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2개 파일 '현미경 검증'... 지금까지 이런 재판은 없었다
[사법농단-양승태 검증기일] 원칙과 효율 사이... 임종헌 USB 파일-출력물 일일이 따져가며 진행
▲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의 모습. ⓒ 이희훈
검찰과 변호인이 형사소송법 조문을 세세히 다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 재판에서 또 하나의 진풍경이 펼쳐졌다.
14일 오후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5부(부장판사 박남천)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USB 관련 검증기일을 따로 진행했다. 검찰은 지난해 7월 임 전 차장 사무실 압수수색에서 확보한 USB 속 법원행정처 문건을 출력해 재판부에 증거로 신청했다. 검증기일은 USB 파일 1142개 전체와 그 출력물의 동일성·무결성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였다.
재판부는 이에 따라 임 전 차장 USB 파일 1142개의 검증에 나섰다. 이 파일들은 양승태 대법원이 어떻게 사법행정권을 남용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자료로, 디지털 증거로 쓸 수 있는지를 두고 임 전 차장 재판 때부터 법정공방이 끊이질 않았다. 압수수색절차가 적법한지 뿐 아니라 USB 파일과 출력물의 동일성, 무결성을 따지는 절차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공방에 또 공방... 더욱 엄격히 '원칙' 따졌더니
문제는 속도였다. 이 재판은 양 전 대법원장 구속 4개월 만에야 첫 공판이 열릴 정도로 지지부진했고, 여전히 그렇다. 원칙대로 디지털 증거 검증을 하려고 해도 워낙 파일 수가 많은 터라 재판은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재판부는 검찰과 변호인의 동의를 얻어 '효율'을 택했다. 12일 오후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대법관, 고영한 전 대법관 쪽에서 꼽은 30개 파일과 그 출력물을 대표로 동일성과 무결성을 확인하는 검증기일을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날 오전 박병대 전 대법관의 변호인이 일부 문건을 USB 파일에서 찾을 수 없다며 검증대상 문제를 제기했고, 검찰과 변호인이 다시 팽팽하게 맞섰다. 결국 계획한 증거조사를 시작조차 못 하자 박남천 부장판사는 "오늘(12일) 검증을 한다고 해도 재판 진행이 (원점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며 1142개 파일 전체를 확인하겠다고 정리했다.
그렇게 열린 14일 검증기일은 USB 파일을 화면에 띄운 뒤 출력물과 일일이 대조하는 방식으로 열렸다. 오후 2시 20분부터 시작한 재판은 네 차례 휴정 후 오후 9시 23분에 끝났지만, 검찰이 준비한 1142개 파일의 10%수준만 검증할 수 있었다. 원본 파일과 달리 쪽 번호가 25번부터 시작하거나 출력물에 적힌 날짜가 다른 경우가 몇 차례 나오긴 했지만, 대체로 파일과 출력물의 내용과 형태에 차이가 없었다.
결국 늘어진 '속도'... 변호인의 또 다른 제안
▲ 양승태, 구속 125일만에 첫 재판사법행정권 남용, 재판 개입 등 '사법농단' 피고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된지 125일만인 5월 29일 오전 첫 재판을 받기 위해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도착하고 있다. ⓒ 권우성
철저히 '원칙대로' 하는 검증이었지만 역시 속도가 문제였다. 꼼꼼한 절차를 주장해온 피고인 쪽에게도 다소 힘든 상황이었다. 결국 고영한 전 대법관의 변호인이 "USB 파일 자체를 확인하면 이런 절차를 계속 갈 필요는 없다"며 검찰에 파일 제공이 가능한지 물었다.
하지만 검찰은 "파일 자체에 개인정보가 있고 파일 형태라 유포될 수 있어서 다른 사건에서도 출력물로만 제공한다"고 답했다. 또 "편의를 위해서 변호인께서 저희 사무실에서 보고 간 적도 있다"며 "(검찰청에서 파일을) 보고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다가 다시 문제 삼기도 했다"고 말했다. 피고인 쪽에서 절차마다 꼼꼼하게 이의를 제기했으니 꼼꼼하게 할 것 다 하겠다는 뜻이었다.
검찰이 물러서지 않자 변호인들은 또 다시 '심리 속도를 늦춰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이들은 6월 28일부터 시작하기로 한 증인신문 기일을 7월 5일로 미루고, 추가로 검증기일을 진행하자고 했다. 세 피고인 없이 변호인들만 참석해서 6월 17~21일 사이에 검증을 마무리하는 방법도 제안했다.
박남천 부장판사는 "하루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진행해왔는데 피고인들의 여러 가지 주장이 나오면서 검증 범위가 늘어났다"고 입을 뗐다. 이어 "변호인들은 피고인이 참석하지 않는 상황에서 하면 안 되겠냐는데 그건 절차가 중간에 바뀌는 것이라 바람직하지 않다"며 "피고인 모두 참석하는 상태에서, 한 기일을 잡아서 더 여유 있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했다. 재판부는 18일 오전 10시부터 '현미경 검증'을 이어가기로 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