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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편하게 쉬고 싶어요" 전교조 전 위원장의 비혼살이

[인터뷰] 교육운동가 장혜옥, 전교조와 함께한 30년

등록|2019.08.03 16:20 수정|2019.08.05 13:33
  

▲ 2019년 7월 3일 강릉에서 김은숙 선생과 함께 살고 있는 집에서 인터뷰를 했다. ⓒ 안건모


"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 학급 문집이나 학급신문을 내는 교사, 지나치게 열심히 가르치려는 교사, 학생들의 자율성, 창의성을 높이려 하는 교사, 직원회의에서 원리 원칙을 따지며 발언하는 교사, 아이들한테 인기 많은 교사…."

기억나시는지? 1989년 5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창립됐을 때 당시 문교부(현 교육부)에서 '전교조 교사 식별법'이라며 일선 교육청에 내려보낸 공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1990년에 문교부는 이런 교사들 1500명 가량을 해임했다.

1993년 김영삼 정부는 사실상의 전교조 탈퇴를 조건으로 신규채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강요했다. 전교조 교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복직 신청서를 썼다. 그때 복직됐다가 2007년에 또 한 번 해직되는 교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끝내는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퇴임한 교사가 있다. 12대 전교조 위원장이었던 장혜옥 선생이다.

그이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장혜옥 선생은 지금 집도 절도 없다. 연금도 없다. 하지만 같은 전교조 교사이자 해직자였던 김은숙 선생 집에서, 김은숙 선생의 91세 노모를 모시고 내 집처럼 편안하게 살고 있다. 그분들을 만나기 위해 그가 한 달 전 이사했다는 강릉으로 찾아갔다. 집은 강릉 안목 해변가 뒤에 있었다.

장혜옥의 어린 시절

장혜옥 부모님 고향은 이북이었다. 두 분이 결혼하고 서울로 내려와 정착하면서 딸 둘을 낳았는데 전쟁이 터졌다. 두 분은 제주도까지 피난 갔다가 서울이 수복되면서 돌아왔다. 서울은 폐허가 돼 있었다. 옛날에 살던 서대문에 판잣집 하나 짓고 다시 시작하셨다.

"전쟁 통에 위로 언니들이 죽었대요. 셋째로 태어난 제가 맏이가 된 거죠. 내 밑으로 셋이 있어요."
 

▲ 1968년 중학교 2학년 때의 장혜옥 선생 모습. 사진 제공_ 장혜옥 ⓒ 장혜옥


장혜옥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노량진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는 중학교도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모두들 사대문 안에 있는 학교를 들어가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장혜옥은 스스로 서울과는 반대쪽인 영등포여중을 택했다. 장혜옥은 영등포여중을 거쳐 영등포여고를 다녔다. 장혜옥은 학교 공부는 물론 문예 백일장, 고전 읽기 대회 같은 데서 상을 받는 등 뛰어난 학생이었다.

"책을 좋아했어요. 어머니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어디 앉아서 책 읽고 있는 모습, 그걸 기억하시더라고요."

장혜옥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3학번으로 한양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장혜옥은 대학에서도 줄곧 수석을 유지했다. 놀기도 잘 노는 학생이었다.

"우리 때 청바지, 통기타, 맥주, 커피가 들어왔죠. 그 당시 우리 또래들이 낭만적인 걸 즐겼어요. 비만 오면 만나기, 기차 타고 춘천 여행 가기. 그때만 해도 세 시간 걸렸어요. 가다가 아무 데나 내리기, 내려서 차 한잔 마시기, 그런 여행 많이 했어요."

1975년 3학년 때, 단과대학 회장 선거에 뛰어들었다. 한창 선거 운동을 하는데 이상한 소식이 들렸다. 학도호국단 체제로 바뀌어버렸다는 것이다.

"학생회 임원을 다 임명한다는 거예요. 군인 체계로 바뀐다는 거예요. 총학생회장이 사단장. 단과대학 회장이 연대장. 과 대표가 중대장, 그런 식으로 바뀌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데모에 나가고…."

젊음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박정희는 1972년에 유신헌법을 통과시키고, 걸핏하면 긴급조치를 발동시키면서 살벌한 독재 정치를 펼쳐 나간다. 그러나 학생들은 주눅 들지 않았다. 시위가 격화되고 점점 교문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한양대는 학생 전체가 나서는 투쟁은 안 했었거든요. 그런데 학생회를 학도호국단 체제로 바꾸는 만행을 저질러 학생들이 그때부터는 연좌시위도 하고 왕십리까지 진출하는 시위도 했어요."
  

