 하는 고민은 모두 쓸데없는 것인가. <이천 년의 공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 근심스럽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순임금과 같아지려고 할 뿐이다. 대체로 군자라면 사소하게 근심하는 일이 없다. 인이 아니면 행하지 않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시적인 근심이 있다고 해도 군자는 그것을 근심하지 않는다."

저자 조윤제는 <논어>, <맹자>, <사기> 등 동양 고전 100여 종을 원전으로 읽으면서 문리가 트이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고전을 읽으면 문리가 트이게 될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무언가를 읽는 것만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된다고 믿지는 않는다. 그래도 문득, 살면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묻고 싶을 때, 그럴 때 고전을 펼쳐 본다. 적어도 전국의 용하다는 점쟁이에게 묻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그럴 때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설사 그게 자의적인 해석일지라도, 가끔은 듣고 싶은 말을 듣기 위해 누군가를 찾아가는 때도 있으니 말이다. 지금의 나에게 <이천 년의 공부>는 그런 말을 전해주는 사람 같았다. 현실적이고 센 언니의 독설이 필요할 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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