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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리만치 말이 잘 통하던..." 김대중이 기억하는 이희호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여성운동가·김대중의 동반자... 고 이희호 이사장 별세

등록|2019.06.11 10:38 수정|2019.06.11 10:38

▲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10일 별세했다. 향년 97세. 김대중평화센터 관계자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이 여사가 오늘 소천했다"고 밝혔다. 이 여사는 그간 노환으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아 왔다. 1922년 태어난 이 여사는 대표적 여성운동가로 활동하다 1962년 고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해 정치적 동지로서 격변의 현대사를 함께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DB 및 재판매 금지] ⓒ 연합뉴스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10일 밤 11시 37분 별세했다. 여성운동가로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반자로서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 우리 곁을 떠났다. 향년 97세.

이희호 이사장(1922년생)과 김대중 전 대통령(1924년생)의 인연은 연필로 스케치한 몇 장의 그림 같다고 할 수 있다. 화려한 색채 없이 은은하고 잔잔한 느낌이 배어나는 스케치화에 비유할 수 있다.

피난지에서 식사 한 끼, 스터디 모임... 우연이 만든 인연

두 사람의 인연에 중개자로 등장하는 인물이 여성운동가이자 전 보건사회부 장관인 김정례(1927~ )다. 김대중은 "김정례 여사와의 인연은 좀 별나다"고 회고한다. '별나다'고 한 것은 김정례와의 만남이 특이했을 뿐 아니라 이 만남이 김대중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대중이 대한여자청년단 간부 김정례를 처음 만난 때는 한국전쟁 중인 1951년이다. 이때 김대중은 27세의 청년 사업가였다. 그가 경영하는 흥국해운주식회사가 곡물·비료·새끼·가마니 등을 운송하거나 판매할 때였다. <김대중 자서전> 제1권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김정례 여사와의 인연은 좀 별나다. 나는 1.4 후퇴 직전에 배에 쌀을 가득 싣고 인천으로 올라갔다. 무척 추웠다. 쌀을 다 팔았을 때쯤 1.4 후퇴 피난민들이 인천 앞바다로 밀물처럼 내려왔다."

흥국해운 선박은 여객 수송선이 아니었다. 그래서 피난민을 태울 계획이 없었다. 그런데 김대중이 목포로 떠나고자 배에 탑승하려는 순간, 이런 일이 벌어졌다.
 
"앞바다에 정박 중인 배를 타려고 가는데, 배 앞에서 어떤 젊은 여자가 우리 배에 사람을 태우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모든 것이 제멋대로였다. 내가 다가가 '누구시냐?'고 묻자, 그때서야 '선주 되시냐?'며 예를 갖추었다. 그러고는 '몇 사람을 피난 보내야 하는데 배에 타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는 붙임성이 있고 일처리가 시원시원했다.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었는데, 다시 부산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다."

이희호와 김대중의 인연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고명섭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이 쓴 <이희호 평전>에 담겨 있다. 얼마 뒤 김대중이 부산에서 김정례를 만나는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이희호가 등장한다.
 
"김정례는 김대중과 만나는 자리에 여자청년단 간부들과 함께 나왔다. 바로 거기에 이희호가 있었다."

김대중은 청년단 간부들과 식사를 했다. 이것이 이희호와 김대중의 첫 만남이다. 전쟁통에 우연히 만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식사 한 끼를 같이한 사이에 불과했으니, 두 사람의 인연이 그 후 계속 이어지리란 보장은 없었다. 더군다나 김대중한테는 부인 차용애(1927~1959)와 아들 홍일(1948~2019)·홍업(1950년 생)이 있었다.