▲ 1975년 대학시절 국문과 발표회를 하고 있다. 사진 제공_ 장혜옥 ⓒ 장혜옥


장혜옥은 1977년 2월 26일 토요일에 졸업한다. 그리고 다음 날 일요일 기차를 타고 서울을 떠난다. 장혜옥은 남쪽으로 가보자고 마음먹고 중앙선을 탔다.

"어릴 때부터 독립하는 게 꿈이었어요. 무조건 기차를 탔어요. 졸업장, 성적증명서, 졸업증명서, 교사 자격증, 이력서 하나 써 가지고…. 편집부 일을 하면서 책을 내기도 했고, 글도 쓰기도 했고, 상 받은 게 제법 있으니까 그런 거 이력서에 써넣고…. 성적은 괜찮았으니까."

그 당시 중앙선 기차역 종점이 안동이었다.

"안동에서 내려 돌아다니다가 학교가 하나 보이길래 들어갔죠. 이게 되려고 하면 운이 트이잖아요. 일요일이었는데 교장 선생님은 없고 마침 이사장님이 학교를 나와 있었던 거예요."

그때만 해도 시골엔 교사가 부족할 때였다. 이사장은 장혜옥이 내민 이력서와 서류를 보더니 반색을 했다. 그 학교는 기독교 재단 학교였고, 장혜옥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얘기를 하는데 서류 근사하죠, 한마디 뭘 물어보면 열 마디 대답하죠, 열심히 신앙생활 할 때였으니까 성경 지식도 풍부했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주일학교 반사(교회 학교의 선생)를 했어요. 대학까지 했으니까 10년 동안 계속 반사를 한 거예요."

그 학교는 교사 정원이 차 있어 이사장은 같은 재단의 경안여자상업고등학교(현 경안여자고등학교)를 소개했다. 일사천리였다. 장로 한 분이 소개해 줘서 방도 금방 구했다. 장혜옥은 다음다음 날부터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불 한 채 사고, 밥그릇 사고, 접이 밥상 하나 사고, 그렇게 시작했죠."

투쟁하는 장혜옥 선생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안동이 그렇게 보수적인 동네라는 걸 몰랐어요. 한 달 지나니까 알겠더라고요."

장혜옥 선생은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와 청바지를 입고 첫 출근을 했다. 모두가 장혜옥 선생에게 눈길이 쏠렸다. 청바지를 입고 학교에 오다니? 청바지는 안동에서 남자 교사도 못 입는 옷이었다. 나이 먹은 무슨 과장인지 하는 사람이 으슥한 교실로 장혜옥 선생을 데리고 가더니 문을 닫았다.

"막 야단치는 거예요. 어딜 여자가 청바지를 입고 다니냐고요. 그냥 가만히 듣고만 있었죠. 네, 네, 네, 대답하고, 그 다음 날 청바지를 또 입고 갔죠. 하하하."

그 과장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교무실에서 다른 교사가 있는 데서 야단을 쳤다. 장혜옥 선생은 한쪽 귀로 흘려들었다. 그 다음 날 또 청바지를 입고 갔다. 이번엔 교감이 불렀다.

"교감이 막 야단치더라고요. 그러거나 말거나 청바지를 입고 다녔어요. 3년을, 일부러."

하루도 빠짐없이 청바지를 입고 다녔단다. 그런데 사립학교에서 어떻게 해고를 당하지 않았을까. 장혜옥 선생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 자랑을 한다.

"그만두라는 소리는 못 하죠. 나 같은 교사가 어디 있어요. 잘 가르치겠다, 애들이 너무 좋아하겠다. 그때 가자마자 고3 가르쳤거든요. 저하고 네 살 차이 나는 학생들이 저를 신기해했어요. 일단 말투가 신기하고, 애리애리한 게 너무 신기하고, 뽀얀 게 너무 신기하고…. 뭐든지 아는 척하잖아요. 그 풍부한 지식들…. 종횡무진 박학다식해야만 되잖아요, 문학은."

장혜옥 선생은 안동의 남존여비 사상이 얼마나 지독한지 몇 가지 사례를 들었다. 일단 학교에 여선생이 거의 없었다. 장혜옥 선생은 몇 년 뒤 남학생만 있는 경안고등학교로 옮겼는데 그때까지 그 학교 교사 60명 중 여교사는 세 명뿐이었다. 그동안 여자는 담임을 한 번도 맡지 못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하는 장혜옥 선생이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가자마자 담임을 주었다.

