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환법 철회' 시위와 홍콩 역사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홍콩인으로 남고 싶은 사람들... 갈등 앞으로도 지속될 듯
▲ 홍콩 도심에 나란히 선 '송환법 반대' 시위대와 경찰16일(현지시간) '범죄인 인도 법안'(일명 송환법)에 반대하며 홍콩 도심을 행진하던 한 시민이 '학생은 폭도가 아니다'라는 팻말을 들고 있다. 그 옆에서 한 경찰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홍콩 언론은 이날 시위 참여 인원이 100만 명을 넘은 것으로 추산했다. ⓒ 연합뉴스
6월 9일의 시위는,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 1997년 이후 역대 최대 규모다. 744만인 홍콩 인구의 7분의 1 정도가 참여했다. 744만 중에서 100만이 참가했다는 것은, 홍콩보다 7배인 한국 인구 5171만 중에서 700만이 참여하는 것 같은 대단한 사건이다. 홍콩 경찰 3만의 30배가 넘는 시위대 숫자에 홍콩 정부와 중국 정부는 깜짝 놀랐고, 15일에는 법안 심의를 연기하겠다는 발표가 나왔다.
입법회와 달리 행정장관에 대해서는 홍콩인들의 통제가 쉽지 않다. 행정장관이 직선제로 선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행정장관은 홍콩 선거인단의 투표와 중국 정부의 최종 승인으로 선출된다. 행정장관의 권한을 넓혀주는 개정법 하에서는 범죄인 인도가 홍콩인들의 통제에서 사실상 벗어날 가능성이 있을 뿐 아니라, 홍콩에 대한 중국의 사법적 통제도 좀더 쉬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홍콩인들이 사상 최대의 저항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 보면, 개정안은 본토와 홍콩의 사법적 일체성을 한층 더 강화하는 길이다. 이에 대해 홍콩인들이 강렬히 저항한다는 것은, 중국과의 일체화를 거부하고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그들의 열망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홍콩인들 사상 최대의 저항
▲ '송환법 철폐' 홍콩시민 검은 대행진16일 오후 빅토리아 파크에 모인 홍콩 시민들이 검은 옷을 입고 '송환법 철폐' 요구 대행진을 벌이고 있다. 이날 주최측은 200만명이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 이희훈
그런 상징성을 지닌 홍콩이 본토와의 일체화를 거부하고 있으니, 중국 입장에서는 서운함을 품을 만도 하다. 이종화 목원대 교수의 논문 '홍콩의 집단 기억과 시위 그리고 정체성 정치'는 중국을 배제하고 중국과의 차이를 강조하는 홍콩의 분위기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1997년 이후의 시위 통계를 소개했다. 아래 인용문의 '식민자'는 식민지배자'를 의미한다.
"1997년 중국으로 반환된 이후의 홍콩은 사회운동이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시기로 접어든다. 이러한 현상은 관련된 통계 수치로도 확인이 가능하다. 1997년~2016년의 20년 동안에 홍콩에서 발생한 총 집회 횟수는 6만 4677건이었다. 연평균 3200여 건 이상의 크고 작은 집회가 발생한 것이다. 홍콩의 정체성 정치 전략에서 주목할 부분은 중심부가 식민자 영국에서 조국인 중국으로 전환되면서 중심부와의 동일화를 강조하는 것에서부터 차이와 배제를 강조하는 적응 단계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적 상황의 전개는 중국에 대한 홍콩 사회의 부정적인 집단 기억과 관련이 있다." - 한양대 아태지역연구센터가 2018년 발행한 <중소연구> 제42권 제3호.
연평균 3200여 건이니, 하루 평균 10건이 좀 안 되는 시위가 홍콩이라는 좁은 곳에서 매일 같이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홍콩인들이 이렇게까지 절절하게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애쓰는 이유는 1842년 이후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영국이 홍콩을 빼앗은 것은 이곳을 거점으로 대(對)중국 경제 침탈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결과물이 있다. 홍콩이 중국과 외부 세계를 연결하는 무역 허브로 급격히 성장했다는 점이다.
이는 1859년부터 1948년까지의 중국 무역통계를 수록한 <중국 구(舊)해관 사료>에서도 확인된다. 2001년 베이징에서 발행된 이 자료에는 중국 각지의 세관 통계가 수록돼 있다. 이 자료를 들여다보면, 영국 식민지 기간에 홍콩에서 발생한 경제적 변화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1883~1893년 기간에는 홍콩과의 무역이 중국의 전체 대외무역에서 42.8%를 차지했다. 중국의 대외무역 절반 가까이가 홍콩과의 거래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중국 구해관 사료>는 "홍콩으로부터의 수입은 본래 대영제국·미국·호주·인도·싱가포르해협 등과 청나라의 연안 항구로부터 나온 것이고, 그 식민지에 대한 수출은 더욱 더 그러하다"고 설명한다. '그 식민지에 대한 수출은 더욱 더 그러하다'는 표현은 홍콩이 영국·미국 등의 거래를 중개할 뿐 아니라 자체적 필요성에 따라서도 중국 본토와 거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영국이 의도적으로 홍콩을 잘살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홍콩을 경유한 영국의 대(對)중국 경제침략의 결과물로 그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것은 홍콩인들이 중국과 별개의 정체성을 갖도록 만드는 데 기여했다. 중국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관념이 홍콩인들의 머릿속을 점령했던 것이다.