그런데 첫 만남에 대한 두 사람의 기억이 약간 다르다. <이희호 평전>에 따르면, 이희호는 김대중을 이때 만났다고 회고했다. 반면, <김대중 자서전> 제2권에 따르면, 김대중은 이때의 식사 자리에 이희호가 있었던 것은 기억하지만 이희호라는 여성을 만난 것은 그 후라고 회고했다. 첫 만남을 기억하는 강도의 차이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희호는 당차면서도 따뜻했다"
 

▲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10일 별세했다. 향년 97세. 김대중평화센터 관계자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이 여사가 오늘 소천했다"고 밝혔다. 이 여사는 그간 노환으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아 왔다. 1922년 태어난 이 여사는 대표적 여성운동가로 활동하다 1962년 고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해 정치적 동지로서 격변의 현대사를 함께했다. 사진은 93년 8월 12일 김대중씨가 자택에서 이희호 여사와 담소를 나누는 모습. ⓒ 연합뉴스

얼마 뒤 두 사람은 면우회(勉友會)라는 스터디 모임에서 또 한 번 부딪혔다. 면우회는 서울 지역 대학생 클럽인 면학동지회가 피난지 부산에서 새롭게 태어난 모임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고등여학교와 이화여전을 졸업한 이희호는 1946년(24세)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해 1950년(28세) 5월 졸업했다. 이희호는 면우회의 정식 회원이었다.

반면, 김대중은 정식 회원은 아니었다. 하지만, 피난 중에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 모임에 들어갔다. 위 자서전 제1권에서 김대중은 그 시절 자신이 "배움에 허기진 젊은이"였다고 회고했다. 전쟁통에도 공부를 생각하는 특별한 사업가였던 것이다.

김대중은 "면우회에서 나는 이희호라는 여성을 만났다"면서 "김정례씨 소개로 여자청년단 회식 자리에서 잠깐 인사를 나눴고 면우회에서 깊은 대화를 나눴다"고 말했다. 이희호'라는' 여성을 만났다는 표현에서 느낄 수 있듯이, 김대중은 이희호와의 만남이 면우회 때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전에 만난 적이 있음을 기억하면서도, 면우회 때 만남을 좀 더 강렬히 기억했던 것이다. 김대중은 "이상하리만치 이야기가 잘 통했다"고 술회했다.
 
"시국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 특히 정치 얘기를 많이 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영구집권 획책 등에 함께 분개하기도 했다. 그녀는 의견이 분명했고 생각이 깊었다. 나라와 개인 사정이 좋아지면 외국 유학을 가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당차면서도 따뜻했다."

이희호 역시 좋은 인상을 받았다. "이희호가 본 김대중은 눈이 크고 핸섬한 멋쟁이였다. 또 책을 많이 읽고 아는 것이 참 많은 남자였다"고 <이희호 평전>은 말한다.

두 사람은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 같은 사이였다. 김대중이 자기 가족을 소개할 정도로 편한 사이가 되기도 했다. <이희호 평전>은 이렇게 말한다.
 
"모임이 열린 광복동 다방에 김대중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김대중은 이희호에게 아내를 소개했다. 이희호의 기억 속에 남은 차용애는 '첫눈에 반해 결혼했다는 소문이 빈말이 아니었구나' 하고 느낄 만큼 매력 있는 여성이었다."

여성운동가가 된 이희호, 연이은 불운을 겪은 김대중

피난지 부산에서 스터디 모임을 여러 차례 가진 뒤, 이희호와 김대중의 연락은 오랫동안 끊어졌다. 그 사이 두 사람 인생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이희호는 4년간의 미국 유학 끝에 1958년(36세) 스캐릿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이화여대 강사와 대한YWCA연합회 총무로 활동했고, 김대중은 정치에 뛰어든 뒤 연이은 총선 실패로 가세가 기울더니 1959년에는 아내를 상실하는 비애까지 겪었다.

이 시기 김대중은 끝을 모르는 불운에 계속 시달렸다. 사업과 달리, 정치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1954년(30세) 총선 때는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958년(34세) 총선 때는 강원도 인제에서 민주당으로 출마했지만, 자유당의 방해로 입후보 등록이 무효가 되고 말았다.

인제 선거구의 부정선거가 대법원 판결로 드러나 1959년에 열린 재선거에 다시 출마했지만, 이번에도 노골적인 부정선거 때문에 낙선을 피할 수 없었다. 군인 표가 많은 그곳에서, 일선 중대장들이 투표함을 깔고 앉은 채 자유당 후보를 찍은 표만 투표함에 넣었기 때문이다. 김대중을 찍은 표는 투표함에 들어갈 수 없었다. 남편 김대중의 실패와 파산에다가 자신의 건강 악화마저 겹친 상태에서, 생활비를 벌고자 미용실을 하던 차용애는 32세 되던 이 해에 세상을 떠났다.