"내가 여교사 첫 담임이래요. 그런데 학부모들 사이에서 '어머 여자야, 어떻게 해?' 하는 반응이었어요."

안동에서 여자는 2등급 '인류'였다. 아무리 연배가 높아도 일단 여자는 무조건 2등급이었다.

"학교에 실내화 신발장이 있어요. 남자 서열순으로 위에서부터 있고, 여자는 나이가 많고 서열이 높아도 그 밑으로…."

2등급도 아닌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할 때가 많았다. 문상 때였다.

"어느 날, 학교 선생이 상을 당했어요. 문상 간다고 대절한 버스가 왔는데, 문상 갈 사람들 타라고 하더라고요. 탔더니 남자들이 이상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거예요. 왜 탔냐고. 여자는 문상 가면 안 되는 거래요. '왜요. 여자는 왜요?' 그랬더니 무조건 여자는 문상 가는 거 아니라고 해요. 그때부터 싸우기 시작해서 떳떳하게 문상 가는 데만 3년 걸렸어요."

처음 문상 간 날은 버스에서 내리지도 못하게 했다. 장혜옥 선생은 그 뒤에도 꾸준히 문상을 가는 '투쟁'을 했다.

"거의 3년 넘게 투쟁해서 떳떳이 가게 됐죠. 그렇게 됐는데 그다음엔 가기 싫더라고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가부장 문화에 물들어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학교 밖 식당에서 남학생들하고 밥을 먹을 때였다.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애들한테 먼저 밥을 줘요. 그럼 애들이 '아, 선생님 먼저' 하면서 나한테 양보하면 식당 아주머니가 눈을 부라리면서 '어딜, 여자가 먼저?' 그런 충격들이 일상에서 계속…. '어딜, 여자 먼저….', '여자가 어딜?' 이런 말을 수도 없이 들었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가장 안타까운 건 부모들이 자기 아이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대학을 안 보낸다는 사실이었다.

가부장 문화는 괴로웠지만 아이를 가르치는 게 너무 행복했다.

"보통 월요병이라고 그러잖아요. 저는 토요병, 애들하고 헤어져야 하니까 토요일이 너무 싫은 거예요. 그래서 가정방문 갈 때가 너무 좋았어요. 안동에도 시골애들이 유학을 많이 오거든요. 토요일 되면 애들이 시골을 가요. 하루에 몇 번 안 다니는 버스를 타고. 그러면 같이 쫓아가는 거예요. 가면 학부모들이 다 신기해했어요. 뽀얀 사람이 야들야들한 블라우스에 청바지 입고 다니는데 선생이라니까 얼마나 신기하겠어요."
 

▲ 1979년 경안여자고등학교 3학년 제자들과 장혜옥 선생. 사진 제공_ 장혜옥 ⓒ 장혜옥

 
호헌 철폐, 독재 타도

1979년 박정희 사망에 이어 1980년 전두환이 광주에서 시민들을 학살한 뒤 정권을 잡았다. 장혜옥 선생은 시국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다. 1986년 무렵, 안동 가톨릭교회에서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곳에서 상영하는 광주 5·18 영상을 보게 됐다.

"아마 독일 기자가 촬영했다는 그 영상이었을 거예요. 그때부터 확 돌았죠."

장혜옥 선생은 잘못된 것을 보면 바로 고치려고 실천하는 성격이었다. 그 무렵 안동에서는 서너 명의 교사가 물밑에서 전교협(전국교사협의회) 활동을 하고 있었다. 장혜옥 선생은 망설임 없이 전교협에 가입한 뒤 활동하기 시작했다.

전두환 독재정권의 만행은 더욱 심해졌다. 1987년 1월 14일, 경찰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철을 고문·폭행으로 살해했다. 4월 13일, 전두환이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를 계속하겠다는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6월 9일, 연세대 이한열 군이 경찰의 직격 최루탄을 맞고 죽었다. 6월 10일, 전두환이 잠실체육관에서 노태우를 민정당 대통령후보로 지명(?)했다. 그날 오후,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간접선거를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짱돌을 던졌다. 6·10항쟁이었다.

