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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적인 개인들이 만드는 이기적인 사회

[잡식성 책사냥꾼]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등록|2019.06.14 10:16 수정|2019.06.14 10:36
라인홀드 니버의 '평온을 비는 기도'는 아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경구일 것이다.
신이시여, 내게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그는 무엇을 바꾸고 싶었을까? 그의 책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나는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책의 문제 제기는 간명하지만 강렬하다. 이타적인 개인은 존재하며, 교육을 통해 이타적인 인간을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에 대해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기적이지 않은 사회나 집단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단지 순진한 낙관주의일 뿐이다. 그러나, 이기적인 인간 집단이 만드는 수많은 문제를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다.

너무나 현대적이고 시의적절한 그의 문제 제기

1936년에 출간된 이 책은 일본이 1933년에 국제연맹을 탈퇴한 일,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전쟁배상금 요구가 독일을 파시즘으로 몰고 간 것 그리고 살아 있는 트로츠키(1940년 사망)를 언급한다.

이 책은 시대착오적인가? 1960년에 이 책을 다시 출판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저자는 말한다. 사례로 드는 사건이나 사람은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도덕적 인간이 비도덕적인 사회를 만드는 현상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나 또한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문제 제기는 시대를 초월하는 가치를 가진다.

사회과학자들은 갈등 해결 도구로 조정이라는 방법을 선호한다고 저자는 언급한다. 양쪽이 조금씩 양보하여 중간에서 만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공정한 방법일까? 저자는 묻는다. 인도가 영국을 상대로, 흑인이 백인을 상대로, 노동자가 기업을 상대로 공정한 협상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힘의 불균형이 낳은 갈등은 그 불균형이 지속되는 한 결코 해소될 수 없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존 듀이는 적절한 도덕 및 사회 교육, 그리고 인간 지성의 개발에 의해 모든 사회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다. 사회문제의 만연은 사회과학이 자연과학만큼 진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라인홀드 니버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차이를 지적하면서 그런 환상이 허구라고 말한다.
(그런 생각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간과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자연과학은 무지에 바탕을 둔 전통주의를 극복했을 때 자유를 얻었다. 그런데 사회과학이 직면하고 있는 전통주의는 사회에서 특권을 유지하려는 지배계급의 경제적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서론 중에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부가 주어지면 사회는 평등해질까? 낙수효과라는 말이 주장하는 것이 사실상 이거다. 저자는 그 가능성 역시 반박한다. 아무리 많은 돈도 부자를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물은 배가 부르면 사냥을 멈추지만, 인간의 탐욕은 상상력에 기반하기 때문에 그 끝을 모른다. 인간의 정신은 이성보다는 상상력에 의해 지배되며 상상력은 정신과 충동의 결합물이라고 그는 말한다.
 
마치 군주가 자신의 일을 축복하기 위해 신하들과 궁정 목사를 이용하듯이, 권력의지는 이성을 사용한다.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도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으면 더 이상 이성적이지 않다. (제2장 중에서)

1936년에 나온 책의 혜안이 놀랍다! 현대 뇌과학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은 감정의 노예다. 편도체를 비롯한 감정 중추의 결정을 정당화하려고 쩔쩔매는 전두엽을 두고, 어느 뇌과학자는 전두엽이 마치 대변인 같다고 말했다. 자신이 하지도 않은 결정을 설명하고 정당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라인홀드 니버는 80년 전에 그것을 예측했다. 이성은 권력 의지의 노예라는 것이다.

사회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빈부격차와 계급간 갈등을 비롯한 사회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그 방법은 의회를 통한 사회주의 그리고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전자는 평화적이지만 매우 느리다. 반면, 후자는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지만 폭력적이고 불안정하다.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논의에서 저자 라인홀드 니버는 두 번이나 나를 놀라게 했다. 첫째, 폭력 그 자체가 사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라는 점, 그리고 둘째, 혁명적 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종교적 이상을 내포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첫째, 폭력은 다른 도구와 마찬가지로 가치 중립적이다. 혁명적 사회주의가 일반 대중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혁명 과정에서 폭력의 사용을 옹호하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도구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의도와 결과에 의해 선악을 판단 받아야 한다. 저자는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이 애꿎은 영국 노동자들에게 궁핍을 강제하는 점을 지적하면서 비폭력조차도 폭력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지적한다.

둘째, 완전한 평등 사회를 약속하는 공산주의 어젠다는 사실 고전적인 종교적 환상의 재탕이다. 그런 것이 과연 가능할지, 한번 생각만 해보아도 쉽게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 종교적 환상이야말로 공산주의, 즉 혁명적 사회주의의 핵심이자 원동력이다.

완벽히 이상적인 미래라는 약속이 없다면, 기득권의 전복을 위한 폭력의 사용, 그리고 이어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을 과연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마도 이룰 수 없겠지만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상, 그것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종교는 성립하지 못한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기득권 세력은 물론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겪는 인간적 결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유럽인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미국의 노예제도를 비판하고, 미국인들은 마찬가지로 영국의 인도 지배를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하게 비슷한 주제인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착취는 영국인도 미국인도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하지 못한다. 당사자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영국 사회당 당수 맥도날드를 비롯하여 많은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걸어갔던 잘못된 길에 대해서도 저자는 비판한다. 때로는 민족주의에 의해, 때로는 개인적 야심에 의해 그들의 순수성은 훼손되었다. 간디조차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지지했으며, 전 세계 노동자들이 단결해야 한다는 이상은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모든 유럽국가에서 차례로 민족주의에 굴복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사회적 불의를 대가로 지불하고서 개인 생활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개인의 구원만을 위해 천국에 이르는 사다리를 세울 수 없으며, 인간사의 방탕과 부패를 그대로 방치해둘 수 없다. 이런 일을 하는 데 가장 적당한 사람들은 낡은 환상들을 새로운 환상들로 바꾼 이들일 것이다. 이 환상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집단생활이 완전히 정의롭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런 환상이 사람들의 영혼을 부추겨 숭고한 광기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한, 정의란 결코 달성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10장 중에서)

라인홀드 니버의 답은 결국 혁명적 사회주의였다. 완전한 평등사회는 한낱 이상에 불과하지만 숭고하며, 혼탁한 상상력에 기반한 탐욕으로 물든 인간을 정화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숭고한 광기'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나온 지 80년이 넘게 지났고, 1960년 재판 발행 이후로도 벌써 60년이 되어간다(우리나라는 증보판이 2017년에 나왔다).

지금의 세상은 혁명적 사회주의는 고사하고 의회주의적 사회주의조차도 도전받고 있으며, 신자유주의라는 괴상한 이름의 괴물이 대낮을 활보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최첨단에 있던 국가에서 혁명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가능했던 사상의 자유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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