1960년(36세) 4월혁명은 김대중 인생에 전환점이 되는 듯했다. 그해 9월 민주당 대변인이 된 데 이어, 이듬해 5월 13일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는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3일 뒤 그의 인생은 다시금 예전으로 돌아갔다.

5·16 쿠데타가 벌어져 국회의원 취임선서도 못했을 뿐 아니라, 졸지에 '구시대 정치인'으로 몰려 경찰서에 한동안 감금되기도 했다. 이희호가 여성운동가로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던 이 시기에 김대중은 정치무대에서 연이은 불운에 고통을 겪고 있었다.

부산에서 스터디를 함께한 뒤 소식이 끊어졌던 이희호와 김대중은 그 뒤 우연히 길에서 부딪혔다. 1959년 서울 종로에서였다. 소식은 그 후 다시 끊어졌다.

4월혁명 뒤 이희호는 김대중 소식을 신문에서 자주 접했다. 김대중이 당 대변인이 됐기 때문이다. 1961년에는 그가 보궐선거에 출마한다는 소식과 부인을 2년 전 사별했다는 소식을 신문 기사에서 접했다.

이 시기에 두 사람의 만남을 촉진하는 기운이 있었다. 김대중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기운이었다. 5·16 쿠데타 후로 그는 정치적으로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무척 힘들었다. 생활비가 없어 후배의 대학 등록금을 빌려 쓴 적이 있을 정도다. 호주머니에 버스비가 없을 때도 있었다.

하는 일마다 죄다 꼬이고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던 김대중은 정신적으로 의지할 데를 찾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다. 그런 기운이 마음속을 뚫고 나와 그를 움직였다. 그래서 찾아간 사람이 2년 전 길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이희호였다.
 

▲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10일 별세했다. 향년 97세. 김대중평화센터 관계자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이 여사가 오늘 소천했다"고 밝혔다. 이 여사는 그간 노환으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아 왔다. 1922년 태어난 이 여사는 대표적 여성운동가로 활동하다 1962년 고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해 정치적 동지로서 격변의 현대사를 함께했다. 사진은 1979년 12월 8일 긴급조치해제에 따른 구속자석방과 아울러 당국의 '보호'에서 풀려난 김 전 대통령이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 연합뉴스

"외롭고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김대중은 어느 날 용기를 내 명동의 대한YWCA연합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고 <이희호 평전>은 말한다. 이희호가 YWCA 활동을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므로 그쪽으로 발걸음을 놓게 됐을 것이다.
 
"가을이 깊어 낙엽이 길 위에 나뒹굴던 때, 이희호와 김대중은 명동에서 만났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역시나 말이 통했다. 몇 년의 유학과 사회 경험으로 이회호는 지성과 인격이 더 성숙해져 있었다."

연필 스케치화가 딱 맞을 것 같은 이 장면은 5·16 쿠데타가 있었던 그 해 가을의 일이다. 김대중이 평생의 동지이자 동반자가 될 이희호를, 이성을 대하는 마음으로 찾아간 첫 순간이었다. 피난지 부산의 한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이듬해인 1962년 5월 10일 결혼했다. 여성운동가로서, 민주화투사로서 한국 현대사의 큰 획을 긋게 될 두 사람은 그렇게 동반자의 첫걸음을 내딛게 됐다.
 

▲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10일 별세했다. 향년 97세. 김대중평화센터 관계자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이 여사가 오늘 소천했다"고 밝혔다. 이 여사는 그간 노환으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아 왔다. 1922년 태어난 이 여사는 대표적 여성운동가로 활동하다 1962년 고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해 정치적 동지로서 격변의 현대사를 함께했다. 사진은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1997년 12월 19일 일산자택을 나서던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부인 이희호 여사가 집밖에서 기다리던 당원들과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모습. 2019.6.11 [연합뉴스 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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