"안동 시내에서도 시위가 일어났어요. 박종철 사건 터졌을 때 다들 리본 달고 학교에 출근하자 그러더라고요. 까만 리본이 없어서 치마 속 까만 안감을 찢어서 리본을 만들어 달고 갔거든요. 교무실 선생님들이 싸늘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라고요. 난 다 달고 왔을 줄 알았어요. 뗄 수가 없잖아요. 하루 종일 달고 있었죠. 그게 일종의 심리적 계기였던 거 같아요. 그때부터…."

1987년 6월 불어닥친 민주화운동 바람은 사학 민주화와 교육민주화 심지에 불씨를 댕긴다. 그해 9월 27일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 창립식이 열린다. 전교협은 창립 1년 만에 전국 평교사의 10%에 달하는 3만 명의 회원이 가입한다. 2년 뒤, 1989년 5월 28일 한양대를 원천 봉쇄한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지도부는 연세대학교, 조합원들은 건국대학교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창립대회를 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교사 노조는 불법이라고 규정하고 폭력으로 진압했지만 전교조 창립을 막지 못했다. 당시 문교부(장관 정원식)는 전교조 조합원을 해직하겠다고 공표했다.

"전교조까지 잘 넘어왔는데 넘어오자마자 탄압을 받기 시작했어요. 7·9대회라고, 그때 2천여 명이 여의도에 집결했다가 한 시간도 안 돼서 다 잡혀갔어요."
 

장혜옥 선생도 동료 교사 여섯 명과 같이 집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서로 끌려갔다. 이틀 동안 잡혀 있어서 월요일에 학교를 가지 못했다.

"학교에서 난리가 났어요. 교사들이 정권의 탄압을 피부로 확 느낀 거죠. 화요일에 학교를 갔더니 전부 탈퇴하겠다고…. 탄압을 돌파하기 위해서 7·9대회가 열린 건데 '앗 뜨거라' 하면서 다 빠진 거죠. 열 명, 스무 명, 그다음 날 서른 명, 우르르 탈퇴 각서 써서 내는 거예요."

장혜옥 선생은 각서를 쓰지 않고 혼자 남았다. 학교 재단에서는 장혜옥 선생이 쫓겨날까 봐 오히려 걱정됐다. 실력 있고 인기 많은 교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학교에서 각서를 쓰라고 회유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장혜옥 선생도 탈퇴각서를 냈다는 소문이 퍼졌다.

"'나 안 냈는데요?' 했더니 낸 걸로 돼 있다는 거예요. 추적하니까 정말 저를 아끼고 사랑하는 선배께서 '내가 책임진다'며 내 도장 갖고 가서 찍고 탈퇴 각서를 낸 거예요. 서랍에 도장 다 있으니까."

장 선생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아무리 자신을 아낀다고 해도 그렇지, 자기 신념에 어긋나는 짓을 할 수가 있을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집에까지 가서 깽판 쳤죠. '나 이거 소송 건다. 사문서위조다.' 그 집안 발칵 뒤집어진 거예요. '당신이 왜 그런 짓을 하냐, 무슨 관계냐 둘이…'"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결국 그 사람은 도장을 찍은 그 탈퇴 각서를 다시 빼 와서 장혜옥 선생에게 돌려줬다.

"그래서 무사히 해직됐죠."

장혜옥 선생은 해맑게 웃었다. 그때도 전교조 사무실에서 해직 통보서를 흔들면서 '무사히 해직됐다'며 웃었단다. 정말 행복해 보였다. 자기 삶은 자기가 끌고 가는 것, 당장은 힘들어도 그게 행복한 삶인지도 모른다.

해고될 당시 다니던 경안고등학교 학생들이 들고 일어섰다. '의기 충만한'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 이들은 장혜옥 선생이 해고돼야 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학생들에게 장혜옥 선생님은 최고의 선생님이었다.

"남자애들한테 제가 오죽 인기가 많았겠어요. 제가 부임하고 애들이 놀랐던 게 '여선생님이 가르치는 거 처음 봤다', '웃으면서 수업하는 선생님 처음 봤다', '존댓말 쓰는 선생님 처음 봤다', '안 때리는 선생님 처음 봤다'는 거예요."

