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대통신'에 많은 글 기고
[운암 김성숙 평전 24회] 대원들의 사상과 교육을 담당하는 '정치조장(政治組長)'과 기관지 『조선의용대통신』의 편집에 관여하였다
▲ 황북평촌 마을의 4인묘호가장 전투에서 사망한 조선의용대원 4인의 시신이 추후 일본인들에게 훼손될 것을 우려해 호가장 주민들은 밤을 새워 100리를 가서 황북평촌이라는 마을에 안장하였다 ⓒ 박진우
대원들은 민족주의, 마르크스ㆍ레닌주의, 자본주의 등 다양한 이념에 경도되고 있어서 이들에 대한 사상교육이 필요했던 것이다.
▲ 운두저촌 남문마을 남문에 조선의용대원들이 강제 징집된 조선의 청년들에게 '일본 부대를 이탈하여 조선의용대로 찾아 오라'는 문구가 남아있다. 이곳 주민들이 매년 덧칠 작업을 해 당시의 우리글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 박진우
조선의용대는 창설 후(10월 25일) 무한이 일본군에 점령되면서 광시성의 계림으로 본부를 이동하였다. 김성숙도 본부를 따라 계림으로 갔다. 계림에서 그는 일이 많았다.
김성숙이 '조선의용대통신'에 게재한 논설 (주석 11)
▲ 김성숙이 ‘조선의용대통신’에 게재한 논설김성숙이 ‘조선의용대통신’에 게재한 논설 ⓒ 김삼웅
김성숙은 해방 후 이정식 교수와 대담에서 말한다.
△ 조선의용대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했잖아요? 이 연맹을 만들고 나서 이 연맹 소속 맹원들을 전부 모아 의용대를 만들기로 했지요. 우선 중국국민당 중경지부에서 나오는 3~4명과 우리 쪽에서의 4~5명이 합쳐 10여 명으로 의용대 지도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 의용대 경비는 역시 국민당 쪽에서 나왔겠지요.
- 맞아요. 의용대의 비용은 국민당 쪽에서 내놓았지요. 그래서 제1, 제2, 제3지대까지 만들었습니다. 조선의용대는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 밀양 벽화거리에 걸린 조선의용대 기념사진 : 사진 중 노란색으로 표시된 이가 밀양 출신 윤세주와 김원봉이다. ⓒ 여경수
△ 말씀해 주시지요.
- 글쎄 뭐 자세히 말 할 것이 있나? 내 얘기는, 원래 조선의용대는 주로 국민당 강택의 돈을 얻어 쓰고 그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까 그쪽으로 가까운 세력이 있어서 우파를 이뤘다고 치면, 그 반대 세력이 좌파를 이뤘다는 뜻이지. 의용대 안의 좌파들은, 대개 그 사람들은 극단분자들로 중국공산당의 본거지인 연안(延安)과 가까웠지. 그 사람들은 임시정부라든가 하는 우익 단체는 여지없는 것으로 생각을 했어요. (주석 12)
주석
10> 『조선의용대통신』, 제3기, 20쪽.
11> 김광재, 앞의 책, 84~85쪽.
12> 『이정식 면담』, 102~103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운암 김성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