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천km 밖의 아내... 이런 별거 두 번은 안 할랍니다
[결혼했는데 따로 살아요 ④] 일방적 희생 없는 최선의 선택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 이제는 옛것이 됐습니다. 각자의 꿈을 위해 '자발적 별거'를 선택한 부부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편집자말]
익숙한 신호음이 울리다가 화면이 바뀐다. 서로의 얼굴이 보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외친다. "자기이~"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보면 화면 속 아내의 눈이 끔뻑끔뻑 거리고 이내 졸리다 말한다. "잘자, 쪽쪽쪽" 결혼 후 벌써 6년 차 부부지만, 떨어져 지내기에 전화를 끊을 때는 결혼 전 마냥 애틋하다. 하루가 그렇게 마무리된다.
우리 부부가 떨어져 산 지 벌써 6개월이 됐다. 대한민국 서울과 호주 퍼스, 세상 제일 가까운 우리 둘 사이에 8천 킬로미터의 바다가 놓여 있다. 직항로도 없어 경유해서 오면 비행기로 17시간 정도 걸린다. 같은 이불 덮고, 같은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 우리 둘은 어쩌다 이렇게 떨어진 것일까?
▲ 출국을 한달 앞두고 여느 때처럼 커피를 마시다 아내가 말했다. (커피 자료사진) ⓒ unsplash
"진짜 가고 싶어?"
지난 12월, 출국이 한 달 정도 남았을 때 아내가 다시 한번 물었던 기억이 난다. 어릴 적부터 외국인들과 어울려 살다가 대학까지 외국에서 졸업한 내게 서울의 삶은 언제나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원래는 대학 졸업 후 그냥 거기 눌러살 생각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집안 사정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서울은 내가 원하지 않았던 선택지였다. 대충 맞는 것 같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옷을 입은 듯한 느낌으로 그럭저럭 지냈다.
계속해서 다시 해외로 나갈 기회를 찾았지만, 자의 반 타의 반 늘 갈 수 없었다. 그러다 지난해 여름쯤 다시 기회가, 아니 용기가 생겼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준비를 했고 비행기만 타면 되는 시점이었다. 그때 아내가 물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아내였기에, 해외로 나가려는 나의 열망을 이해했고 줄곧 아무 말 없이 따라왔었다. 그러나 막상 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니 불안했나 보다.
아내의 불안은 너무 당연했기에 아무 대답 못하고 그저 바라만 봤다. 아내는 요즘 보기 드문 화목한 대가족의 차녀였다. 거의 매일 보며 사는 처가를 두고 저 멀리 가야 하는 건 아내에겐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번역 프리랜서를 하다가 호주로 넘어가서는 요리를 할 계획이 모두 세워져 있던 나와는 달리 승무원인 아내는 본인의 커리어를 위해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영주권을 받으면 다시 할 수 있다지만 그것도 빨라야 3~4년. 남편을 믿고 지지하지만, 자신이 포기해야 하는 것이 너무 컸다.
잠 못 이루는 날이 계속됐다. 무엇이 현명한 선택인지 아무도 답을 줄 수 없는 문제였다. 오롯이 나와 아내, 둘이서 결정을 내려야 했으니까.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아침에 일어나 늘 하던 대로 커피를 두 잔을 내려 식탁에 앉았을 때였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아내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일년 정도 서울에 더 있다가 갈게."
아내는 일년 정도 서울과 호주에서 각자 생활하면서 어느 쪽이 정말 우리에게 맞는 곳인지 알아보자고 했다. 어린 나이가 아니니 조금 더 신중해도 괜찮지 않냐며. 그리고 자신은 아직 한국에서 뭔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다고 했다. 따로 지내는 건 싫지만 계속 함께 할 사이니 잠깐 떨어져 있어도 참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마지막 한 모금을 넘긴 후 내가 답했다.
"그래."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아내는 항상 자신감과 재능 그리고 꿈이 많은 사람인데, 나 때문에 다 놓고 가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없지 않았으니까. 가장 현실적이고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나 역시 서울을 떠나는 것에 100% 확신이 있지는 않았다. 배수진이 아니라 발 하나는 걸쳐 놓고 싶었던 참이었다.
나홀로 출국
▲ 결혼 6년차인 우리 부부 사이엔 8천 킬로미터의 바다가 놓여져 있다. 사진은 내가 지내는 호주 퍼스 풍경. ⓒ 강동훈
한 달 후 호주로 향하는 비행기에는 나 혼자 앉아 있었다. 낯선 곳에서 홀로 생활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곁에 없어야 소중함을 느낀다고, 아내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큰소리 뻥뻥 쳤었는데 아니었다. 단순하게 요리, 빨래, 청소 같은 집안일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서울에서 같이 살 때도 원래 요리를 좋아하는 내가 삼시 세끼를 차렸다. 승무원인 아내는 한 달에 절반을 집 밖에서 지내기 때문에 당연히 집안 일은 잘하든 못하든 내가 다 했다.
진짜 견디기 힘들었던 건 아내가 옆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새로운 생활, 새로운 직업, 새로운 환경...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너무도 외로웠다. 매일 시간 날 때마다 영상통화도 하고, 문자도 보냈지만 채워지지 않은 마음은 그대로였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요일 밤이었다. 주황색 가로등만 띄엄띄엄 켜져 있는 텅 빈 도로를 나 혼자 달리고 있었다.
'왜 이리 차가 없지, 다들 집에 갔나?' 갑자기 외로움이 사무쳤다. 집에 도착해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떠난 사람보다 남는 사람이 더 힘든 법이라고, 둘이 함께 지내던 곳을 혼자 지키는 아내는 더 했다. "나만 남편 없어." 이 말을 지금도 참 자주 한다. 마트에 가도, 거리를 걸어도, 심지어 친정에 있을 때도 이미 결혼한 언니와 동생이 있으니, 같이 있는 남편들만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울먹일 때마다 해줄 말이 없다. 나도 같이 울먹거리는 것밖에는.
6개월 후
▲ 결혼 6년차인 우리 부부 사이엔 8천 킬로미터의 바다가 놓여져 있다. ⓒ 강동훈
그렇게 6개월이 지났다. 여전히 우리는 아침부터 자기 전까지 서로에게 문자와 전화로 뭐 했다, 뭐 한다, 뭐 할 거다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공유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이해가 안 가는 포인트에서 웃고, 또 서로가 그리워 울먹이기도 하고. 아직 우리가 어디서 살지 여전히 대화중이다. 하지만 시간은 흐른다. 얼마 남지 않은 '별거'를 마치고 다시 함께 하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내게 자발적 별거를 선택한 것에 대해 평가해 보라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잘했지만 잘못했고, 잘못했지만 잘한 선택이라고, 하지만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늘 함께 있고 싶어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기에 부부가 함께 지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때론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그 상황에서 우리는 한쪽이 원하는 것을 위해 다른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하지 않기로 선택했을 뿐이다. 내 꿈이 소중하듯, 아내의 꿈도 소중하니까.
그런데 또 떨어져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내 대답은 이제 정해져 있다. 싫다. 그냥 내가 아내를 따라가련다. 사람보다 소중한 꿈이 있더냐. 뭐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할 거라고, 어떤 경험은 태어나서 한 번이면 족하다. 두 번은 아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아침이다. 아내에게 전화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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