아이들이 장혜옥 선생을 따르는 건 너무 당연했다. 전교생이 수업을 거부하고 운동장에 나와 스크럼을 짜고 연좌시위를 했다. 이사장이 장혜옥 선생에게 아이들을 설득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열 시에 운동장에 전부 나와서 아이들이 송사하고 제가 답사하고 그러고 보냈다는 거 아니에요. '얘들아 잘 있어라. 내 꼭 돌아올게.' 그랬는데도 내가 가르치던 아이들은 화가 나서 수업시간에 새로운 선생님 오셨는데 뒤돌아 앉기, 교과서 안 꺼내기, 쳐다보지 않기, 엎드려 있기, 이런 거 한 거예요. 그 선생님 얼마나 곤혹스러웠겠어요. 그 당시 전교조 흐름 다 알 텐데. 그분이 저희 집까지 찾아오셔서 읍소를 하시더라고, 너무 가슴 아프다고 눈물 흘리더라고요. 그래서 일일이 아이들 찾아다니면서 '얘들아, 그러지 말거라. 나 반드시 돌아온다.' 그리고 끝났죠."

전교조 활동

장혜옥 선생은 1990년에 안동지회에서 교육선전부장으로 1년을 활동하다가 경북지부 정책실장으로 가게 된다.

"경북지부가 대구에 있었어요. 안동에서 기차 타고 대구로 출퇴근했죠. 그때 독서 어마어마하게 했어요. 하루에 다섯 권? 정책실장이니까 정세 공부하느라."

1992년에 경북 출신 이영희 선생이 전교조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장혜옥 선생은 이영희 위원장 보좌관 격으로 본부로 올라갔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본부에 100명가량이 있었는데, 남자가 40명, 여자가 60명 정도였다. 그런데 위원장부터 국장까지 간부는 다 남자가 차지하고 있었다.

"나름 하나하나 보면 여자들도 다 서울에서 대학 다닌 잘난 사람들이고, 무슨 과에서 수석했던 사람도 있다 그러고, 여자들은 이렇게 똑똑하고 잘났는데 다 따까리만 하냐, 항의하고 그다음 위원장이 오셨을 때 여성 간부를 세우라고 막 싸웠죠. 본부에 탁아소 만들기 운동도 하고 조직 내 성평등주의를 주장하고 여성주의 운동을 했죠. 하다 보니까 미운털이 박히기도 하고, '장혜옥은 너무 정치적이야' 하는 꼬리표가 붙었죠. 여성들의 의지, 그것이 권력의지든 인정 욕구든 좋게 보지 않는 거죠."

장혜옥 선생은 여성할당제도를 만들고, 남녀 동반 출마 제도도 관철하려고 노력했다. 상근비는 따로 없었다. 후원자들이 보내 주는 활동비로 차비도 하고 생활비를 해야 했다.

"한 달에 18만 원 정도 가지고 살았죠. 전 혼자니까 살았는데… 그래도 저축한 돈 다 떨어지고 어떻게 하지? 이제 일 좀 해야 하나 할 때 복직하느냐 마느냐로 정부하고 교섭하게 됐어요."

이 글 앞부분에 밝힌 대로 전교조 탈퇴와 신규채용을 조건으로 복직하게 됐다. 전교조 교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복직 신청서를 썼다. 장혜옥 선생도 어쩔 수 없이 복직원을 썼다.

"희망 발령지를 쓰라고 하더라고요. 1지망 경안고, 2지망 경안고, 3지망 경안고를 썼는데…. 정말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었죠."
 

▲ 2003년 전교조 수석부위원장 시절. 사진 제공_ 장혜옥 ⓒ 장혜옥


나중에 알고 보니 원직 복직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사립학교에서 해직된 교사들도 모두 공립학교로 가야 했다.

"영주 소수중학교로 발령이 났어요. 경안고등학교로 못 가는 게 너무 속이 상해서 밤새 소주 마시면서 울었다는 거 아니에요."

영주에 있는 소수중학교는 한 학년에 한 학급이 있는 작은 학교였다. 장혜옥 선생은 소수중학교 아이들하고 금방 정이 들었다.

"'사람이 꽃이다'라는 걸 그때 알았어요. 모둠수업을 할 때였는데 모둠 하나가 까르르 웃으면 봉오리가 활짝 피는 것 같고 고개 숙이고 공부하고 있으면 봉오리가 맺힌 것 같고, 정말 애들이 꽃 같다는 걸 느꼈어요. 설명하면 재미있다는 표정, 단어 뜻을 잘 모르면 '그게 뭐예요?' 하고 묻는데 너무 예뻐요."

