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대통령(오른쪽부터),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6월 30일 오후 판문점 남측 자유의 집 앞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6월 30일, 한번쯤은 꿈꿨던 일이 이루어졌다. 초여름의 어느 평범한 일요일 오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 판문점에서 벌어진 것이다. 20세기 냉전의 마지막 상징인 판문점에서 그동안 그토록 적대해온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만났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이후에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은 이미 두 차례 있었지만 두 정상이 만난 곳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었다는 사실과 정상회담이 불과 하루 만에 조율되었다는 점 때문에 그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남북미 정상 간의 만남은 이렇게 갑작스럽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하노이회담이 결렬된 후 북미 간의 냉랭한 기류가 흘렀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북한 내부적으로도 재정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중론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북제재 속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했던 한국 정부가 대화의 모멘텀을 되살리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현실의 조건은 그만큼 냉혹했으며, 그 구조 안에서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려웠다. 게다가 한반도 평화의 중요한 고비를 몇 번 넘긴 이후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했던 상당수는 이미 패배적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럼 그렇지, 한반도 평화가 가능하겠어?" 지난 70여 년간 우리를 괴롭혀 온 그 냉소적인 생각에 다시금 빠져든 것이다.
하지만 찬찬이 살펴보면 작년부터 남북 간에 만들어 온 변화라는 현실적 조건이 있었기에 이번 남북미 판문점 회담이 가능했다. 우선 <9.19 군사합의: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에서 남북이 동의한 비무장지대의 평화 지대화가 상당 부분 진척되었기 때문에 갑작스런 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남북은 공동경비구역을 비무장화하기로 했으며, 그 시범적 조치로 감시초소를 철거한 바 있다. 원칙적으로 남북 쌍방은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도 상대방의 관할구역을 침입 또는 공격하거나 점령하는 행위를 하지 않기로" 합의하였으며,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완화와 평화 안착을 위한 조치를 하나씩 이행해나가고 있었다. 물론 남북 간 합의서의 이행 문제로 북한 측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나마 비무장지대의 진정한 '비무장화'를 남북이 구현하였기에 남북미 간의 '번개' 미팅이 가능했다.
또한 판문점이라는 공간의 특수성과 남북관계의 오래된 경험으로 인해 남북미는 단 하루 만에 정상 간의 회담을 조율할 수 있었다. 알려진 것과 같이 6월 29일 오사카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제안이 있자마자 남북의 실무진은 의전과 의제 등을 조율하기 위해 판문점에서 만나 밤샘 실무접촉을 진행했으며, 비록 정상회담으로는 소박한 장소이지만 보완이나 안전의 문제없이 세 정상이 만날 수 있었다. 게다가 갑작스레 판문점에서 열렸던 2018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경험은 기존 외교 관계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던 의전이나 격식 같은 것은 언제든지 제고될 수 있다는 교훈을 얻기에 충분했다.
▲ 군사분계선 넘는 트럼프-김정은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6월 30일 오후 판문점 군사분계선 북측 지역에서 인사한 뒤 남측으로 향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편 북한의 지도자는 또 어떠한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그 운둔의 왕국에서 저벅저벅 걸어 나와 핵과 경제문제를 해결하겠다며 판문점, 싱가폴, 하노이 마다하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북미 간 대화의 기회를 이어갈 수만 있다면 중국에 비행기를 빌려야 하는 수모나 기차를 타고 대륙을 횡단해야 하는 수고 정도는 기꺼이 감수한다. 북한 체제에서 지도자라는 위치의 상징성을 짐작해봤을 때 김정은 위원장의 이러한 최근 행보는 지금까지의 북한 체제의 엄청난 변화라고 평가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 또한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이번 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앞에 나서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러 군사분계선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문재인 대통령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스포트라이트는 오롯이 트럼프 대통령의 것이어야 한다고 작심이라도 한 듯 말이다. 북미 간의 대화를 진척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인지한 행동이라 할만하다.
이번 남북미 판문점회담에 대해서 평가가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국내정치적 고려를 한 트럼프 대통령의 즉흥적 제안에 하노이회담 이후 내부 불만을 제압하기 위한 김정은 위원장의 절실함이 화답하여 만들어낸 하나의 '쇼'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양 정상 간의 구체적인 합의가 부재하다는 것이 그 증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물론 일리가 있는 말이다. 갑작스레 만들어진 회담에서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비핵화 협상의 구체적인 해결책이 도출될 수는 없다. 그만큼 결과가 없을 것을 알고 만났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하지만 교착상태에 빠져 허우적 거려온 북미회담이 두 정상의 무려 한 시간에 가까운 만남을 통해 돌파구를 만든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한동안 냉랭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던 김정은 위원장이 다시금 문재인 대통령과 악수하며 포옹한 것 또한 무형의 성과라고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연유가 어찌되었건 적대하던 두 국가의 정상이 만난다는 것 그 자체로 희망적이다.
상상했던 것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면, 그만큼 현실의 지평은 넓어지는 것이 된다. 이제 남북미가 만났으니, 그 다음의 상상은 이를 넘어서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남북미가 함께 종전과 평화를 선언을 하는 것, 아니면 중국의 지도자까지 함께 판문점에서 만나 손을 맞잡는 것도 상상해봄 직하다. 그동안 만날 수 없었던 남북의 '사람'들이 판문점에 모여 부둥켜안는 것은 또 어떠한가.
더 많이 꿈꿨으면 한다. 더 엉뚱하고 발칙한 생각을 나눴으면 한다. 상상이 다채로워지면 질수록 그것이 가능해질 가능성도 높아질 테니까. 달에 가는 상상이 현실이 된 것처럼, 평화로운 한반도라는 상상이 현실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덧붙이는 글
필자 김성경씨는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입니다. 이 글은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 소식지 "교회와 인권"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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