물론 식민통치 하에서 홍콩 경제가 변화했다고 해서 홍콩인들이 중국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식민통치 시절에도 중국과의 유대관계는 어느 정도 유지됐다. 도쿄대 명예교수 등을 지낸 하마시타 다케시가 저술하고 하세봉·정지호·정혜중이 함께 번역한 <홍콩 - 아시아의 네트워크 도시>에 이런 사례들이 소개돼 있다.
"1884년 청불전쟁이 일어났을 때, 홍콩에서는 프랑스에 대한 보이콧이 일어났다. 1905년에는 미국에 대해서, 그리고 1907년의 일본에 대한 보이콧 등 홍콩에서의 정치적·사회적 운동은 홍콩에 중국의 영향력이 행사되고 있었다는 것 혹은 중국의 대외정책이 홍콩에서의 운동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말해준다."
청나라와 프랑스가 싸울 때 청나라를 편드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중국 민족주의가 발달하는 일도 홍콩에서 일어났다. 위 책에 나오는 또 다른 사례다.
"홍콩에서도 지식인들에 의해 중국의 민족주의가 주장되어 왔는데 <순환일보>를 발행한 왕타오와 양무운동을 주장한 허치, 나아가 신해혁명에서 큰 역할을 한 쑨원 등은 홍콩을 거점으로 민족주의를 주장하였다."
청나라판 개혁개방운동인 양무운동의 주장자 허치도, 1911년 신해혁명의 기수인 쑨원(손문)도 홍콩을 거점으로 활동했을 정도로, 식민지 시절의 홍콩인들은 중국과의 연계성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그렇지만, 홍콩의 경제적 변화와 대비되는 중국의 기나긴 시련을 보면서, 홍콩인들은 중국과 일체감을 갖기보다는 독자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런 정서가 범죄인 인도법 개정 반대 시위 등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홍콩인들 눈에 비친 중국 역사
▲ 홍콩의 손중산기념관에서 찍은 쑨원(손문·손중산) 동상. ⓒ 김종성
영국 식민통치 하에서 서구식 민주주의를 경험한 홍콩인들의 눈에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이후의 중국도 이질적 존재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문화대혁명이나 톈안먼(천안문) 사태 등에서 나타난 인권 문제는 홍콩인들이 중국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이런 주요 요인들에 더해, 홍콩과 중국의 일체화를 저해하는 또 다른 요인들 중 하나로 인구 구성의 변화를 들 수 있다. 1842년 난징조약 당시의 슬픔을 기억하는 'DNA'가 홍콩인들의 의식 속에서 상당부분 지워질 정도로 인구 구성의 변화가 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홍콩 현지 발음으로는 케이런이고 베이징 발음으로는 치린이란 이름을 가진 출판사가 1992년 홍콩에서 발행한 홍콩 역사서 <19세기의 홍콩(十九世紀的香港)>에서는 "1841년 5월 15일 홍콩의 영국 당국이 발표한 최초의 인구통계에 따르면, 당시 7450명의 중국인이 있었다"고 말한다. 난징조약으로 영국에 할양되기 전부터 홍콩에 주둔한 영국군의 통계에 따르면 홍콩 인구는 그 정도였다.
한편, 당시 인구가 5650명이었다고 적힌 국내 논문도 있다. 어느 견해를 따르건 간에 1만 명도 안 됐던 홍콩 인구가 100년 뒤인 1941년에는 160만을 넘었다. 이 같은 엄청난 인구증가의 대부분은 외부 유입에 의한 것이었다.
이랬으니 1842년 당시의 역사적 경험이 홍콩인들의 유전자 속에 온전히 보존되기는 힘들었다. 중국으로부터 분리된 뒤에 유입된 사람들이 오늘날의 홍콩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으니, 이들이 1842년 이전보다는 1842년 이후로부터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데는 이해할 만한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홍콩에 체류 중인 범죄자를 중국이 임의로 데려갈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 추진됐으니, 홍콩인들의 입장에서는 홍콩이 1842년 이전으로 회귀함과 동시에 중국의 억압을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난지나해(남중국해) 등에서 미국·베트남 등에 의해 조성되는 반중국 분위기가 홍콩인들의 독자 노선을 어느 정도 지지해주는 측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지금 홍콩 내에서 전개되는 반중국 분위기는 1842년 이후로 독자적 정체성을 구축해온 홍콩인들 자신에 의해 형성되고 있다는 점에 훨씬 더 높은 비중을 두지 않을 수 없다.
홍콩 자치권은 앞으로 28년 뒤인 2047년 만료된다. 홍콩을 자신들의 것으로 놔두려는 홍콩인들과, 홍콩을 본토와 일체화시키려는 중앙인민정부의 갈등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지속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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