1999년 7월 1일에 전교조는 드디어 합법화된다. 순식간에 조합원이 10만 명으로 늘어난다. 장혜옥 선생은 영주여고로 발령이 나고 2002년부터 영주지회장을 맡는다. 그리고 2002년 12월에 제10대 전교조위원장 선거에 원영만 후보와 수석부위원장 러닝메이트로 출마해서 당선된다. '학교 자치와 교장 선출 보직제' 추진본부장, 교육과정 개편 특별위원장 등을 맡았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지 1년이 지난 2004년 3월에 수구세력들은 대통령이 선거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고 주장하면서 탄핵소추안을 가결하는 '의회 쿠데타'를 일으켰다. 몇만 명이 탄핵소추에 반대하는 촛불을 들었다. 전교조도 '탄핵 반대 교사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쫓겨날 뻔했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은 2004년 4월 2일 원영만 위원장과 장혜옥 선생을 '탄핵 반대 교사 시국선언'을 했다고 공무원법 위반 혐의로 기소한다. 그리고 1심에서 원영만 위원장에게 벌금 500만 원 형을 선고한다. 대체 이게 무슨 경우일까?

"저까지 다른 세 명은 벌금 30만 원 형을 선고받았어요. 저는 시국선언 기자회견장에 있지도 않았어요. 출장 가 있었거든요."

30만 원 벌금형은 교사직이 유지된다. 2심으로 넘어가 원영만 위원장은 300만 원 벌금형으로 낮아졌는데, 장혜옥 선생은 그대로 30만 원 벌금형을 받았다. 해직된 원영만 위원장의 300만 원도, 장혜옥 선생의 30만 원도 억울한 판결이기 때문에 당연히 대법원에 상고했다.

노무현 정권의 교육 정책은 보수 정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당시 교육부는 "실추된 공교육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생님들이 스스로 신뢰를 지키는 일"이라고 하면서 교원평가제를 실시하려고 했다. 우리나라 공교육이 붕괴 위기에 직면할 정도로 심각하게 왜곡되고 파행에 이르게 된, 자신들이 밀어붙였던 교육 정책의 실패를 교원들에게 떠넘기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계속 밀어붙인다.

교육부는 또 NEIS(네이스: 교육정보화시스템)를 밀어붙였다.

"네이스가 뭐냐면 그게 삼성 SDI가 처음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학생 정보를 집적 유통시키는 건데, 핵심은 교육의 시장화예요."

네이스는 노동자 통제와 고객 관리를 핵심으로 하는 ERP(전사적자원관리, Enterprise Resource Planning)시스템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필연적으로 교원의 교육활동을 통제하고 학생의 개인정보 수집으로 인권 침해를 동반하게 된다. 전교조가 투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교육의 시장화에 대한 철저한 성찰이 없었던 거 같아요. 어쨌든 경제가 살아난다면 교육을 풀어서라도 살려야 되지 않느냐, 그래서 경제 수장을 교육부 장관에 앉힌 거죠. 그런데 전교조가 끊임없이 투쟁을 하니까 미워 죽는 거예요."

장혜옥 선생은 수석부위원장 임기가 끝나고 경북으로 내려갔다. 그 뒤에 이수일 집행부가 들어섰다. 이수일 위원장은 대의원 대회에서 결의한 교원평가 시범사업 반대를 위한 연가투쟁을 직권으로 철회했다.

"교사들에게 자극도 되고 수용할 수도 있지 않겠나. 이런 입장을 갖고 대의원대회에 교원평가 시범사업 수용론을 내놨어요. 부결돼서 그 즉시 사퇴했죠. 이거를 나보고 수습하라고 해서 위원장 선거에 나가게 된 거예요."
 

▲ 2006년 교원평가반대 전교조위원장시절. 사진 제공_ 장혜옥 ⓒ 장혜옥


장혜옥 선생은 2006년 3월 30일 치러진 전교조 제12대 위원장 보궐선거에서 전체 투표자 중 54.5%의 지지를 얻어 당선됐다. 전교조가 합법화된 뒤 첫 여성위원장이었다. 원칙주의자, 부드러운 카리스마, 탈레반 같은 별명을 얻으면서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교육 정책에 맞서 싸웠다.

끊임없이 노무현 정부의 교육정책에 반기를 들면서 싸우는 도중 임기가 끝나고 제13대 위원장 선거가 시작됐다. 장혜옥 선생은 또다시 위원장 선거에 출마했다. 그런데 갑자기 2심에서 30만 원 벌금형을 받은 공무원법 위반 재판 사건을 대법에서 파기 환송시켰다.

"2심 끝난 지 6개월째, 제가 11월 중순에 후보 등록을 하니까 11월 말에 대법원에서 파기 환송시켜 버려요. 전에 법 해석은 공무원법 위반이었어요. (선거법 위반 혐의는 무죄) 공무원이 성실 의무 잘하지 않았다 이런 거였는데 벌금이 아무리 많이 나와도 해직되지는 않죠. (관련 기사: 장혜옥 전교조위원장 교사직 상실 위기) 그런데 대법에서 파기 환송시키니까 고법에서 일주일 만에 선거법 위반으로 선고를 내리는데 벌금 100만 원으로 올려버린 거예요. 100만 원 이상이면 해직되거든요."

장혜옥 선생은 결국 선거법 위반으로 해직을 당했다. 성명을 발표했다고 해직되는 교사들이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을 것이다.

"해직이 되니까 다른 후보들이 '해직자는 자격이 없다, 해직자는 교원이 아니므로 교섭을 할 수 없다, 교섭을 할 수 없는 위원장이 어떻게 가능하냐' 하는 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한 거예요. 그 무렵 성과급 반대 투쟁으로 성과급 다 걷어서 반납해 버리자고, 성과급을 걷었는데 천억이 걷혔어요. 다른 후보들이 그 돈 안 주고 전교조가 투쟁 기금으로 한다, 이렇게 퍼트리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니까 선거운동하러 가면 당신은 해직자인데 어떻게 위원장을 하냐, 성과급 걷은 돈 반납할 거냐, 돌려줄 거냐 정확하게 대답해라, 이 얘기만 나와요. 되겠어요? 떨어졌죠. 그때부터 다시 해직 교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죠." 
 

▲ 2006년 성과급반대투쟁. 사진 제공_ 장혜옥 ⓒ 장혜옥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전교조를 아예 말살시켜 버리려고 기를 썼다. 끝내는 전교조가 해직자 9명을 노조 활동에서 제외하지 않는다고, 고용부가 지난 2013년 10월 24일 헌법도 아닌 '노조관계법 시행령'을 내세워 전교조를 법외노조임을 통보했다.(당시 양승태 대법원 시절 행정처가 '박근혜 대통령 국정운영 뒷받침' 사례 중 하나로 꼽은 바 있어 '재판 거래' 의혹이 있는 판결이었다. -2018년 8월 6일자 <한겨레>에서 인용함.)

전교조의 법외노조 재판은 대법에서 5년째 계류 중이다. 판결을 기다릴 것도 없이 대통령 한마디면 끝나는 사안이다. 대법원은 대통령 눈치를 보고 대통령은 수구세력 눈치를 보는 걸까? 문재인 정부도 전교조 합법화가 두려운 걸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장혜옥 선생은 결국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해직된 상태에서 정년퇴임을 했다. 교실에서 아이들하고 한 번 더 만나지 못한 게 가장 아쉽다. 장 선생은 아이들 이야기만 하면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가장 행복했을 때가 아이들 가르쳤을 때죠. 아이들이 꽃처럼 피어나는 느낌을 받을 때…. 그래서 복직을 못 하고 퇴직한 게 마음에 걸려요. 김은숙 선생은 애들이 너무 힘들게 해서 명예퇴직을 했다는데 저는 퇴직할 때까지 그런 경험이 없어요. 그냥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어요. 제가 운이 좋았죠."

뒷이야기

그동안 전교조 교사들이 했던 일들을 돌아보자. '일제고사 폐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폐지', '친환경 무상급식 무상교육 실현', '학생인권조례 제정', '사학민주화와 부패사학 척결' 등 교육 정책 개선부터, '0교시와 야간자율학습 폐지' '혁신학교 도입과 수업혁신', '내부형 교장공모제 도입' 등 교육정상화에 앞장섰고, '체벌・촌지 근절',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 '교권 보호와 교원들의 노동조건 개선'까지 수많은 일을 했다. 해직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보상은커녕 법외노조 굴레를 씌우고 복직조차 해주지 않는다.

1989년 전교조 해직 교사들은 2000년에 만든 '민주화보상법'에 의해 모두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다. 그러나 증서 한 장만 받았을 뿐 어떠한 실질적인 보상도 없었다. 늦게 교단에 복귀했거나 고령인 분들은 심지어 연금도 못 받고 있다. 두 번 해직된 뒤 정년퇴임한 장혜옥 선생도 연금이 한 푼도 없다. 그래도 마음 맞는 동료 교사에 의탁해 함께 살고 있으니 부족함이 없다.

"1992년 봄 돼서 만난 게 김은숙 선생님이에요. 저이도 해직 교사. 서울본부 여성국에 와 있었고, 그 이전부터 여성주의에 대한 성찰이 깊었던 사람이에요. 저는 2015년에 얼마 안 되는 제 모든 자산을 정리했죠. 주변 지인들에게 3일 동안 집을 개방하고 다 가져가라 했어요. 책도 2천몇백 권이 있었는데 3일 만에 다 가져갔어요. 레코드, 책장, 오디오, 냉장고, 3일 만에 싹 없어지더라고요. 다 없애고 이 선생님 집에 캐리어에 옷 몇 벌 가지고 왔어요. 혼자 사는 비혼들이 주변에 많아요. 비혼들과 어울려 살아보자고 했죠."

장혜옥 선생의 삶을 되돌아보자. 2003년부터 2014년까지 10여 년 동안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노동당에서 당 활동을 했다. 교육감 후보 예비선거에 출마하기도 했고, '학벌없는사회'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아직도 장 선생은 맡은 직책이 많다. 물론 돈을 받는 직책은 아니다. 한베평화재단 이사, 이주노동희망센터 이사이자 운영위원,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이사, 소박한 자유인 이사, 참교육동지회 정책위원….

"운동이라는 게 조직을 떠난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평생, 죽을 때까지 가는 거잖아요. 내 의식을 구현하는 게 운동이니까.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하면서 살 것인가가 늘 삶의 화두니까. 요즘은 한베평화재단 일을 주로 하고, 이주노동희망센터 일도 좀 많아요. 해외 학교에 교육 지원하는 것이 있어서. 그리고 전교조 전 위원장은 전원 전교조지도위원이에요. 죽을 때 전교조장을 치러 줘요. 전 다 돼 있어요. 하하하."
 

▲ 2010년 학벌없는사회 대표 때 강의를 하고 있다. 사진 제공_ 장혜옥 ⓒ 장혜옥


지금 장혜옥 선생은 마음이 여유롭고 편안하다. 하지만 여전히 현장에서 고생하는 분들을 보면 안타깝다.

"이젠 전 좀 편하게 쉬고 싶어요. 그런데 조희주 샘이라고, 용산참사 투쟁에도 온몸을 던져 참여하신 분, 전설 같은 분인데, 그분은 저보다 네 살인가 많은데 여전히 청와대 앞에서 1인시위 하거든요.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각성이 되긴 하는데…."

"이젠 좀 쉬셔도 돼요" 하고 유이분 작은책 편집장이 말했다. "정말 쉬어도 될까?" 장 선생이 위로가 된다는 듯 잔잔하게 웃는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함께 사는 김은숙 선생이 식탁에 감자옹심이를 차려 놓았다. 장 선생이 그런 김 선생을 보면서 말한다.

"저 선생님은 천사처럼 남을 대접하기를 좋아해요. 좋아하는 친구들이 저보다 훨씬 많죠. 친화력이 참 대단해요. 초중고 대학 때 친구도 지금까지 만나고, 모든 전임 학교마다 만나는 팀이 있더군요."

인터뷰가 끝나고 두 분과 함께 강릉에서 살고 있는 <작은책> 독자 김성수·반영숙 씨 부부를 만났다. 김성수·반영숙 씨는 1980~1990년에 강원도 태백시 탄광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분들이다.(<작은책> 2017년 3월호 '작은책이 만난 사람'에 실려 있다.) 두 분은 2007년에 이곳으로 와서 복숭아 농사를 지으면서 골프장 반대투쟁을 했고, 교육희망네트워크 같은 교육운동을 했다. 김성수씨는 현재 '강릉시민행동' 운영위원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주문진 바닷가에 있는 카페 야외에서 차를 마시면서 복숭아 농사 이야기, 강릉에 사는 활동가들 이야기, 시국 이야기를 나눴다. 장혜옥·김은숙 선생이 '강릉시민행동' 단체에 어떻게 후원할 수 있냐고 묻는다. 쉬고 싶다는 장혜옥 선생에게 마당발인 김성수·반영숙씨를 괜히 소개해 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 2018년 1월, 한베평화재단 활동 청와대 앞 1인시위. 사진 제공_ 장혜옥 ⓒ 장혜옥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월간 <작은책> 2019년 8월호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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